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부(富)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

보배 항아리

by Bliss Yeo 2011. 3. 31. 09:41

본문

//

부(富)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


-교부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송광택
들어가는 말

브라질의 주교 돔 헬더 까마라(Helder Camara)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아이였을 때는 부(富)의 위험성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너무 과장하여 강조하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늘에야 나는 조금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부자로서 인간의 정을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이란 것은 사람의 눈에 자를 달아놓을 수 있으며 인간의 손과 눈과 입술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로날드 J. 사이더는 말하기를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무슨 행동을 하건 간에 가난한 이들을 못본체 하는 부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마태복음 25장과 요한1서 3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불복종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배금사상 또는 물신주의(物神主義)의 팽배는 오늘의 현실이요, 현대의 황금만능주의는 교회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세력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겉으로는 물질주의를 배격하고 비판하지만, "뒷문으로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청지기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성경적 물질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이 논의가 단순한 작업은 아니다. <소유와 분배>의 저자 룩 존슨(Luke T. Johnson)가 말한 바와 같이, "재물과 재물의 사용에 관한 사고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점을 찾는다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본 소고에서는 초기 기독교에서 부(재화)와 분배 정의에 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쳤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부(富)에 관한 초대교회의 관점을 이해하고자 한다.





1. 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복음서에는 인간과 이 세상 재물과의 관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예가 많이 있다. 즉 예수님은 물질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하여 많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돈과 그 문제점에 대해 모든 말씀의 1/5을 할당하셨다. 예수님의 비유 38개 가운데 16개가 재물에 관한 비유이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와 믿음에 관한 구절은 약 500구절이지만, 돈과 소유에 대해서 다루는 본문은 약 2,000구절에 이른다. 쉐일러 매튜스(Shailer Matthews)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으나 경제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경제문제에 대해 다른 어느 사회 문제보다도 많은 말씀을 하셨다.
Martin Hengel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은 현실적 상황에서 재산의 소유를 당연시하였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르는 부유한 여인들에 의해 섬김을 받았다(눅 8:2이하; 10:38이하 참고)" 탕자에 대한 비유는 재산 소유(사유재산)를 전제로 삼고 있다. 예수님은 원칙적으로 당시의 사유재산제와 소유 증대의 경제질서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직 재물이 잘못 쓰이는 것과 싸우셨다.
그러나 '황금'이 하나님과 대립되는 경우가 있다고 가르치셨다(마 6:24).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물질주의에 대해 선전포고를 내리셨다. 재물을 아람어로 '맘몬'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맘몬이 적대되는 신이라고 선고했다. 즉 예수님은 '맘몬'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한 대조적 존재'로, 선택의 대상으로, 그리고 '양립할 수 없는 두 주인'으로 설정하셨다. 한마디로 '맘몬'은 하나의 경쟁 신(a rival god)으로 묘사되었다. 엘룰(J. Ellul)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의 수사학적 어법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도 예수님께서 재물의 영적 위험을 크게 강조하셨다면, 지극히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2.  초기 기독교(또는 교부시대)의 가르침



초기 기독교의 신자들에게는 곤궁한 사람을 도우려는 자발적 열성이 있었다. 이러한 실천의 배경에는 물질과 재화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친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교부들의 가르침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① 기독교에 의한 이교세계의 가치관의 변혁
② 인간의 탐심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
③ 물질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물질과 부의 목표이신 하나님
④ 자기자신을 불쌍한 이들과 동일시하신 예수 그리스도
⑤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과 나눔



1) 이교세계의 가치관을 버리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취하라.

<디다케>의 편집자는 사람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가운데 한 길을 택해야만 한다고 했다. 생명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재물이 있는 자는 곤궁한 자에게 기꺼이 거저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청하는 모든 이에게 주고서 되돌려달라고 하지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각자의 선물들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Didache I. 1.5)
"궁핍한 자를 외면하지 말며, 너희 형제들과 재물을 함께 소유하며, 자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말라. 불멸하는 것들도 나누어 누리는 사이라면 없질 것들은 더 그래야 할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이 <디다케>는 지상의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재물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동으로 쓰라고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유 중심의 이교 세계관에 반(反)해서 신자들은 재화를 나누는 것을 덕으로 여기도록 가르친다.

