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

라브리공동체

Bliss Yeo 2012. 12. 4. 17:35

립 반 윙클(서양 고전 동화에 나오는 인물. 숲에서 잠시 잠을 자고
마을로 내려오니 세상은 20년의 세월이 흘러 있었다는 이야기)은
20년 동안 잠을 자고 난 후 그 공백을 통해서
오히려 예리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유익한 일이었지요.
실제로 그 시간들을 살지 않고도
역사의 변화와 결과들을 금방 볼 수 있었으니까요.
앞의 20장에서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약 15년 정도를 살펴보셨습니다.
이제 이 장에서는 오늘날의 라브리에 대해서
립 반 윙클의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장과 21장 사이에 5년의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이 책의 훨씬 앞에서 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생각한 약속을 기억하세요?
맞아요. 이사야 2장 2절의 말씀이었지요.
지난 토요일 밤, 그러니까 1968년 7월 중순에 프랜과 나는
발코니에서 테라스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프랜은 우리 침대 발치에 앉아서(그것은 여전히 프랜의 책상이었습니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침대 끝에서 작업을 했지요)
다음날 예배 도중에 있을 결혼식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내 앞치마는 얼룩져 있었고, 내 손에는(신시야와 다른 헬퍼들과 함께)
저 125명의 배를 채울 음식을 만드느라
빵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에 잠깐 나와서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교수, 목사, 의사, 변호사, 화가, 건축가, 작가, 음악가, 간호사,
교사, 비서, 과학자, 배우 그리고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
게다가 사회 낙오자와 자의적 이탈자까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일본인 그리고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네델란드인,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캐나다인,
여러 주에서 온 미국인, 스위스인, 남미인, 스칸디나비아인, 호주인,
뉴질랜드인, 그리고 남아공화국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머리가 긴 남자아이들도 있었고,
다양한 모양의 수염과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머리가 긴 여자아이들, 비트족 타입, 그리고 최신 유행파들이 있었고,
라브리에 처음 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라브리에서 기독교인이 되어서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온 라브리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20세기의 젊은이들, 그리고 이 '의미 없는 삶'에서 이미
오랜 세월 마약을 해 온 경력이 있는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찾아온 기독교 사역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교수들도 있었습니다.
각종 종교적 철학적 배경들을 20세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들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서도,
오늘날의 '인공적 우주'에는 만족할 수 없어서 의미를 찾고픈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감상적이 되었습니다.
그들 몇몇의 개인 역사를 추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빌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느 여학생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라브리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서 배낭을 메고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콧수염을 기르고 둥글고 가는 테의 안경을 쓴 빌은
마약 등 안 해 본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장 좋은 사립 고등학교를 나오고
미국 동부의 상류층 가정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자퇴하고 반항심에서,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빌은 이제 확실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그는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메시아의 자녀입니다.
이제 빌은 저 아래에서,
빌이 그렇게 확실하게 찾은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며 찾아보려고 파렐 하우스에 공부하러 온 두 친구에게
진지하게 그리고 매우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강조해서 말할 때마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밝은 파란 색 펠트천 모자를 쓴 이언도 있었습니다.
이언도 마찬가지로 이제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과 2주 전에 그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토요일 밤은 늘 하던 대로 프랜이 인도하는 토론 대신에
콘서트가 있었다는 점에서 달랐습니다.
콘서트는 숨막히게 아름다웠습니다.
렉스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로 우리를 감동시켰고,
제인은 8년만에 처음으로 오페라 아리아를 불렀으며,
어느 벨기에 소녀는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했습니다.
주일 예배도 보통 때와는 달랐습니다.
아침 예배에 결혼식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간략하게 해 드리지요.
잭은 라브리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채
12월에 있었던 배리와 베로니카 씨그렌의 결혼식 중간에 도착했습니다.
인생의 '해답'을 찾으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캐나다인 의학생 잭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라브리가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잭은 오랜 친구를 만날 장소로 우리 집의 주소를 받은 것입니다.
잭이 너무 빨리 기독교인이 되는 바람에 우리는 다들 무척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그토록 빨리 이해하는데 반해,
또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남아서 파렐 하우스의 학생이 되었고,
아침 일찍 그리고 밤 늦게까지 공부하면서
남들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그 후에 잭은 헬퍼가 되었고 나중에는 간사가 되어서
라브리의 목공소를 책임지고 돌보았습니다.
호리호리한 키에 짙은 색 피부, 곱슬머리에 수염을 기른 잭은
모든 일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신학 공부를 더 깊이 있게 하도록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들어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 등록을 했습니다.

또한 크리스텔(라브리에 헬퍼로 온 독일인 여학생이었습니다)이
자신의 아내로 딱 알맞은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잭은 라브리에 온 지 6개월이 지난 이번 주 일요일에
크리스텔과 주일 예배 중간에 결혼식을 올리고
피로연을 마친 뒤 떠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잭은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참석하는 결혼식 도중에 이곳에 왔다가
자기 자신의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이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참 특이한 기록이지요?

