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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신앙 신학방

by Bliss Yeo 2014. 4. 2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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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해석

 

A. 정의와 관계된 문제점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읽는 자라면 성경에서 구속사를 회피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만들어진 자체 과정이 이 구속사 사상을 유지하려는 데서 이루어졌기 때 문이다. 이 구속사가 어떻게 정의되든 구속사는 우리가 단순히 믿는 대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모든 신적 행동을 총체하는 개념으로 특히 예 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에 대한 자기 계획을 실현하는 역사적 사실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중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이 핵심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 여러 직분 등 계시 기관을 통해 성령으로 증거 하였으니 후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계시와 사건들에 기초를 두고 믿음과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종말을 향한 직선적 시간 속에 여려 모양 방법으로 다 양성을 갖고 나타난다. 구약의 약속인 신약에서 성초되어졌듯이 동일한 말씀이 미래의 약속과 구속이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구속사에는 통일성과 함게 다양성이 있다. 구속사에 대한 성경을 믿는 자는 반대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성경 해석학의 문제다. 과거 한국 교회가 여러 분파로 갈라서게 된 이유 중 근본적인 것 하나가 바로 성경해석문제였다. 또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성경 해석학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구원사적 성경 해석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신학적 혼란기 역시 성경 해석학의 문제에서 비록된 것이다. 이런 때의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이냐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들어 우리 교회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해석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계에 "구속사"라는 말이 혼돈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자들만 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구속사라는 말을 대단히 즐겨쓰고 있기 때문이다.

 

교의신학자 K.Barth,W.Pannennberg,신약학자 R. Bultmann, O. Cullmann은 물론 구약 학자 von Rad등이 즐겨 쓰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사 학문에서도 구원사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지우는 것이 무엇이며, 정경의 구원론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서 심각히 토론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신교학자 들 뿐만 아니라 로마 카도릭 학자들도(K.Rah-ner)등 구속사를 심각하게 다룬다.

 

그리고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고 엄습하고 있는 현재 여기서의 경험을 계시로 강조하는 신학들도 나름대로 구속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의 사용의 빈번도와 선호와는 반대로 학자마다 구속사의 일관성 있는 분명한 의미를 보여 주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G.Weth가 이미 "구원사는 오늘날 많이 논쟁되는 말이다..... 이 개념은 의미와 취급은 곧 우리 현대 신학의 일반적 동요와 분열의 거울상이 된다.

 

(Die Heilsgeschihte lhruniverse-ller und individueller Sinn in der offenbarungsges chichtlichen Theologie des 19 Jahrhunderts,(Munchen,1931, P.2) 하엿는데 이 말은 오늘날도 구대로 적용될 수 있다. 1959년에 와서는 이 말이 가져다 주는 불분명서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학 사 전에서 "구속사"란 말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는 논문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K.G,Steck 가 쓴 "Die ldee derHeilsgeschichte"(in Theologische Studien, Heft 56 Rollikon, 1959)였다. Steck는 이 논문에서 J.C.H.K.V.Hofmann, A.Schlatter, O.Cullmann의 구원사 신학 개념을 개관하고서는 구원사의 말을 선호하려 하는 동기들에 대해 가치 있는 관찰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고로 구원사적 -요소들은 기독교 진리를 순전 히 사변적으로, 순전히 인간론적 -실존 철학적으로 전개하려는 시도들을 제지하는 것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기독교 지식의 열쇠로서 구원사 사상은 종교 개혁과 정통주의 교리 사상을 혐오하는 데서 자라오고, 또한 개혁 추구와 함게 가장 현대화하는 방편으로 더욱 신비적 기독교 이해를 하는 것이다"(동상 P.12) 라한다.

 