한편 2세기의 헤르마스의 <목자>(Shpherd)에는 교부사상의 골자를 이루는 문제들이 나와 있다. 헤르마스는 기독교를 일종의 거대한 건축사업으로 비유했다. 새 신도들은 높다란 탑을 세우는 데 쓰이는 돌들이다. 그런데 부자들은 "희고 둥근 돌"이다(Visions 3.6.5). 그런 돌들을 건축에 쓰자면 제 크기와 모양으로 다듬어야 한다. 부자들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부에 대한 애착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부에 대한 애착을 끊었다는 증거는 누구나 돕겠다는 마음 자세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선행을 열거하면서 헤르마스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과부를 돕고 고아와 빈민을 찾아 보라. 따뜻이 길손을 맞으며, 구박받는 채무자들을 곤란할 때 도와 주라!(Mandates 8.10)
헤르마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영주(永住)하는 사람이 아니요 이방의 나그네다. 따라서 이주민이 하듯이 어디에 안주하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재산 자체에 재미를 붙이고 긁어모으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헤르마스의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답을 사지 말고 곤경에 처한 영혼들을 사시오...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재산과 가옥을 이런 전답과 가옥에다 사용하시오."
헤르마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신 이유는 하나뿐이다. 즉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의 신자들이 내세를 지향하는 자세를 배움으로써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 없는 사람을 돕기 위해 재물을 쓰는 일에 부심했음을 알 수 있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재물은 일시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재물을 줄게 하실 것이다. 헤르마스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부를 획득하는 사업이다. 부자는 그들이 가진 부나 그들의 사업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한다. 이상적인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부를 기반으로 한 사치나 필요 이상의 먹고 마시는 일을 중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에 손을 대거나 그것을 탐내서는 안된다. 그는 탐욕에 대해서 혹독한 단죄를 하였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필자는, 하나님은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라도 하나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행복은 이웃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형제들 보다 많이 갖고 싶은 욕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을 소유하거나 자기 아랫사람들을 꺽어누르는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해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웃의 짐을 져 준다면, 자기의 풍족한 것으로 곤궁한 사람을 도울 심정이 있다면,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자기 혜택을 받는 이들에게 신(神)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입니다."(The Epistles to Diognetus 10.2)

