놀라운 이야기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Bliss Yeo 2009. 11. 14. 11:56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어떤 목사님이 이웃 교회에 시무하는 후배 전도사님으로부터 자기 교회의 주일 밤 예배에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기로 약속을 하고 날짜가 거의 되갈 무렵이었습니다. 이웃 교회의 전도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보에 실기 위해 설교제목과 성경본문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 본문은 시편 23편 1절부터 6절까지" 그러자 전도사님은 "그러면 제목은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전도사님이 이를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 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 그 뒤에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약속한 주일 밤 저녁 예배에 그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아 강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밤 예배 설교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가 콱 막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에 핀잔처럼 전도사에게 한 말이 제목으로 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찬송을 하면서도,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서도 제목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목사님은 "그래, 제목대로 설교를 하자!"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준비한 설교의 원고를 덮고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을 바꾸니 성경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푸른 풀밭의 싱싱한 풀을 원하십니까, 맑은 시냇가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은 그 풍성한 풀밭에서 풀을 뜯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너무 배가 불러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양은 배가 불러도 몇 시간씩 계속 풀을 뜯고 우물거리며 되새김질을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목자에게서 오는 참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 분의 양이 되니 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하고 외쳤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기도에 수없이 많은 요구사항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라는 것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달라는 말도, 푸른 풀밭에 눕게 해 달라 울면서 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만족해하고 감사해 하고 그래서 찬양이 절로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가정예배 365] (火) 하나님만 의지하라







찬송 : 435장(통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묵상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고린도후서 1장 8∼9절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선교하다 환난을 당한 것을 통해 주시는 영적 교훈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말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합니다.



고린도 후서 11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환난을 당했는가 하는 것을 좀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고후 11:23∼27). 바울은 이런 수많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려 하는 영적 교훈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환난과 역경의 터널을 거쳤습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 되어 피아니스트 생활을 중지하고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밀턴은 시각장애인이 되어 ‘실락원’을 썼습니다. 존 번연은 12년의 감옥생활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하는 ‘천로역정’을 저술했습니다.



바울은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죽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죽을 상황이 돼야 버려야 할 것 버리고, 고쳐야 할 것 고칩니다. 사람들은 ‘마지노선’이 무너져야 하나님께 손을 들고 나옵니다.



마지노선이 무엇입니까. 2차대전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마지노 요새를 믿었습니다. 너무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요새만 있으면 독일군을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요새에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막강한 폭발력을 동반한 공중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설마하며 방심하는 사이 결국 독일이 공중에서 프랑스를 공격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최후의 선을 일컬어 ‘마지노선’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련해서 인생의 마지노선이 무너져야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자신을 의뢰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앙은 자기 신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 건강 물질 지식 지혜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잘나봤댔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다 무상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버립니까. 환난을 통해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환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멜란히톤은 “환난과 곤고가 나를 골방으로 몰아넣어 기도하게 하고, 그 기도는 환난과 곤고를 몰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브루스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웅변적인가 하고 수사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긴가 기하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많은가 산술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조직적인가 논리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다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기도 : 오늘도 눈물을 뿌려 기도하며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주께서 도와주시고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