그리고 스테크는 쿨만이 구원사라는 열쇠를 갖고 고대 교회를 보았던 것에 대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간의 구원사적 긴장을 생략해 버리는 듯한 키엘켈가드적인 "동시성"(Gleichzei-tigkeit)사상에 반대하여 또한 교회 시대를 아예 중간시대로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반대하여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1289)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동상 P.43) 그래서 스테크 자신이 확정한 결론은 이렇다: 구원사상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며, 시대의 사상을 바르게 되도록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간현주의(Doketismus)로 근절시키기 어려운 경향은 구원사적 사고가 아니고는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상 P.52) 스테크의 이러한 말들에서 구원사 개념의 양면성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주의가 구원사적 사고 방식을 통해 신학에 진입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상 P.53). 더우기 구원사 사상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과거"에만 집착해서 연유를 삼는 반면에 "현대"와 연관시키는 데 별 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동상P.5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찾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 본문 속에 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 (Viva vox Evangel ij)안에서이지 역사 안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우하심이 성육과 부 활 안에 수렴되어 있고, 그리고 이 처우하심이 "말씀"의 증거를 통해 우리와 접 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의 처우) 역사 한에 들어와서 믿음으 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인봉되는 것"(동상P.61) 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스테크는 말하기를 "구원사 사상은 역사적인 최고의 인식탐구로 인정 되어 기독교 진리를 역사 개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사 실적으로 그렇게 증명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동상 P.61) 이와 같이 그의 말은 오늘날 신학 토론에서 신랄히 예각되어 있는 문제 곧 구원,혹은 진리, 혹은 말씀, 혹은 본문, 혹은 케리그마라고 하는 주제와 역사라 주제가 구원사 개념에 수렴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사 사상이 하 나의 신학적 개념으로 정착하여 그같은 원리들을 천착하여져서 우리의 해석학 원리로 나타나기에 앞서 구원사 개념이 강조된다는 아리스토적인 스콜라주의, 상태적인 정통주의며, 또한 역사에 대해 무관심을 나타내는 실존주의적 "동시 성"(gelijktijdigheid)에 반대하여 연유된 배경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 과 역사와의 관계이다. 이 둘이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를 이해함에 역사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정경을 떠나서 역사 자체 안에서만 그 진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구원사 개념에는 벌써 역사주의 가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사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역사의 문제가 오늘날 해석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신학의 실마리들이 얽혀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구 원사 개념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사적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하여 무비 판적으로 성경자체에만 들어가서 구원사적 체계를 발전시킨다 해서 간단히 해 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 일치하는 구원사적 원리들을 제시하기 앞서 구원 혹은 진리와 역사가 이해 되어져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속사"란 말 자체가 개혁주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렇게 소개된 적도 없다.

 

이 말 자채는 쉽게 여러 종류의 경험신학이며, 이성주의며, 실존주의며, 이단들에 연결되어 그 나름대로 사상체계를 세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별해 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1934년도에는 Nass S- childer 교수가 행하였다. 그 당시 바르트 신학이 개혁 교회에 스며들어올 때, Schilder 는 "역사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이 변중신학과 개혁주의자들 간에 신학의 오류를 미리 간파하고 교회에 알려준 데는 스킬더 교수의 공로가 크다.

 

그리고 바르트의 역사 개념이 구약 해석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영향 아래 쓰여진 것이

 

W.Vischer의 Das Christuszeugnis des Alten Testament 과 M.Hellbardt의 논문 Die Auslehung des Alten Testaments alstheologische Disziplin(ln Theologische Blatter 16, 1937 pp129-143)였다.

 

이들에 대해서 화란 개혁 구약 교수였던 N.Holwerda는 "설교에 있어서 구원사" ("De Heilshistorie in de prediking" Gere for 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Aattea, novended 1942)에서 이들의 구원사 개념을 "가현적 해결"이라고 진단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여러 분야에 영항을 미치자 그의 "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932)에 나타나는 "구원사"를 철저히 분석하 고 그것을 불트만의 실존적 의미의 구원사 개념과 비교하면서, 또한 칼 바르트 의 구원사 개념의 구약학자 폰라드의 전승사 개념에 미친 것을 보고 이를 서로 비교 분석한 학의 논문이 C.Trimp교수의 Om de Oeconomie vanhet Welbehagen( Goes: Oosterbaan s Le Cointre, 1961)였다. 그는 결론짓기를 바르트와 불트만에게는 본질적으로 같은 컨센서스(de

 

eigenl- ijke Consensen)가 있다고 하였다(동상 p.191).

 

이쯤되면서 개혁 신학자들에게 는 구속사의 진리 규명에 있어서 변증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 전승사적 구약 해 석을 비교하면서 그 역사 개념을 정체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특히 고려 신학교를 중심해서 말하면 바르트 위기 신학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고 브룬너가 1949년 말에 한국 교회에 와서 강의하자 고신 학우회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내었고 그 이듬 해 1950년 3월에 진리 운동 제 일호로 박윤선 교장이 "정통신학에서 본 바르트 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구원 사 개념의 역사를 의식하고 쓴 것은 아니고 단지 교의학적 측면에서 바르트 교의 와 웨스터 민스터 신조를 대조한 정도였다. 그러나 근래에 바르트 연구에서 박윤선 박사는 역사를 의식하나 그보다는 철학적 전제에서 바르트를 보고 있다(신학정론 1985).