이상과 같은 교훈은 이교세계의 가치관과 행복관을 배격하고, 성경적인 물질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적 가치관으로 이교세계의 가치관을 거부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3세기 초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러한 가치관의 변혁을 온건하게 논술하여 지성인과 교양인 및 부유층도 기꺼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 청중을 분석하고서, 부의 문제를 매우 자연스럽게 논했다.  기독교윤리의 근본을 다룬 <교사>(The Teacher, <Paedagogus>)라는 저서에서 그는 인간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 부(富) 자체보다는 부에 대한 욕심이라고 하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클레멘트는 <교사> 2권과 3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상류 사회의 절제 없는 사치를 냉혹하게 그리고 예리하게 공격하였다.
"사나이들이 은요강이나 멋있는 설화 석고(雪花石膏) 변기를 내놓으며 으스대고 돈 많은 여자들이 금으로 만든 요강을 보여주며 주착을 부리다니 도대체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노릇이다. 부자들이란 어마어마한 짓이 아니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족속들인가 보다!"(Paedagogus, 2.3)
또한 클레멘트는 인간의 가치가 그의 소유나 부(富)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선 여성들에게서 겉치레를 치우고 주인들에게서 노예를 떼어놓고서 보라. 주인이라는 사람도 자기가 사들인 노예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다. 행동거지나 외모나 음성이 전혀 다른 데가 없다...  노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은 더 유약하고, 양육 과정 때문에 질병에 걸리기가 더 쉽다는 점뿐이다."(Paedagogus, 3.6) 그래서 클레멘트는 부자들에게 교만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교사> 2권의 끝에서 그는 금과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상류층 여인들의 욕망을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2백명 가량의 그리스도인 부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주장하였다:
"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용하면 안되나요? 나는 그것을 내 옆에 가지고 있는데, 왜 나는 그것을 즐기면 안되나요? 누구를 위해 이것들이 만들어졌나요?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클레멘트에 의하면, 이렇게 말하는 여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는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인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제공하신다. 그리고 필요치 않은 것은 땅 속이나 물 속에 감추신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궁핍에 처해있는데도, 사치스럽게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Paedagogus 2.119.2-120.5).
클레멘트의 서신을 보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일할 수 있으면 모두 일했으며, 기술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술을 가르쳐주어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조합을 통해 돌보았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말하기를 "모두가 이웃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한편 <부자의 구원>(The Rich Man's Salvation)에서 클레멘트는 재물의 적극적인 측면을 언급하였다. 즉, 재물이 올바르게 이해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도구(an instrument given by God)의 기능을 다할 것이다(14.1 이하). 재물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형제를 위해 사용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16.3).
Martin Hengel은 말하기를, "클레멘트가 철저한 금욕주의와 부 사이의 명쾌하고도 정당한, 그리고 '자유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관심을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결책이 부분적으로 복음서의 가르침을 곡해하기 때문에, 그 해결책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했다.
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쓰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소용되는 만큼 써도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가난 그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분으로 남는 것은 곤궁한 사람과 나눠 가져야 한다. 이런 원칙을 무시하면 인산 심성이 저속해진다. 하나님은 같이 나누고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인류를 지으셨다. 한 사람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이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부(富)는 교제와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4세기의 설교자들도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를 역설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톰 감독(c.347-407)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자기 몸을 해치는 일이라고 했다: "가난한 이들이 말없이, 한숨지으며, 눈물 흘리며 물러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에 칼을 꼽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둘 중에 상처를 더 크게 입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임을 알고 있습니까?"(On Matthew: Homily 35, 5)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도 이기심과 탐욕을 자기부정과 사랑(caritas)으로 바꾸라고 호소하였다. "비정한 탐욕을 뿌리 뽑고 사랑을 심으십시오. 비겁한 탐욕이 만악의 근원이듯이 사랑은 만선(萬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Sermon 72. 4)
그는 이기적 쾌락주의를 배척하였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실천적 사랑을 설교하였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금식하고 기도하자'고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금식하여 남긴 몫으로 가난한 이들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한다면 마땅히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더 주어야 마땅합니다."(Sermon 100. 7)



2) 삼가 탐심을 물리쳐라.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탐욕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탐욕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었고, 인간의 연대성과 공동체성을 부인하는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다케>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 가난한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들,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고통받지 않는 자들, 부자의 옹호자들, 빈자들을 불법으로 판단하는 자들을 꾸짖었다.(Didache 1.5.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재산축적에 몰두해 있는 사람을 타인을 망각한 비정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자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부요하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리고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재물에 대한 애착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재물의 상실을 '기꺼이' 견뎌내는 사람이라면, 그는 재물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낯설고 잠시뿐인 세상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성자는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으시고 사랑의 새 계약을 남기고 가셨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때에 인색해질 수가 없으며, 우리와는 낯설고 잠시뿐인 세상 소유물에 애착할 수가 없는 것이다."(<부자의 구원>중에서)

3세기 중엽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c. 200-258)은 터툴리안이나 후대의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의 합법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유재산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대부호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들은 임야에 임야를 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농지를 무한정 확장하며, 엄청난 양의 금은과 돈을 계획적으로 만든 보관소나 지하창고에 쌓아 놓습니다. 그들은 강도가 약탈하지 않을까, 살인자가 공격해오지 않을까, 고의로 소송을 걸어 자기들을 애먹이지 않을까, 더 부유한 이웃의 질투가 적대감으로 변하지 않을까 등의 막연한 근심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도록 괴롭습니다. ..  그들에게는 종들에게 베푸는 관대함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교통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주지 않고 오직 나쁘게만 사용하는 그런 물건들을 재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To Donatus 12)