따라서 이번 주말에는 125명분의 토요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 외에도,
콘서트를 마친 후에 결혼식을 위해
나뭇잎과 이끼와 통나무와 세로로 세워진 벽돌과 줄기가 긴 양식 데이지들로
예배당을 장식하고, 그 후에는 주일을 위한 요리도 해야 했습니다.

다음 날인 주일 아침 예배에는 설교 직전에 결혼식이 있었고,
각 샬레로 나뉘어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레 멜레즈에서는 52명이 아침 식사를 했고,
그 직후에 이어진 결혼식 피로연에서는 135명이,
그리고 저녁 식사에는 125명이 먹었습니다.
다른 샬레들도 각자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람들을 맡아서 먹이고 재웠습니다.
2층 침대는 물론 발코니와 거실 바닥에까지
자리라는 자리는 다 채워서 캠핑용 침대를 펼쳐 놓았습니다.

바젤에서 오는 여학생들을 위해서 레 멜레즈의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아야 했던 초창기나 지금이나 비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샬레와 간사들이 늘었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사는 이러한 희생의 삶에 참여하고 있으며,
진리를 찾으러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뿐입니다.

지난 5년 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진행시키면서 생긴 변화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수잔과 래널드가 5년 전에 보 씨뜨를 맡고 있었는데,
지금 그들은 4년째 영국 라브리 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첼씨에 있는 아파트 대신에
런던 일랑에 집을 마련해 주신 일을 말로 하자면 아주 깁니다.
그 일과 관련된 기도 응답과
하나님께서 52번지 클리브랜드 가의 그 집을 선택하셨다는 확신은
샬레 레 멜레즈를 얻기까지의 과정만큼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수잔과 래널드가 스위스에 남아 있기보다는
영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사건들도 마찬가지로 분명했습니다.
래널드는 라브리 일을 하면서 동시에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신학 학위를 우등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영국에 있는 그 집에서도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와 성경 공부와 주일 예배가
토론과 테이프 듣기 등에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랜뿐만 아니라 래널드도
영국의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봄에 써스에서 열린 아쉬버넘 수양회에 대해서도 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라브리 최초의 정식 수양회였는데,
프랜과 한스 로크마커(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의 미술사 교수)와 래널리 맥콜리,
존 산드리 그리고 허비 우드슨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강의를 했고,
라브리 앙상블(소프라노에 제인 스튜어트 스미스, 바이올린에 프랜시스 크레이머
그리고 피아노에 렉스 험리히)이 한 주에 한 번씩, 두 번의 공식적인 콘서트를 가졌고,
오후에는 수양회에 참석한 재능 있는 사람들이 즉흥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을 위해서 수잔이 여름 성경학교를 인도했는데,
상당히 '완성된' 프로그램으로 기도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위에모의 라브리 비서인 노마는 참석자 등록을 도와주러 와서
사람들에게 방을 배정해 주는 일까지 했고,
이제 막 미국에서 도착한 실비아는
부모들이 강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저녁마다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수양회는 그동안 영국 여러 곳에서 라브리 강사들에게 들려 달라고
요청한 주제들을 한 곳에 모여서 같이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등사된 안내문이 보내졌지만,
그 외의 광고는 전혀 없었고, 교회나 신문이나 잡지에 공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두 주간의 수양회 기간 중에
한 주나 주말에 참석한 사람이 450명이 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수용할 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일정 기간밖에는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의 다양함은
다시 한번 20세기의 한 단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적어도 나이, 교육, 가정 환경, 국적 그리고 인종에 관한 한은 그랬습니다.

아쉬버념 수양회는 '첫' 수양회였습니다.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이러한 수양회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러한 수양회가 라브리의 다양한 강의와 토론들을
라브리 이외의 장소에서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될까요?
우리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번 봄에 수양회를 연 것은 옳은 일이었으며,
영국에서 또 한 번의 수양회를 가지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래널드와 수잔이 떠나고 난 후의 보 씨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에서 클로디와 앨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요?
파렐 하우스에서 1년 간 학생으로 있었던 그 부부는
간사로 남아 있기를 원했습니다.
2년 동안 앨런과 클로디는 간사로서 보 씨뜨를 책임졌고,
그 후에 그들은 대학가에 있는 교회로 가서 자신들이 라브리에서 배운 것을
학생들을 돕는 데 사용해야겠다며 미국으로 갔습니다.

또 닉과 미나가 라브리에 있었습니다.
미나는 제네바의 기숙학교 학생으로 있던 16살에 라브리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대학 공부를 마치고 난 후에 미나는 라브리로 돌아와서
또 한 쌍의 '라브리 커플'이 되어 2년 동안 보 씨뜨를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닉이 이번 가을에 신학 공부를 마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잭과 크리스텔, 제람과 비키,
피에르와 다니엘(프랑스계 유태인으로 초창기 파렐 하우스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배리와 베로니카(잭이 오던 날 결혼한 커플이지요)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같은 신학교에 입학하는 라브리 파렐 하우스 학생들이 또 있습니다.
짐(현재 라브리 간사로서 채소밭을 맡고 있습니다),
이곤(우도를 통해서 기독교인이 된 우도의 남동생이고,
이제 독일에서 첫 대학 시험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장학생으로 가는 대신에
파렐 하우스에 온 캐나다인 여학생 씨나입니다.
이번 가을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그 신학교는 라브리 사람들로 북적댈 것입니다.

