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자들과 성경해석
Charismatism and Hermeneutics
은사주의에 관한 좋은 책들이 많이 있으나, 성경해석방법의 비평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거의 드물다. 은사주의자들의 해석의 비평은 기초부터 행해 져야 한다. 이유는 만약 우리가 은사주의자들의 성경해석방법이 오류가 있음을 증명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교리와 실행에 대항하여 우리의 입장을 만들 수 있다. 건물을 약한 기반으로 짓는 것은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돼는 것이다(참 마태 7:24-27). 은사주의운동이 바위 위에 세워졌는가 모래 위에 세워졌는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왜 성경해석이 중요한가? Why is Bible Interpretation Import!ant?
은사주의자들이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는 가를 고찰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은사주의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가 성경과 교리와 실행에 관해서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행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서 기초한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얼마나 우리가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는가? 어떤 실행을 바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잘못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은사주의자들은 결국 의로울 수 있는가? 혹은 우리가 현대의 은사주의 가르침과 실천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옳은가? 이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고 공부하는 가에 따라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부터 성경이 무엇에 관한 것이며 어떻게 공부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 The Nature of the Word of God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다루어보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 3:16).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읽은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였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호흡이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실행에 유일한 권위이다. 우리의 교리들과 실천들은 인간의 의견들, 전통들, 혹은 체험들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교리와 실행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어 져야 하고 주관되어져야 한다. 의견들, 전통들, 체험들은 하나님 말씀의 미미한 외부적인 권위를 갖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권위가 있고 그 권위는 인간의 의견, 전통, 체험들과는 별개이다.
모든 성경학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에서 에스라는 읽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의미나 뜻을 일러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도록 하였다(느 8:8). 신약에서, 우리는 바울사도가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권면하는 모습을 본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성경은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갖는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무엇이 진실한 의미인가를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해석의 원리 (Principles of Bible Interpretation)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은사주의를 다룰 때 특별히 필수 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였을 때 단지 “그래요, 그것이 당신의 해석입니까?”라는 말을 듣기를 몇 번이나 하였는가? 이는 특별히 어떤 사람의 해석이 다른 사람에게 안 받아들여질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하는가? 성경해석의 원칙은 무엇인가?
믿음의 유추 (The Analogy of Fai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해석의 성경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성경해석의 정확무오한 법칙은 성경자체이다. 그러므로 의미가 여럿이 아니고 단 하나인 어떤 성구의 참되고 온전한 뜻에 관해서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보다 명백하게 말하는 다른 곳들에 의해 그 뜻을 찾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I. 9). 성경해석에 성경을 사용하는 접근방법은 믿음의 유추 혹은 성경의 유추로 알려져 있다. 성경만큼 정확무오한 다른 책이 없다. 그러한 성경은 정확무오한 권위와 주석을 갖는다. 또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의미만이 있음을 기술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진실하고 충실한 성경의 의미는...여러 개가 아니고 오직 하나이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
성경은 그 자신이 해석한다. 예를 들면, 다니엘 2:31-45을 보자. 31-35절에서 우리는 느브갓네살의 환상을 가지고 36-45에서 다니엘의 환상의 해석을 갖는다. 하나님은 환상과 그 의미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 환상의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의문이 없고,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를 창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예는 이사야 7:14절이다. 메시야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놀라운 예언을 갖는다. 그는 누구인가? 언제 완성되었는가? 마태 1:22-23은 선명하게 우리에게 이 예언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헤롯대왕 시대에 성취되었음을 말해준다.
문맥안에서 성경을 해석한다 (Interpreting Scrpture in Context)
성경해석에 있어서 문맥은 중요하다. 문맥이란 무엇인가? 문맥은 문제가 있는 본문을 선도하고 따르는 본문의 부분이다. 많은 거짓 선생들은 그들의 교리가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밀하개 살펴보면, 많은 이들의 증거본문이 실제로는 문맥 밖에서 뽑아 온 것임을 발견하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가 성경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는 시편 14:1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가 문맥 안에서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심중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우리가 누구의 것을 인용할 때, 문맥 안에서 인용하기를 원한다. 아무도 문맥 밖에서 택해지기를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원치 않으신다.
성경은 성경에 모순되지 않는다 (Scripture Does Not Contradict Scripture)
성경해석에서, 성경이 성경과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성경의 어떤 구절의 해석이 명백하게 다른 구절에서 가르쳐진 것과 어긋난다면,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 요 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하셨다. 만약 이것을 예수님을 성부하나님보다 작은 신이라고 해석한다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다른 문장들과 어긋나게 된다(참조, 요 1:1, 8:58, 10:30). 나아가,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로 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의 절대성을 말하는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있다(예: 행 20;28, 빌 2:5-11, 골 2:9). 성경의 다른 많은 부분과 어긋나게 나타나는 하나의 본문은 주류에 비추어 해석을 해야한다. 이 경우에, 주류가 주도한다. 감추어진 본문은 반드시 선명함의 빛에 비추어 읽어야한다.
신학이 해석을 인도한다( Theology Guides Interpretation)
우리는 우리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신학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모체는 정경66권안에서 단 한번에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초되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기독교의 신학을 잘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는 조직신학에서 신론, 성경적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제목하에 가르쳐진 교리를 잘 알아야한다. 신학은 우리의 성경해석에 있어 밖으로 나가거나 방황하는 것을 막는 울타리 역활을 한다. 예를 들어, “[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읽는다. 만약에 내가 이 구절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구원받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은혜로서 행위로서가 아니라는 불명확한 용어로서 말하지 않는 성경의 모든 방향에 거슬러 가고 있는 것이다.(롬 1:17, 5:1, 엡 2:8-9, 딛 3:5).