키프리안은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외면한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도 비판하였다:
"여러 해 평화가 계속되는 바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활 방식이 소홀해졌다...  모두가 다 제 재산 늘리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주교(감독)의 신심도 간 데 없고, 성직자의 충실한 모습도 간 곳 없으며, 곤궁한 이들을 돕던 관대한 동정도 사라졌고 우리 행동의 규율도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도 많은 감독이 ...  백성을 버렸으며 다른 구역의 시장으로 싸돌아다니며 이윤이 남을 장사나 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형제들이 굶주리는데 감독들은 돈을 무진장 긁어 모으려했고 협잡으로 토지를 손에 넣고 고리대금으로 이윤을 벌어들였다"(The Lapsed 5-6)
키프리안이 볼 때, 박해 중에 부자들은 '상속재산' 때문에 배교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그들의 배교 이유를 진술하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을 기만한 원흉은 세습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재산이 그들을 사슬로 묶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The Lapsed 10)
키프리안은 말하기를, 소유물을 아끼는 부자들은 -복음서의 나오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의 행적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했다(On Works and Almsgiving 15). 그는 탐욕과 인색을 일종의 예속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갈라디아서 설교에서 부자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지만 실상은 탐욕의 무겁고도 가혹한 멍에를 메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긍휼(자비)의 마음이 신자의 생활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 한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 몸이 아니라고 판단해야 합니다"(On Matthew, Homily 52.5).
크리소스톰은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다소 문자적으로 주석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은 사적인 자선행위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루어놓은 공동 기금에 의존하여 자신들을 포함한 공동체를 지원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문자적-역사적 주석으로부터 도덕적 권고로 나아갔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난 모두 보다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부자보다 가난한 자가 더 행복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3) 하나님은 물질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물질과 부의 목표이시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339-397)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만인이 골고루 먹을 음식을 내도록 만사를 안배하셨고 이 땅이 모두의 공동 소유가 되게 안배하셨다. 그러므로 대자연은 만인에게 공통된 권리를 내셨다. 그러나 탐욕이 그것을 소수의 권리로 만들고 말았다"(Duties of the Clergy 1. 132)

암브로시우스는 빈자와 부자의 문제를 다룬 소책자 <나봇>을 냈다. 그는 구약성경의 고사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나봇의 이야기는 비록 옛날 이야기지만 두고두고 적용할 수 있다...  아합이란 옛적에 태어난 한 사람만은 아니다. 슬프게도 매일같이 아합들이 태어나고 있으며 절대로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가 죽으면 그대신 여럿이 생겨나고 그래서 아직도 수탈하는 자들이 수탈당하는 자들보다 수가 많다. 그리고 나봇도 옛적에 맞아죽은 사람이 아니다. 매일같이 나봇들이 몇씩이나 죽음을 당하고 날마다 불쌍한 사람들이 몇씩이나 피살을 당한다"(Naboth 1).
이 소책자는 단순히 부자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인간을 겨냥한 것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나봇의 이야기를 빌려, 부자들이 어디까지나 관리인(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교부들의 사상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자선'을 정의하고 있다: "당신들이 그대들의 소유물에서 빈민에게 희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사실 그들의 몫을 되돌려주는 것뿐이다."(Naboth 55)

요한 크리소스톰도 세상의 모든 재화는 만인의 공동소유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나누어 쓰지 않은 재물은 일종의 횡령이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은 선하다. 그리고 세상의 재화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골고루 쓰여야 한다.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은 창조주이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는 기회를 얻은 자들이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자신을 불쌍한 이들과 동일시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었는데, 여기에는 보다 깊은 동기가 있었다. 키프리안은 누미디아 신자들이 야만인들에게 붙잡혀갔을 때 누미디아의 감독들에게 보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형제들이 붙잡혀 간 일은 곧 우리 자신이 붙잡혀 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사로 잡혀간 이들은 곧 하나님의 성전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잡혀간 형제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뵈어야 합니다."(Letters 59)

요한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우리 교회에서는 매일 삼천 명의 배고픈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죄수들에게 옷과 양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병든 사람과 순례자들과 절름발이들과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옷과 양식을 주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의 형제는 어느 교회 건물보다 성스러운 성전"이라고 했다(On Matthew, Homily 50.4).
한편 어거스틴은 가난한 자를 괴롭히는 자들을 엄중하게 힐책했다:
"어리석은 자여, 당신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먹여 살린다면 당신은 그리스도를 먹여 살리는 것이며, 당신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수탈할 때는 바로 그리스도를 수탈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Sermon 128.4).



5) 가진 바를 서로 나누라.