라브리에서 '거듭난', 또는 라브리에서 일을 도운 사람들이 다니는 신학교는
세인트 루이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신학교에 하버드 졸업생 세 명이 가 있고,
라브리에 왔다가 그 신학교로 간 웨슬리 대학의 여학생들도 있습니다.
그 여학생들은 자신을 통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같은 과 친구들도 데리고 갔습니다.

라브리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신학교는 영국에도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 있는 기독교 선교 단체와 기관들에도
라브리에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수백 명(이제는 아마 수천 명이 될 것입니다)의 사람들이
라브리에 왔다가 무엇인가를 보고 그들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이 '무엇인가'는 기독교 진리 이상의 것입니다.
그들은 20세기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철학, 미술, 역사, 음악, 문학, 연극
그리고 텔레비젼 프로그램 사이의 관계들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던져 주는 일방적인 메시지뿐만 아니라
현상 자체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으며,
'생각'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고,
창조적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재는 래리와 낸시가 보 씨뜨의 주인으로 있습니다.
래리는 5년 전에 라브리에 왔는데, 노르웨이의 한 유스 호스텔에서 만난
어떤 남자(라브리에 단 이틀만 머물다 간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묘사를 듣고도 아무런 이름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에게서 라브리에 대해 들었습니다.
래리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해답을 찾고 있었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유럽에서 1년을 보내면서,
일도 하고 여행도 하고 유스 호스텔에서 묵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공은 정치학이었습니다.
그는 1년 동안 라브리에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 대학에 갔고,
학위를 마치기 전에 1년 간 간사로 일하기 위해
아내 낸시와 함께 라브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보 씨뜨에는 계속해서 관리할 사람이 생겼습니다.

수년 전에 샬레를 하나 달라고 기도하다가
그것을 살 돈은 받지 못했지만,
대신에 도서관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 샬레의 이름은 샬레 레 샤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샬레는 어떤 여성이 사서 힌두교 의식과 연관이 있는
채식주의자 하숙집으로 운영했습니다.
이 여성이 죽은 후에는 그 집의 상속자들이
다른 두 그룹에게 이 집을 팔려고 했습니다.

한편 힌두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한 여성이
오래 전부터 그 집을 사서 라브리가 사용하도록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은사를 사용하셔서,
원래는 기독교인들이 지었고 또한 기독교인들이 사용했지만
지금은 힌두교를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이 집을 풀어 주실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은사가 이 집을 원래 용도였던
성경의 진리가 가르쳐지는 집으로 회복시켜 놓을지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법적인 문제와 금전상의 이유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지만,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1967년 5월 20일, 라브리가 샬레 레 샤뼁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
웨일즈에 있는 우리에게 전화로 전해졌고,
지구 다른 편에 있는 매입자에게도 전해졌으며,
기쁨에 넘쳐서 흔드는 종소리로 라브리 손님들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우연일까요?
이처럼 수천 마일의 거리와 수년간의 시간을 아우르는 그 자세한 내용들을
여러분께서 다 이야기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 부부가 레 샤뼁을 맡게 되었을까요?
'우연히도' 데비-맞습니다, 저희 막내딸이지요-와 그 남편 우도가,
레 샤뼁이 라브리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전에
위에모에서 라브리 간사로 일하고 싶다고 지원을 했습니다.
데비와 우도 미들만은
윌리엄 파렐이 종교 개혁 초두에 설교를 했던 올롱 교회에서
4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는 데비의 결혼식을 보며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프리실라와 수잔의 결혼식의 추억에 잠겼습니다.
나무 냄새와 이끼가 낀 통나무 그리고 아이비로 가득한 그곳에서,
수년 전 프리실라의 결혼식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룻이 가로되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를 들었을 때처럼,
제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키가 크고 금발 머리인 신랑을 만나러 들어오는
신부의 빛나는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또한 신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황홀한 시선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결코 계획하지 못했을 연속성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객들 사이에는 수년의 세월이 섞여 있었습니다.
초창기 로잔의 시절들, 샹뻬리에서의 나날들
그리고 그 당시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의 라브리의 역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 연속성은 우리 가족의 확장과 라브리 가족의 확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결혼식 날에는 4년 뒤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데비는 우도가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세인트 루이스의 존 버로우스 학교에서 3년간 불어를 가르쳤습니다.
우도는 래널드가 케임브리지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것처럼
독일의 프라이브르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데비는 프리실라처럼 로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프리실라와 존이 평생의 일로서
다른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했던 것처럼,
수잔과 래널드도 그리고 훗날 데비와 우도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딸들과 국적이 모두 다른 사위들이 라브리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것이 '예상된 일'이었거나 '정해진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일이라고 믿고 있으며,
해마다 딸들과 사위들은 그 일 속에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속해서,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라브리를 '가족'이 공유하게 하셨는지,
그것은 우리에게 신비하고도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제 가족의 공유는, 우리의 개인적인 가족뿐만 아니라
'영적인 자녀들'까지도 포함하지만 말입니다.