 

요즘에 와서 윤리학 교수 이보민 교수는 "기독교 윤리학의 제 문제"(서울:기독 교 문서 선교회,1985)에서 해석학과 철학문제를 다루면서 이 역사의 문제를 상 당히 깊이 있게 다룬다. 그러나 그는 현대 철학적 인식 구조 속의 역사 개념을 초월적 지평(transcendental cricitisism)에 의해 파악하려는 데 힘썼고 성경 분문 속의 역사 개념을 다루지 아니했다. 그러나 나는 "구속사적 성경해석"(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86)에서 성경 분문 속의 구원사의 역사 개념을 파악 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오늘날의 해석학의 경계선과 과업이 무 엇이 되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잠간 해석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우리 구원사 개념에 도움을 줄 것이다. 원래 해석학 하면 영어로 "hermeneutics"인데 이는 (snr 24: 27) 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주석해 내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어 사전상으 로 볼 때 같은 의미를 가진 exegesis와 같이 직접적으로 본문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주석학"보다 "해석학"이란 말을 더 잘 사용하며 해석학이란 말이 어떤 권위가 있는 듯이 과대 평가하는 경항이 있다. 해석학의 원래 의도는 "주석의 이론"이란 뜻으로 해석학은 본문 자체에서 끄집어내는 이 론이며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론 자체는 계속 본문에 의해 양육 받고 교정받아 서 그것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 되어져야 함이 마땅한데, 오늘날의 해석학은 그 보다는 이론적 체계를 독자적으로 확립하려는 것이다. 즉 본문을 떠난 이론 수립인 것이다.

개혁주의 주석가 S.Greijdanus는 1946년 에 이미 Schriftheginselenter Schriftverklaring(Kampen)을 쓸 때 이런 것을 예견이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석함에 있어서 주석 자체는 그 작업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는 해석학은 그 성격상 "성경이 그 말씀하신 대로 그 뜻에 따라 해석되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해서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계시하시 는 것을 따라야 한다(동상 p.6,7)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은 이 고전적 의미를 떠나서 전혀 다른 방도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혁주의 해석학은 B.Warfield가 말했듯이 선험적(apriori)작접이 아니라 경험적(a posteriori)작업이다. 어떤 인간적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연구해 본 결과로 나 오는 작업이란 뜻이다. 우리 개혁 주의는 본문에서 나온 진리 혹은 케리그마하 면 그것은 역사와 연관된곳으로 보며 여기에 어떤 역사간에 대립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해석학은 이 진리(케리그마)와 역사가 상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 면서 , 또한 긴밀히 연락되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혹은 가능하다하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학과 구원사 이해에 난점을 주는 점이다. 이런 면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

 

- D. L. Baker 著 (원서명 : Two Testaments One Bible)

 

 

Ⅰ. “구약적” 해결들 (A. von Ruler)

 

1. “이스라엘의 역사와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된 계시가 어떻게 해서 기독교회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 만일 구약성경이 기독교인들을 위한 계시가 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이든지 아니면 이스라엘과 관계를 갖든지 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써만 이스라엘에 발생한 것이 그들에게도 적용된다. … 구약의 계시가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계시는 이스라엘의 ‘재현’이 있을 때에만 충분히 전승될 수 있을 것이다.” (p.99~100)

 

 

 

 

2. “신약은 무엇보다도 사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구약은 왕직에 집중되어 있고, 신약의 두드러진 사건 - 선택받은 백성이 메시야를 배척함 - 은 구약에서 예견되지 않은 것이며,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의 기조인 반면, 하나님의 진노와 영광은 구약의 기조이다. … 신약에는 한 가지 사죄 방법이 있을 뿐이지만 구약에는 많이 있으며, 신약에는 사도들이 열국으로 파송되고 있는 반면, 구약에는 열국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로 와야 했다.” (p.104)

 

  ☞ 판 룰러는 구약에는 많은 구속의 방도가 있었으나 신약에는 오직 한 가지 방도밖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조에는 어느 정도 진리가 담겨있으나, 대속(substitution) 사상이 오직 신약에만 명백히 나타난다는 그의 진일보한 주장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대속은 구약의 중요한 개념이다. “대속과 속죄가 의미하는 바를 이스라엘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대속과 속죄가 어떻게 나사렛 예수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stamm, Cullmann, p.115)