은사주의의 성경 비틀기( Charismatic Twisting of Scripture)
성경을 해석할 때 사도들이 그들의 말씀선포와 성경기록(살전 2;13, 벧후 1;20-21, 딤후 3:16)과 그들의 교회 행정(행 5:1-11, 19:13-17, 고후 13:2-3, 갈 1:8 유다서 17)에 있어서 무오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제대로 아는 데에 실패하면 성경해석자는 사도들이 그들의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사역의 분야에서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표적과 기사가 복음전도에 절대 필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를 원하는 은사주의자는 바울이 아덴에서 그가 단순히 기적 행함이 없이 복음만을 선포하였으므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그의 방법을 바꾸어 표적과 기사가 고린도에서 그가 있었을 때에 나타난 것은 성공을 가져왔다는 결론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증명을 위한 본문에서 바울은 “[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말한다. 오늘날 Wimber-style의 능력전도는 종종 이 본문을 그들의 전도방법을 지지하기 위하여 인용된다. 이 견해에 의한 바울과 고전 2:4은 사도들은 그들의 복음전파사역에 있어서 무오하므로 잘못된 것이다. 나아가, 바울이 아덴에서 만든 잘못은 아무런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행 17-18장에 비추어, 이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두 장소로 간 방법에는 전혀 차이가 없음이 명백하다. 누가는 행 18장에서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강론하고 권면하고(4절) 증거하였다(5절) 고전 1:17-18에서, 바울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표적과 기사가 아니라고 명확하게 기술하였다(롬 1:16절을 보라). 이는 정확하게 바울이 아덴에서 그전에 한말이다. 전도방법에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은사주의자들과 체험 (Charismatism and Experience)
은사주의자들의 성경해석에 있어 기본적인 오류는 체험을 성경위에다 믿음과 실행을 위한 근본적인 기반으로 옹호하는 것이다. 그들의 체험을 성경에 비추어 읽는 것이 아니라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그들의 체험에 복속시킨다. 이는 은사주의자들이 그들의 믿음과 실행의 기반으로 성경이 아닌 성경외적인 자료, 다시 말하면, 그들의 체험을 기반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들의 체험은 그들은 성경진리로부터 흐릿하게 한다. (명백한 예가 Rev Alfred Yeo's article, “Me, slain but God,” in Evangel [Apr-Jun ‘95]: 13-14, 에서 성령의 침은 단지 그의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귀절에서 행 1:13의 잘못된 인용외에는 인용된 것이 없다.)
전형적인 은사주의의 주장은 우리의 믿음과 실행의 모든 기반은 오직 성경만에 의한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나에게 말해 줄 필요가 없다, 나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며 당신은 나에게 나의 영적체험에 대해 만일 당신자신이 이전에 결코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것이 타당한 논쟁인가? 실제로 위의 논쟁은 아주 비성경적이고 상반적이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우리에게 알려줄 성경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은 베레아 그리스도인들에게 날마다 성경을 바울이 말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탐구하라고 명령하였다(행17:11). 이 성경연구의 필수적인 필요는 오늘날에는 더욱 중대하다. 바울은 경고하기를, “[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였다. 우리 자신을 거짓선생들에 의하여 기만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을 알라고 교훈하였다. “[ 딤후 3:16-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 for reproof , for correction ,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 th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
나는 성령을 소유하므로 성경이 필요없다고 말한 것이 옳게 말한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독립적으로 사역하시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검이라고 불리운다(요 15:26).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도 불리운다(요 15:26).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리는 체험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은 “[ 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다.
은사주의 해석의 문제점은 성경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기반을 둔 것이다. 실제로 쓰이는 원리는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진리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것이 내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진리이다,” “나는 틀리없이 옳은 것은 내가 그것에 관하여 좋게 느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죄 된 쾌락에 빠지는 것은 우리를 즐겁게 느낄수 있게 해 줄지는 몰라도 그것이 확실하게 의롭게 만들지는 않는다.
체험은 우리의 믿음과 실행의 근본 기반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에 대하여, 체험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기독교 종교가 체험의 종교인 것을 믿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순례안에서 기쁜 체험 그리고 슬픈 체험 모두의 사건들이 충분히 들어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눅 10:27)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릴 때 즐겨드리라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9:7). 우리는 우는 자들과 더불어 울라고 성경은 말한다(롬 12:15). 체험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부분이나, 그들은 성경진리를 세우는 기반이 아니다. 체험은 성경에 반드시 복속하여야 하지 그 반대가 아니다.
성경해석의 우리의 원칙을 수립하였으므로, 이제는 은사주의에 관한 많은 질문들을 고려해 보자.
[스크랩] 성령의 명칭 (0) | 2009.12.18 |
---|---|
[스크랩] 속사도시대 (100-313년) (0) | 2009.12.18 |
[스크랩] 목회신학 / 실천신학 개론 (0) | 2009.12.18 |
[스크랩] 인물 성경공부 35인 (0) | 2009.12.18 |
[스크랩] 각종 논문 모음 (0) | 2009.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