레 샤뼁이 우리 것이 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그 집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35명이 발코니를 포함해서 자리란 자리는 다 차지하고 잠을 잤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그 샬레를 얻지 못했다면,
16명의 아프리카인들을 포함한 35명의 사람들이 돌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레 샤뼁은 올해에도 손님들과 헬퍼들과 파렐 하우스 학생들
그리고 2월 28일에 데비와 우드 사이에 태어난
작은 미들만, 나타샤로 빈틈 없이 가득 찼습니다.

5년 전까지도 리네트와 조는 여전히 '일벌'의 집에 살고 있었지만,
그때 이후로 참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리네트와 조는 마을 저편 끝에 샬레를 하나 사서
'베다니'라고 이름을 붙인 남학생 기숙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프랜시스 크레이머는 '일벌'의 집 부르도네뜨를 사서
두 공간으로 나뉘어진 것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조가 학위를 마치기 위해 리네트와 조가 미국으로 간 뒤로
그들의 샬레는 라브리가 임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조와 리네트에 이어서
그 샬레에서 살던 제레미와 레지나
(새 예배당에서 처음으로 결혼식을 올린 커플입니다)가
아일랜드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생겨 떠나자,
이번에는 클레어가 그 집을 관리하고 요리를 하는
베다니의 여주인이 되었습니다.

제레미가 베다니의 차고에서 시작한 목공소는 다른 사람들이 맡아서 했습니다.
밥 홈즈가 제레미를 대신해서 베다니의 남자 주인이 되었고,
토론 테이프를 관리하기 위해서 카드 시스템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되는 이름들에는 각각 딸린 사연들이 있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겠지요.
예를 들어 남 캘리포니아에 미용실을 운영하던 클레어가
그 모든 것과 자신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라브리로 와서
아무런 금전적 보상도 없이 힘든 일을 하게 된 이야기도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또한 무엇이 그녀를, 마치 명석한 인사 관리자가
그녀를 심사하고 여러 지원자 중에서 뽑아낸 것처럼
그렇게 그 일에 잘 맞게 했는지는 정말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간사들을
라브리로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한 지 이제 13년이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이 이곳에 있기를 원하시는 기간만큼 이곳에 머물게 하셨고,
또 바로 지금 이곳에 그들이 있기를 원하셔서
지금 있는 이 사람들을 보내셨다고 확신합니다.

예를 들어 오스 기네스는 편지를 정리하고
몇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오기로 되어 있는지를 관리를 해서
그 외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하지만,
그는 동시에 뛰어난 설교자이자 성경 해석가이기도 합니다.
노마는 비서 업무를 할 줄 알뿐만 아니라
문서 타이핑 경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 왔다 간 간사들이나 계속해서 이곳에 남아 있는 간사들은
모두 라브리 역사의 특정한 시기를 위해서
그리고 이 사역의 특정한 부분을 공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부르도네뜨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그곳에 살던 크레이머 부인은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 후로 얼마간 라브리 근처에서 살고 싶어하는 여러 가족들이 임대를 해 왔습니다.

라브리는 이미 언급한 집들 이외에도
마을에 있는 가정의 방들을 임대해서 여유 공간을 마련하고,
마을 한 구석에 여러 채가 붙어 있는 리온지라는 샬레를 임대합니다.
리온지는 클레어가 베다니를 맡기 전에 여학생들을 위해서 관리하던 곳으로,
지난 겨울에는 파렐 하우스에 온 가족이 사용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로크마커 부부가 리온지를 관리하는 라브리 커플입니다.
로크마커 부인은 요리를 해서 손님들을 먹일 뿐만 아니라,
6개의 침대가 놓여 있는 침실에서 여학생들을 재우고
작은 침실 두 개에도 사람들을 재웁니다.
로크마커 교수는 강의하는 것 외에도 식사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대화를 하고,
그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사람들과 개별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로크마커 부부가 라브리 멤버가 된지는 4년이 되었고,
네덜란드의 일은 더 성장해서 지금의 두 명의 간사,
한스 반 세벤터와 그의 아내 조안을 두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라브리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허비와 도로시의 아파트가
더 이상 예배나 주일학교, 강의, 저녁 토론에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한 채의 아파트를 임대해서 모임을 하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추가된 시설은 주말 수양회와 여름과 부활절 캠프 등에 사용할 빌라로
산 페델레라고 하는 코모 강 위 산간 마을에 있습니다.

비록 이탈리아에서의 일은 느리고 낙심이 되기도 했지만
허비와 도로시가 기초를 잘 다져 이제는 확고한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우리 국제 교회(개혁 장로교)의 소속인 교회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허비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 일을 개척해 나가고 있으며,
유한한 인간인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들을 마찬가지로 겪고 있습니다.

내가 거의 5년 전에 이 글을 썼을 때는
예배당 건축이 시작되었지만, 마무리는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헌당하는 날은 찾아왔고,
몇 달 후 플렌트롭 부부가 직접 만든 오르간을 헌물했습니다.
플랜트롭 부부는 또 오르간 헌물 예배 때
네덜란드에서 오면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르간 연주를 할 얀센 씨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서부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로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입니다.

