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이야기

[스크랩] 성공목회의 모델, 이렇게 바꾸자

Bliss Yeo 2010. 2. 3. 23:57

성공목회의 모델, 이렇게 바꾸자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경직 목사님께서 은퇴하신 후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의하신 적이 있었다. 강의 후 목회자와의 질문 시간에 목회자들의 다양한 질문이 있었다. 당대에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에게 후배 목회자들의 질문은 끊임이 없었다. 이때 어느 목회자가 목사님께 이렇게 질문했다. “목사님이 목회 성공하신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받으신 한목사님은 한참 동안 말씀이 없이 아래만 내려다보고 계시더니 드디어 말문을 여셨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목회에 성공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성공한 목회자인지 저 시골에서 평생을 몇 십 명 안 되는 성도를 돌보느라 애쓴 목회자가 성공한 목회자인지 하나님 앞에 가봐야 알겠습니다.” 목사님의 이 말씀에 장내는 숙연해졌다. 질문자는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여쭈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 목회하실 때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강조하신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때 목사님께서 목회에 강조하신 부분들을 일러주셨다.

한 경직 목사님을 비교적 오랜 기간 곁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목사님의 그 말씀은 가식이 아닌 게 분명하다. 진심으로 그 분은 목회 성공자라고 자처하지 않으셨다. 그날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당신의 대답을 통해 목회에서의 성공을 인간적 잣대로 가늠하기란 불가능함을 스스로 공포하신 셈이다. 어떤 면에서 목회자들은 자신이 성공적 목회자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떠들썩하게 알아준다 하더라도 성공자가 아닌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세상이 몰라준다 하더라도 성공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목회에서의 성공을 인간의 눈으로 표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에서의 성공을 논하는 그 자체가 조심스러운 일이다.

 

교회성장이라는 목회 왜곡의 늪을 지나

196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 후반까지 한국교회는 줄기차게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기간동안 한국교회는 매 10년마다 교세가 배가가 될 만큼 세계 교회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런 성장의 열기는 한국교회가 열심 있는 교회로, 힘 있는 교회로, 신앙적인 교회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런 교회 성장은 분명 교회에 필요한 요소이며, 필자는 이것이 그 시기에 한국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확신한다.

교회 성장 시기에 한국의 거의 모든 지역 교회들은 성장이 교회의 목표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에 미국의 실용주의적 교회성장론이 한국교회에 소개되면서 큰 호응을 얻었고 대형 교회 미화론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실 용주의적 대형교회론은 우리의 전통 사고와 접목되어 급속도로 뿌리내렸다. “꿩 잡는 게 매다혹은바로 가나 모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의 전통 사고는 목회과정보다 목회 결과를 중시하는 당연한 귀결을 얻게 되었다. 결과만을 따지는 관행은 질서를 파괴하고 부정을 당연시한다. 이런 결과중심적 사고는 목회까지도 지배했다. 결과중심적 목회는교회성장=목회성공이란 등식을 낳게 했고 수단과 방법보다 교회 성장이라는 목회 결과를 가지고 목회의 성공을 가늠하게 되었다.

이전 시대의 이런 목회 성공론은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기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도 사실이다. 산업사회의 기조는 분리와 경쟁이었다. 산업사회의 전반은 경쟁심리가 작용하여 서로 분리하는 풍조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경쟁적 교회 관계는 교회의 성장 혹은 교회의 대형화가 중요한 목표였고 이런 목표는 어느 정도 성취했다.

또한 산업사회의 조직 형태는 대형화되었다. 기업은 규모기업이 주류를 이루었고, 재벌이 경제를 이끌었고, 대자본이 소자본을 잠식했고, 군사 대국이 군사력 약한 나라를 식민지화했다. 대형은 산업사회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이런 산업사회의 전형은 교회에도 적용되었다. 대형 교회가 산업사회의 성공적 교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 교회가 포함될 만큼 대형 교회를 양산했다.

물론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산업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세계 전체가 산업사회였지만 한국교회가 대형화 추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대형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서양인들은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말과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 말을 부인한다. 청소년들도숏다리보다롱다리를 좋아하고 우리의 말에는()가 보편적이다. 낮 예배는 대예배이고, 소강당이 없어도 대강당이고, 운동장이 하나이지만 대운동장이다.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우리나라의 최고 학부는 대학교이다. 그리고 서울 한강에 걸친 다리는 모두다대교. 이런 우리의 대형화 심리는 결과적으로 큰 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이 있다. 한국교회가 대형 교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서구의 교회들에 비하면 평균 교인수에 있어서도 월등하지만 그래도 한국 교회 가운데 이른바 소형 교회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에서 주일 출석 숫자가 평균 300명 이상 되는 교회가 전체의 7.8%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형 교회를 보편화하여 한국교회는 대형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산업사회식 안목일 뿐이다. 재벌을 보고 한국 경제를 논하는 재벌 중심의 경제의식과 다를 바 없다. 대형 교회 중심의 성장론으로 인해 수많은 작은 교회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성장이 성공인 시대 속에서 우리는 잃은 것 또한 많았다.