기독교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주후 125년경에 쓴 글에서 신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들은 매우 친절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그들에게는 거짓됨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고아들을 박대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은 갖지 못한 자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줍니다. 객들을 보면 그들을 자기 집에 거하게 하며 마치 그가 자신의 형제인 것처럼 그와 함께 즐깁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죽었다면 자신의 능력껏 장례를 치루어 주었습니다. 또 그들 중의 누군가가 메시야의 이름을 위해서 투옥되거나 압제받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으며 만일 그가 석방될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구출해 내었습니다. 그들 중에 누군가가 가난하고 궁핍한데도 도울 여력이 없으면 그들을 돕기 위한 금식기도회를 2-3일간 했습니다."
주후 250년경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약 1,500명의 궁핍한 형제들을 돌본 적이 있었다. 사실 이들은 재물을 아낌없이 베풀었기 때문에 이그나티우스는 "그들은 사랑 안에 살고 있다"라고 말했고, 고린도교회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그들은 "모든 도시의 많은 교회에 원조를 보낸다"라고 말했다.
기독교 초기의 교회 지도자들은 공동체 안에서의 나눔을 강조하였다. 터툴리안도 <변증서>(Apology)에서 신자들의 나눔에 관하여 상술하고 있다:
"각자가 한 달에 한 번씩 약간의 돈이나 그 밖의 것을 가져온다. 아무도 강요를 받지 않는다. 자발적인 헌금이다. 성의껏 내는 신탁기금이라 할 수 있다. 그 돈은 ... 빈민들을 먹이고 그들이 죽으면 장사를 치르는 데 쓰이며, 재산과 부모가 없는 소년 소녀들을 위해서와 나이든 노예들과 파선한 서원들을 위해서 쓰인다...  이같은 소위 사랑의 행위는 어떤 사람의 눈에는 우리를 알아보는 표가 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저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마음과 혼이 하나가 되며 주저 않고 가진 바를 서로 나눈다. 우리에게는 아내만을 빼놓고는 모든 것이 공동이다"(Apology 39.1.5.-7).
키프리안은 돈 많은 동정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가난한 이들이 여러분이 부유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시오. 곤궁한 사람이 여러분이 부자임을 느끼게 하시오. 여러분의 저택을 하나님께 빌려들이시오. 그리스도께 잡수실 것을 드리시오."(On the Dress of Virgins 11).
키프리안이 남긴 서신을 보면, 그는 빈민들이 과연 적절한 보조를 받고 있는지 매우 세밀하게 확인하려고 했다. 그는 죄수, 과부, 병자들에게 여러 액수의 돈을 지정하여 할당하기도 했다.
한편, 암브로시우스는 교회가 황금을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을 쌓아두기 위함이 아니라 곤궁한 사람들에게 쓰기 위함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성기(聖器)를 부수어 그것을 팔아 포로들의 몸값을 치르는 일도 용납이 된다고 하였다.(Duties of the Clergy 2. 142-143)





나가는 말



Martin Hengel에 의하면 초대교회사로부터 '잘 정의된' <기독교 재산론>을 추출해 낼 수는 없다. 종종 교부들의 가르침은 재산에 대해 급진적으로 비판했고, 이 세상 물질에서 초연할 것(detachment from the goods of this world)을 요구했다. 또한 교부들이 제시하는 기독교윤리는 오늘의 사회에 일반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규범 체계'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재화)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 적지 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① 교회(그리스도인)는 부(재화)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바르게 전하고, 배우고,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부(재화)에 대한 관점의 전환 없이는 바른 신앙을 세우기가 어렵다..
② 교회(그리스도인)는 돈의 횡포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드림(giving)과 나눔(sharing)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의 나눔이 강화되어야 한다. 돈이나 다른 어떤 재물을 내어주는 행동은 그 자체가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행한다. 즉 그것은 탐욕을 파괴시킨다.  
③ 물질의 가치는 영원과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은 돈의 사용을 통해 표현된다.
④ 선교적 관점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는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들에게 접근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⑤ 단순한 생활 양식을 개발해야 한다. 필수품과 사치품을 각자의 신앙적 양심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피차 절제와 검소의 삶을 격려해야 한다.

출처 : 중국. 세계 새물결교회(연구-자료실)
글쓴이 : 주의 머슴 원글보기
메모 :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