얀센 씨는 10월의 항금 달빛 아래서
제인 스튜어트 스미스와 함께 콘서트를 했습니다.
제인은 자신의 기도 응답인 오르간의 아름다운 반주와 함께
기쁨에 넘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인은 오래 전부터 오르간을 위해서 기도해 왔습니다.
그것도 바로 이 오르간, 위대한 네덜란드인 오르간 기술자가
특별히 디자인한 수공 바로크 오르간을
우리들의 작은 샬레 예배당에 놓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밤은 동화와도 같은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당 뒤 미디의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경치와
론 계곡의 반짝이는 불빛이 황금빛깔의 달빛에 모두 잠겨있는 것을 내다보며
그 오르간의 장엄한 연주를 들었고, 콘서트 후에는
다시 샬레 레 멜레즈로 걸어 올라와서 대화와 다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그 예배당은 주일마다 꽉꽉 찹니다.
의자들이 다 차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닥에도 쿠션을 깔고 앉습니다.
또한 발코니에도 벤치를 놓고(이 벤치들은 식사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샬레로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파렐 하우스로 이어지는 바깥 계단에도 앉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교회 예배, 강의, 콘서트, 토요일 밤 토론
그리고 일요일 밤 기도 모임에도 사람들이 넘칩니다.
예배당 앞에는 오르간과 강단이 있고,
그 왼편에는 벽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숨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내다보입니다.
오른쪽으로는 뒤에서 3분의 1정도 되는 지점에 커다란 석조 벽난로가 있는데,
토론, 기도모임, 성찬 예배, 그리고 몇몇 비공식적인 콘서트 때에는
이 벽난로가 '정면'이 되어서 사람들은
타닥거리며 굴뚝 위로 올라가는 불을 바라보며 반원으로 앉습니다.

파렐 하우스로 이어지는 계단을 언급했으니 얼른 설명을 해 드려야겠군요.
일광욕실에 일곱 개의 책상으로 되어 있는 파렐 하우스는
2교대로 해서 14명의 학생밖에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상상하시다시피 그것은 너무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새 예배당 밑에는 폭이 좁고 긴 공간이 있었습니다.
예배당은 가파른 언덕에 지어져 있어서
지상 높이에 출입구가 있기는 하지만, 발코니는 공중에 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이는 예배당과 같지만 폭이 좁은 공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가능하면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새로운 파렐 하우스로 만들 수 있는 돈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돈을 유산을 통해서 보내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사촌인 마리온 페이든은 이집트 선교사로 45년 간 일했습니다.
그 동안에 그분은 언덕 바로 아래에
위에모와 올롱 중간에 있는 올리앙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곤 했습니다.
지금의 재활원인 벨뷔는 그 당시 호텔이었고,
올리앙에 있는 커다란 사각 모양의 집 역시 호텔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벨뷔에서 차를 마시러 언덕을 올라오곤 했습니다.

라브리에 전달된 마리온은 돈은 두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새로운 파렐 하우스를 완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녹음기가 장착된 책상 16개가 들어갈 만큼 공간이 넓습니다.
부엌 하나와 화장실 두 개를 지을 만한 공간도 남았지만,
지금은 부엌에도 책상을 들여놓고 파렐 하우스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교대로 하면 예배당 밑에 있는 그 공간에서는 50명이,
그리고 보 씨뜨에서는 16명이 공부를 할 수 있어서,
현재 오전과 오후 교대로 할 때 수용 인원은 66명입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예외가 될 만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파렐 하우스 학생들은 3개월 이상 머물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자리가 나면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마리온의 돈은 또한 소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밭을 사게 해 주었습니다.
집을 짓기에 아주 좋은 자리이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이 땅의 용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계획을 구하며,
지금은 붉은 콩, 브로콜리 그리고 완두콩과 옥수수를 재배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테이프와 녹음기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몇 년 전 한 사업가가 이른 아침에
미국에 어느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사촌이 그에게 보라고 건네준 라브리 가족 편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어디에 어떻게 사용될지를 전혀 알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녹음기를 보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편지에 썼습니다.
설교 테이프 몇 개를 같이 보내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합니다.

그 녹음기가 도착했을 때 프랜은 매우 독단적인 말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앞에 마이크를 세우지 않겠다,
그러면 자연스러움은 다 사라지고, 질문도 계속 나오지 않을 것이다,
강의 현장의 실재성을 망치게 될 것이라며 거부한 것입니다.
"상자에 그냥 내버려 둬요. 열어 볼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그 녹음기는 6개월 동안
커다란 종이 상자에 든 채로 사무실에 그냥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존 보이스(라브리 초기의 간사였으며,
지금은 남아공화국의 선교사입니다)가
스미스 대학에서 온 여학생들이 매우 빠르게
연이어서 던지는 질문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대단한데, 게다가 논리적인 전개도 아주 좋고,
저걸 녹음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토요일 밤에 내가 설거지를 마치고
주일 만찬을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존이 부엌에 머리를 들이밀고 말했습니다.
"토론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차를 좀 대접해 주시겠어요?
제게 생각이 있는데, 그게 성공하려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좀 필요해서요."