 

 

 

 

3.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전파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를 설교하는 것 - 사실 그 나라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셨다 - 이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p.110 上)

 

 

 

 

4. “판 룰러는 창조론이 구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성화가 화목보다 더 크다고 전제한다. … 구약은 창조에 관심이 있으며 신약은 구원에 관심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구약이 신약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p.118)

 

  ☞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균형 잡힌 기독교적인 입장은 창조와 구원 모두 중요한 것이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Toombs, p.120 上)

 

 

 

 

5. “이스라엘은 신정왕국으로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신정왕국이 되었고, 신정왕국은 세상의 최종적인 기대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교회보다 더 중요하며, 구약이 신약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 구약이 하나님 나라의 상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그 나라의 도래를 묘사하는 것은 신약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구약이 신약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오류이다. (Wolff, p.122)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최종적인 행위이지만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Cullmann). 그러므로 신약은 단순히 구약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는 부록이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동일하게 기록한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전달 또는 자기 계시가 된다. (p.124)

 

 

 

 

6. “구약은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판 룰러의 표현으로는 신정왕국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p.120, 下)

 

  ☞ 이스라엘이 겪은 국가의 형식들 - 광야 공동체, 부족 동맹, 왕정정치, 포로 후기 공동체 등 -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신정왕국을 성공적으로 표출한 것은 없었고 예수께서 오셔서야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정왕국이 이스라엘의 전제라는 판 룰러의 주장은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 (Briezen, p.121)

 

 

 

 

 

 

 

* “구약적” 해결들에 대한 정리

 

 

 

 

 ☞ 판 룰러는 “신약은 무엇보다도 사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구약은 왕직에 집중되어 있고, 신약의 두드러진 사건 - 선택받은 백성이 메시야를 배척함 - 은 구약에서 예견되지 않은 것이며,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의 기조인 반면, 하나님의 진노와 영광은 구약의 기조이다. … 신약에는 한 가지 사죄 방법이 있을 뿐이지만 구약에는 많이 있으며, 신약에는 사도들이 열국으로 파송되고 있는 반면, 구약에는 열국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로 와야 했다”고 주장한다(p.104).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구원하시는가? 그것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 서로 배타적이거나 더 우월한 문제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와 영광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지 않은가? 이 둘을(창조와 구원, 구약과 신약) 구분을 지어 생각하지만, 너무 분리시켜서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 판 룰러는 구약은 하나님의 본래적이요 본질적이요 정경적인(규범적인) 말씀이며, 신약은 구약의 해석학적 부록(p.107)이라고 보면서 구약에서부터 신약으로의 계시의 발전이 없다고 하였는데, 구약의 감추어져 있었던 많은 희미한 부분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음을 인지(認知) 해야 할 것이다. 구약이 바라던 그리스도를 신약의 복음서들이 자세히 알려 주고 있으며, 서신서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확대.해석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구약으로부터 신약에로의 계시의 발전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단절시켜서 생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구약이 말하는 내용들이 자연적으로 신약으로 이어지는 신.구약성경의 통일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둘 중의 하나를 가지고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를,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있어서 더 소중하고, 또는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루시는 모든 일(창조와 구원 모두를)을 동일하게 중시해야 한다.

 

 

 

 

 ☞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 모두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외형상 완전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진다. 순서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교회보다 먼저이며 구약이 신약보다 먼저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와 신약 역시 간과되어 질 수 없으며, 창조와 구원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중요하다.

 

 

 

Ⅱ. “신약적” 해결들 (Rudolf Bultmann)

 

1. 불트만(Bultmann)은 구약이 기독교 역사의 일부(“그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여전히 유대인들을 위한 책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구약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은 기독교인의 경전은 아니지만 신약과 기독교의 전제인 것이다. 그에게는 이스라엘과 교회가 전혀 다른 별개의 실체이기 때문에 구약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불트만의 구약에 대한 이해는 신약과는 다른 율법에 불과한 것으로써 신약의 은혜와는 다르며, 기독교인들의 생활 규범에 관한 책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문자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구약의 내용들은 단지 신약과 기독교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사역은 희미했던 구약 시대의 사건들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 신약의 사건으로 나아갔던 것 뿐이다. 구약의 구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 같이 하나님의 사역은 구약과 신약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구약의 율법을 통해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계신다. 구약은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 신약 안에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2. 불트만은 예언과 성취에 대한 오늘날의 견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예언은 구약 역사의 실패에서 발흥된 약속으로 이해해야 한다(p.155)고 하는데, 구약의 역사는 그 내적인 자가당착, 곧 실패(Scheitern) 가운데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의 실패로 인해서 언약,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인식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상황의 전적인 불가능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므로 그 실패는 곧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취는 실패인 역사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 창조인 하나님의 은혜와의 조우의 결과라는 것이다(p.153). 그에게 구약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상과 경험적인 공동체의 실체 사이의 내적 모순이 있으며, 구약성경은 약속이 되어버린 역사의 실패를 기록한 신약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성경에는 우리가 보기에 대조적인 것들과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상충되는 것들로 보기 보다는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 안에서 나타난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 안에서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성경을 하나로 만들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집중해야 한다.