 

교회성장,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만 유의미

교회성장 중심의 목회는 목회의 균형을 상실했다. 물론 한국교회가 짧은 기간에 대형화를 이루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음을 인정한다. 단기간에 이룬 급성장은 균형 있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교회의 균형 있는 발전, 균형 있는 목회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미래 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며, 이미 부분적으로 이러한 중심 이동 현상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동안 교회의 관심은 성장이었고, 선교는 개인영혼구원 혹은 교회성장으로 그 의미를 제한 내지 축소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인 정보 사회에서의 교회의 관심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물음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개념도 개인구원이라는 제한적 개념에서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통전적(holistic) 개념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새로운 변형의 시도는 교회의 관심을 사회봉사로 전환시킬 것이다.

최근의 한국교회 침체 현상의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수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질적 성숙에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다. 어느 사회든 기독교인 분포가 25퍼센트 이상이면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한국교회는 이 땅 가운데 기독교 문화를 정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주일이면 교회당에 나오는 교인은 많은데 주일 외에 사회에서 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소리가 크다. 그래서 흔히 이러한 교인들을주일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이라 하며이름뿐인 크리스천(nominal Christian)’이라고 한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교회는 성장했고 그리스도인도 많이 있지만 우리의 문화는 그리스도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목회학에 서는 교회의 목적 성취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지향한다. 상향(upreach)과 내향(inreach)과 외향(outreach)이 그것이다. 상향은 교회의 첫째 목표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다. 이것은 예배이며 전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교회의 목표이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도 예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의 제일의 목표다.

내향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며 힘의 집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훈계이며 축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내향이란 말 그대로 안으로 향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적 개발을 통하여 성취 가능하다. 그리고 교회가 수양이나 학습이 필요한 것은 교회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외향은 실제적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전도이며 돌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사회에 대한 섬김을 통하여 교회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이 세 가지 지향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상향이 제일 목표이기는 하지만 상향 중심의 목회는 교회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 내향과 외향이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루게 될 때에 교회의 목적은 성취 가능한 것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상향과 내향에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으나 외향은 상대적 무관심이었다. 특히 외향을 전도라고 한 것은 좁은 의미의 개인영혼 구원이 아니라 사회를 돌보는 일이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들이 교회성장이라는 명제에 묶여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지나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회를 외면했고 최근에는 그 대가로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베이비붐 이전세대(Pre-Boomers),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그리고 베이비 거부 세대(Baby Busters)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베이비붐 이전에는 선교와 기도,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던 교인들이 베이비붐 세대에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베이비 거부세대에는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변화산 위의 교회였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산 아래는 한 간질병 걸린 어린아이가 고통을 당하고 있고, 자신의 아홉 동료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고, 아버지는 안타깝게 현실을 지켜보고 있지만 베드로는 산 아래보다 산 위의 신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산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였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초막 셋을 짓고 산 위에 머물러 있던 교회였다. 본당, 교육관, 기도원이 이 셋이다. 적어도 한국교회는 이제 산 아래의 필요를 충족하는 복지관을 지어야 했다.

한국교회도 산 위의 경험이 필요하다. 산 위의 황홀한 변화의 경험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산 위의 경험은 산 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아래를 위한 경험이기 때문에 산 아래로 내려가는 말씀의 외적 생동이 있어야 한다. 산 위의 변화의 경험 없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위험하지만 산 위의 변화만 추구하고 산 아래에서 기다리는 자들을 외면한다면 이것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자세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영적 경험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의 영적 실천을 동시에 중요시한다.

이런 불균형이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침체 혹은 쇠퇴의 원인이 된 것이다. 많은 사회인들이 교회는 자신들밖에 모르는 이기적 집단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의 재산을 공개하라는 소리도 사실은 교회의 재산을 분배하라는 소리다. 이런 모든 소리는 교회가 상향 중심의 교회, 성장 지향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은 반쪽 성장이었다. 반쪽 성장은 반쪽 성공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진정한 성공, 하나님만 아는 일

한국교회의 성장론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이른바 목회 스타를 제조하는 일이다. 최근에 흔히떴다는 표현이 보편적이 됐다. “아무개가 떴다”, “누구는 뜨는 중이다라는 등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중에는떴다 방도 있다. 이런 대중적 표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뜨게 만들고, 뜨는 것은 성공의 척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뜨기를 기대하고, 뜬 사람을 스타라고 한다.