나는 컵과 컵 받침, 우유, 설탕, 차가 담긴 뜨거운 포트
그리고 새로 튀긴 팝콘 한 그릇이 놓인 쟁반을 준비했습니다.
차를 대접하다 보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 때문에 여학생들은 잠시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수다를 떨었고,
존은 그 사이에 책꽂이에서
구리선을 타고 자라고 있는 식물들 사이에 마이크를 숨겼습니다.
토론과 질문과 대답들이 다 끝났을 때는
모든 것이 다 녹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존은 그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고,
여학생들은 자신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 번 더 들으면서 아주 흡족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정말 잘 됐어요.
쉐퍼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그리고 제 친구 한 명도 이것을 꼭 들었으면 했거든요.
이거 하나 살 수 있을까요?"
다른 여학생들도 다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만들어진 테이프는 곧바로 사용되었습니다.

파렐 하우스는 아침마다 4시간 동안 개인 공부를 하거나,
그 시간에 준비한 소논문을 읽거나, 그런 논문을 가지고 토론하거나,
상임 튜터인 프랜과 개인적인 토론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첫해가 지나고 두 번째 해가 되자
프랜은 자신이 '파렐 하우스 오찬'이라고 이름 붙인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용히 점심을 대접하고,
프랜은 세 코스의 식사가 나가는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그 강의의 첫 번째 시리즈 이름은 '신신학의 지적 기후'였습니다.
강의 시리즈가 시작되고 난 후에 새로 올 학생들이 몇 명 있었는데,
중간에 끼어 들게 된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처음부터 강의를 다시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식당에 있는 난방기 위에다 녹음기를 놓고
마이크를 쉐퍼 박사님의 자리 가까이에다가 고정시키도록 합시다.
바로 저기 박사님 칼이 놓인 자리 위쪽에 놓으면 되겠네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강의 테이프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학생들은 포크 소리와 컵에 부딪히는 스푼소리가 배경에 깔려 있는
그 테이프를 듣고 있습니다.

영국으로의 여행이 계속되고 프랜이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세인트 엔드류스, 글라스고우 등에 있는
학생들의 개인 방에서 토론을 하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녹음기를 가지고 와서
이러한 토론들도 많이 보존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토론들도 있습니다.
20명의 무신론자들이 질문을 퍼부었던
케임브리지에서의 저녁 모임 경우처럼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테이프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테이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졌고,
위에모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토요일 밤에 토론을 녹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주일 설교와 로잔에 있는 해로와 앤의 아파트에서 모이는
성경 공부 모임의 교리 강의도 녹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파렐 하우스가 커지면서 두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파렐 하우스 오찬 대신에,
학생들이 먹는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필기를 할 수 있도록
저녁에 강의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강의들은 전부 테이프로 보존이 되었고,
리챠드 더커가 시작한 테이프 도서관으로 발전했습니다.
현재는 850시간이 넘는 분량의 테이프가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제 파렐 하우스 학생들은,
상임 튜터인 프랜이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해 주는 조언에 따라
자신들이 듣고 싶은 주제를 선택해서 테이프로 과정을 밟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위해 계속 기도하면서
우리는 녹음기를 수리할 수 있도록
기술자를 보내 달라는 기도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끊이지 않는 문제로 녹음기를 보수하기 위해서 보내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주 긴 장을 이룰 것입니다.

테이프들은 또한 복사되어서
다른 곳에서 강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처음에는 1년 동안 라브리 간사로 일했던 제레미 잭슨이 테이프를 복사했습니다.
그리고 존 산드라가 라브리에서 일하게 되자
그는 우리 일의 큰 부분 두 가지를 맡았습니다.
하나는 라브리의 회계이고,
또 하나는 테이프를 복사하고 포장해서 세계 곳곳으로 보내는 일입니다.
그는 '테이프 리스트'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주제를 보고 관심 있는 강의들을 주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광고도 없이, 라브리의 '테이프 사역'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으로 그리고 또 그룹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테이프를 '듣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만, 일본, 인도, 남아공화국, 프랑스, 남미, 스위스,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독일, 네덜란드
그리고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일리노이, 펠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 등
미국의 여러 주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역의 범위에 대해서 우리는 정말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라브리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서 테이프를 들었는데요...."

우리들 자신은 그러한 테이프 듣기 모임에 대해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노력했던들 이러한 일을 계획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사업가 빌 와이저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만큼의 충분한 수입원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일에 바치기를 원한다며
자기 집을 테이프 센터로 만들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는 테이프를 저장해 놓고 버지니아에 있는 자기 집에
대여소를 만들어서 그것을 포장해서 보내고,
되돌아오는 끊긴 테이프는 손을 봐서 다시 보내는
지루한 일을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일도 아니고,
회사 직원 전체를 부리던 사람이 그다지 매력을 느낄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인의 사촌이었는데,
그가 프랜의 설교를 처음으로 들은 것은 제인 아버지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 모든 것이 진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여름 한 철을 보내기 위해서 라브리를 직접 찾아왔을 때는
이미 기독교인이 된 지 몇 년 후였고,
그는 부르도네뜨를 임대해서 가족과 함께 우리 공동체에서 살았습니다.