Ⅲ. “성경적” 해결모색

 

1. G. Von Rad는 신약이 그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을 필요로 하기 때문임을 증거할 목적으로 구약이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신약의 구약 사용으로 시작하지 않고, 구약이 어떻게 신약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신약의 접근은 신.구약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전제하면서 그 기초 위에 인용 또는 예증으로써 구약을 현실화(actualizing)하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에는 대조와 계속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Von Rad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구약의 증거 없이는 불완전하며, 구약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이해한다. (p.249, 257)

 

  ☞ 확실히 신.구약 성경은 어느 한쪽에 우월성을 둘 문제가 아니며, 신.구약 성경이 함께 어우러져서 확증하고 예증되어야 한다. C. H. Dodd는 구약이 과정이며 완결된 총체가 아님을 지적하고, 신약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교회는 구약을 영속시키며 신약을 시작케 하고, 구약의 주제가 공동체 이스라엘인 반면에 신약의 주제는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두 성경 사이에 상이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성경 내에 있는 본질적인 통일성과 부합하는 것임을 밝힌다. 구약은 신약과 함께, 오로지 함께만 기독교의 성경을 이룬다. 구약에는 난제들과 부조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성취의 빛 하에서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반면, 신약은 그 배경을 구약에 두며, 그 배경과 분리된다면 곡해된 형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p.313). 구약에서의 하나님과 신약에서의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과 역사, 모든 생활 가운데서 존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 어떤 면으로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계속되는 모습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그것들이 따로 분리되어서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Von Rad는 의미를 지닌 역사(Geschichte)와 시.공간의 한 지점에 발생한 역사(Historie)를 구분하면서 성경을 일반적인 진리의 제시 또는 역사 탐구의 자료가 아니라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증거로 이해한다(p.258). 그런데, 암슬러의 신.구약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다소간 Von Rad의 그것과 유사한데, 구원사로 전 구약을 해석하려는 그의 관심은 마치 Von Rad처럼 그도 이러한 관점에 적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p.289).

 

  ☞ 신.구약 성경에 대한 관심을 ‘구속사’에 두는 것은 옳은 관점에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이 하나의 구속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Von Rad는 ‘구속사’라는 개념은 끊임없이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정하신 목표 지점을 향해 움직여 나가는 일련의 역사 과정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구약해석학」p.28). 그러나 구속사만을 오직 신.구약 성경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구속사 또한 신.구약 성경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고, 가장 큰 물줄기(하나님 나라, 왕국)를 발견할 수 있다.

 

 

 

 

3. 신.구약 성경의 관계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유형론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상응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세부적인 대구(對句)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근본적인 원리와 구조의 일치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Amsler와 Gundry는 유형론의 기초가 하나님의 역사 운행이라고 본다(p.237). 이것은 유형론의 기능이 구약 사용의 절차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활동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부분들이 유형론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Th. C. 프리젠은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시해서도 분리해서도 안 되며, 다른 것을 희생시키며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두 성경 모두 창조부터 절정까지 하나님의 인간과의 교통에 대한 증거의 부분으로 인식해야 함을 말한다(p.304).

 

  ☞ 하나님의 사역하시는 방법이 외형상으로 볼 때는 신.구약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듯 하지만 여전히 동일한 목적을 향해 그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방법과 신약에서의 방법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서로 보완하며 충족시키는 면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겠다. 구약의 내용들이 보잘 것 없거나 불필요 했던 것이 아니며, 신약만이 우수하고 뛰어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의 방법이 실패한 것도 아니고, 신약만을 홀로 필요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나 있는 구약과 신약이 모두 필요하다.

 

 

 

첨부파일 구속사적 성경 해석.hwp

 

 

 

 

 

 

출처 : 개혁하는 교회(기독신학연구실)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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