이와 더불어 일반화된 표현은튄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튀어야 산다”, “튀는 것이 성공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경쟁심리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현대인의 삶의 형태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 사고방식이나 삶이 교회에도 깊숙이 침입했으며 목회자의 의식에도 침투했다는 사실이 목회 성공을 왜곡하게 만들고 한국교회를 우려하게 만든다. 교계에 이런 의식을 부추기는 데는 일반 언론뿐 아니라 기독교 언론까지 한몫한다. 또 신학대학 안에서는 학생들에게 미래에 닮고 싶어하는 목회자를 설문조사를 통해 발표하기도 한다. 신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목회자는 한결같이 뜬 목회자들이다. 그들의 목회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고 유별한 특기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가 수십 년 혹은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독특한 은사를 가진 목회자란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존경의 대상, 닮고 싶은 대상의 수준을 하향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신학생들이 닮고 싶어하는 목회자가 어쩌다가 나올 만한 목회의 달인 혹은 기인(奇人)이라면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장래에 목회에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의미다. 정말 닮고 배워야 할 목회는 이른바 뜨지 않더라도 목회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목회여야 한다. 목회의 성공을 교회 성장 혹은 대형 교회라는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소명에서 벗어나지 않고 남의 목회를 흉내내지 않는 자신만의 목회에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목회의 성공 기준은 다른 사람이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늠자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목회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며, 보람을 느끼며, 기쁨을 맛보는 목회가 성공적 목회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성공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무리 다른 사람이 성공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성공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목회의 성공 여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그 내밀한 영적 관계의 진실성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성공 여부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자신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성공이라는 말, 오직 영성과 도덕성에 붙이자

목회자의 자질 혹은 나아가서 목회자의 성공을 논할 때 필요한 요건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 일꾼의 자격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 특히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의 자격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 선출은 출애굽기와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이 기록을 통하여 성경의 일관되는 하나님 일꾼의 자격을 알 수 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모세는 아침부터 밤까지 백성들의 송사문제로 탈진하게 되었고 이를 본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중간 지도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자격은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것이었다( 18:21).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한 것은 영성이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것은 도덕성이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신앙 공동체 모습을 본다. 사도들은 매일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골몰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일인 기도와 말씀도 등한히 하게 되었다. 사도들은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일곱 사람을 세워 구제하는 일을 대신하게 한다. 처음 교회에 세워진 일곱 사람의 자격은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6:3) 것이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은 영성이며, 칭찬 듣는 것은 도덕성이다. 그 외에 목회서신에 나타난 교회의 직분자들의 자격도 한결같이 영성과 도덕성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성경이 강조하는 교회 일꾼의 자격은 도덕성이다. 성경은 구체적 도덕적 규범을 요구하고 있다.

목회자의 자격이 영성과 도덕성이라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두 가지 요건은 성공적 목회자의 중요한 자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 두 가지 필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여 문제와 실패를 맛보게 된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목회자의 요건도 실제로는 하나님과 자신 외에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일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성공은 객관적 잣대로 성공 여부를 따질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진정한 성공자는 성경적 규범에 맞는 목회자이다.

 

성공 목회, 오직하나님의 나라눈으로 보자

한국교회에는 샤머니즘의 영향이 뿌리깊게 내리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샤머니즘적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긍정적 의미도, 부정적 의미도 동시에 내포한다. 샤머니즘의 제일 명제는굿판은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이런 대형화 심리가 한국교회를 성장하게 한 요인의 하나라고도 한다. 유동식 교수의 말을 빌리면 샤머니즘의 특징은 현실성, 의존성, 기복성이다. 샤머니즘은 내세적이 아닌 현실적 종교이다. 샤마니즘은 샤먼(무당)이 있어야 신과 사람이 만나는 종교행위가 성립된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샤먼에게 의존하는 의존성이 강하다. 그리고 샤머니즘의 핵심은 복을 받기 위한 기복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기복적이라는 자타의 비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기독교사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모습은 기복적이라고 볼 수 없다. 1960년대에 제3공화국이 출발하면서 국가의 기조는 가난에서의 탈피였고, “잘 살 수 있다로 바뀌었다. 경제성장이 국가의 시책이 됨으로써교회도 잘 살 수 있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로 바뀌었다.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교회의 선포의 내용도 성장으로 변했고 교회와 개인의 경제적 부나 복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한국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 믿고 천당이 전도였으며, 설교의 핵심 주제가하나님나라였다. 하나님나라를 전하며 가르치던 교회가 경제 성장과 더불어 교회 성장이 교회의 핵심적 목회 주제로 바뀌면서예수 믿고 축복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다시 교회의 본질적 주제인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서야 한다. 외형적 성장이나 복이 목회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사회에 심어주는 그 일에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해 성공 여부를 생각해야 한다. 목회의 성공은 결국 하나님나라에서 찾아야 할 하나님나라의 몫이지 이 세상 나라에서 찾을 수 있는 세상적인 것은 아니다.

 

이성희/ 서울 연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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