이 테이프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냐고요?
어떤 대답들을 주고 있냐고요?
어떻게 라브리가 '지성인들에게 선교하는 곳'
(이 명칭은 우리가 붙인 것이 아니라,
'타임지'의 한 기사에서 우리에게 붙여 준 것입니다)으로
알려지게 되었냐고요?

몇몇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현재 영국과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고,
앞으로도 다른 언어로도 번역될 예정인 두 권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성에서의 도피>와 <거기 계신 하나님> 두 권 모두
강의한 내용이 각각 영국과 미국에서 녹음되고, 타이프로 쳐져서,
책으로 다듬도록 프랜의 손에 주어진 결과로 쓰여진 책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시건 그건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에
우리의 삶을 의탁하며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당신 계획의 새로운 부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도가 맡은 일은 파렐 하우스의 주니어 튜터도 하면서 출판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강의들도 준비되고 있고, 다른 책과 소책자도 준비중에 있습니다.
로크마커 교수만 미술과 재즈에 대해서(교수님은 이 분야에 전문가이십니다)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라브리 멤버들과 간사들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출판 영역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르지만,
책과 소책자들이 이미 출판되었으며,
간사들만이 아니라 젊고 창조적인 시인, 작가 그리고 예술가들도
20세기를 사는 세대에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라브리의 젊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진리로서 전달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브리에 있는 한 배우는 현재 텔레비젼 프로그램 제작을 계획하고 있으며,
조경 설계사, 조각가, 사진가, 교육자들도 여러 아이디어들로 흥분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성의 결과물이
마치 댐이 무너진 것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가능성들이 있는지는 추측만 할 따름입니다.

이런 젊은이들 가운데는 감정주의에 기초한 믿음의 비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피상적으로 다뤄지는 질문들에 대한
논리적인 대답에서 갖는 확신을 기초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어진 역사의 순간에 선택을 함으로써 거기 계신 하나님께 굴복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매개로
이 우주의 진리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불타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반 경비라는 것도 있고,
미국에 비서가 딸린 '본부'랑 보수를 받고 일하는 회계 등이 있지 않으세요?
그런 영역에서는 일반적인 경로로 일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놀라운 것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으로서 일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혼자서 그 일을 다 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셔서
칼과 알리다 우드슨이 헌금을 받고 전달하는 일과
소식지를 보내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칼은 악기를 가르치며 디트로이트 고등학교의 오케스트라를 맡고 있고,
알리다는 4명의 어린 자녀의 어머니입니다.
이들은 주말과 저녁 시간을 라브리 일을 하는 데 바칩니다.
그들은 위에모에서 일할 때만큼이나
자신들이 라브리에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점을 아쉬워 하지만 말입니다.

위에모에 있는 공동체에는 이번 가을에 또 한 분야가 추가됩니다.
이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면
역시 한 장 분량의 이야기를 한 문단으로 줄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러 번 드렸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학 입학 준비 수준의 학교를 위해서 기도해 왔습니다.
라브리가 토론 시간에 하는 것과 비슷한 틀 안에서
학문을 통합하고 다양한 과목들 간의 관계를 보여 주고,
철학과 역사 그리고 미술과 음악을 연결시켜서
다양한 학문 분야와 기독교의 관계를 가르치는 학교 말입니다.
그러한 학교가 반드시 라브리 안에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학교가 세워지게 해 달라는 기도는 계속 해 왔습니다.

킬 대학의 영문학 전공자인 피터 패로우는
스위스의 국제 학교에서 가르쳤고 한동안의 또 다른 학교에서 교장으로 있었는데,
그 역시 스위스에 있는 영어권 학교들을 위해서
국제 학사 학위를 준비할 수 있는 학교가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어떻게 갑자기 올리앙에 있는 3,500 제곱미터의 땅이 딸린 사각형의 하얀 집
(언덕 아래로 15분만 걸어가면 됩니다)이 매매도 가능한 임대로 나왔는지,
또 어떻게 그 집주인이 그것을 호텔로 운영하던 1930년대에
아버지의 사촌 마리온이 그곳에 묵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등은 길고도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짜여져 오던 또 하나의 환상적인
태피스트리 패턴이라고만 말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얀 집은 이번 가을에 에꼴 뒤 몽드가 될 예정이며,
조직상으로는 라브리와 별개의 단체이지만 우리 공동체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라브리 사람들이 파렐 하우스 학생들과 손님들에게 하는 것과
같은 세미나로 학생들을 지도할 것이며,
12살에서부터 18살까지의 어린 학생들은 이 공동체의 일부가 되게 됩니다.
이곳이 그들의 성장 배경의 일부가 될 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한 가지 변화에서 또 다른 변화로,
한 가지 큰 기도의 응답에서 또 다른 기도의 응답으로,
한 가지 놀라운 발전에서 또 다른 발전으로
이렇게 옮겨가며 말씀드리다 보면
혹시라도 잘못된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장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 시간들은 결코 흥분되는 '성공'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질병도 있었고, 사고도 있었고,
우울하고, 낙담되고, 짜증나고, 지칠 때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도 계속해서 있었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많았습니다.
"이건 너무 심하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로
말하고픈 유혹이 계속 있었습니다.
우리로 이 일을 그만두게 하고, 포기하게 하려는
사탄의 직접적인 공격도 있었습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읽고 싶으시다면,
히브리서 11장부터 12장의 4절까지 읽어 보세요.
거리에 묘사된 것은 쉬운 삶도 아니고 '최상의 시기'가 연속되는 삶도 아닙니다.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많은 것들을 겪게 된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편안한 삶과는 거리가 멀지요.

하지만 우리를 견디게 하고 이기게 한 것은 실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과 역사 속에서, 그리고 한 개인 역사의 순간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견디기 위해서 지탱하는 모호한 심리적인 버팀목 대신에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을 마치기 전에 하나님께서 지난 13년 동안
당신의 방식으로 일을 발전시키신 것과 동시에
한 사람을 발전시키시고 훈련시키신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남편이 어디서 이런 것을 다 배우셨어요?"
"어느 대학에서 공부했기에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지요?"
"이런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분이 읽은 책을 어디에서 살 수 있나요?"
"남편께서 새로운 변증을 가르치고 계신데요,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그것이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얼마나 많이 바꾸고 있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그런 것을 배우셨지요?"

그 모든 질문에 "하나님께서 제 남편에게 주셨어요"라고
말하면 너무 간략한 설명이 되겠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온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구하러 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주 절제된 표현이지요!).
나는 이번 경우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필요 때문에 보내 주시기도 하셨지만,
또한 살아 있는 대화의 장을 통해서
지금 프랜이 자신의 변증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훈련시키는 장으로, 그리고 발전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보내셨다고 확신합니다.

프랜은 실제 삶과 격리된 상아탑 속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사람들의 사고와 씨름과는 분리된 이론을 발전시키는 대신에,
지금까지 13년동안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직접 대화를 했습니다.
프랜은 실존주의자, 논리적 실증주의자, 힌두교인, 불교인, 자유주의 개신교도,
자유주의 로마 가톨릭교도, 개혁주의 유태인들과 무신론적 유태인, 모슬램,
신비 종교에 빠진 사람 그리고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류의 무신론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탁월한 교수, 탁월한 학생 그리고 탁월한 자퇴 학생들(!)과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비트족, 히피, 마약 중독자, 동성연애자 그리고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프리카인,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남아공화국인,
호주와 뉴질랜드와 유럽 각지에서 온 사람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정치적 색깔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의사, 변호사, 과학자, 예술가, 작가, 기술자, 다양한 학문과 연구원, 철학자,
사업가, 언론인 그리고 배우를 비롯한 유명인사와 농부들과도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구세대와 신세대 모두와 대화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프랜에게
많은 사람들이 받기 어려운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프랜이 주는 대답들은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물론 프랜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많은 책들을 읽습니다)
살아 있는 대화의 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랜은 참된 질문에 대해
세심하게 정리된 대답, 참된 대답을 합니다.
프랜은 종종 내게 와서
"그게 정말로 대답이야, 이디스. 딱 맞아, 정말 딱 맞아요.
그것이 정말로 진리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과 딱 맞는 거예요" 하고 말하며 스스로 흥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13년 동안 당신의 일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교육시키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내 말이 끝났나고요?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 말씀드리려면 아직도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여섯 명의 가족, 그 중에서 두 자녀가 아픈 가족이
자그마한 산간 마을에 거실조차 없는 낡은 샬레로 이사를 오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를 할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들은 '은둔'하는 것이고,
다시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자, 사람들이 오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50명의 사람들로 방은 가득 차게 됩니다.
문을 떼니 60명까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배당은 이제 한번에 150명 이상 모일 수 있고,
발코니와 계단에서까지 사람들이 앉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실제적인 방식으로 벽을 밀어내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벽을 밀어내신' 또 하나의 방법은
이탈리아와 영국과 네덜란드 여행과,
지난 3년 동안의 미국 여행을 통해서였습니다.
강의 요청을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경우 보스턴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시카고에서 테네시까지, 세인트 루이스에서 시애틀까지 다녔습니다.
대학과 신학교,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도 있었습니다.
하버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웨슬리, 스탠포드, 버클리,
휘튼, 웨스트 몬트, 커버넌트 등 다양한 장소와 모임에서
스위스에서 있었던 그 벽난로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월 눈보라가 심하게 이는 무척 추웠던 어느 날 밤,
사흘동안 시카고 강당에서 열린 어떤 모임에서
프랜이 파이크 주교와의 대화에 참석했습니다.
2,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 참석했고,
프랜에게 토론을 하고 질문에 대답을 해 달라고 요청한
두 개의 텔레비젼 프로그램과 세 개의 라디오 프로그램 덕분에
멜레즈 거실의 벽은 완전히 주저앉았고
그 사흘 동안 300만 명의 사람들이 그 대화를 들으러 잠시 들어왔었습니다.

오랜 전에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하면서
이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신 3:24)

그리고 또 한 사람의 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