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2월 12일 켄터키 주의 조용하고 아담한 나무로 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나이가 50세가 넘을 때까지도 소작인으로 산 목수였으며, 아들 애이브러헴 링컨 역시 목수가 되기를 바랐다. 링컨은 어렸을 때 키가 크고 말라서 맞는 옷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 낸시는 링컨에게 성서를 읽어주고, 평화는 가치있는 싸움보다 더 중요하다는걸 가르쳤으며, 1818년 독초를 먹은 소에서 짠 우유가 매개체인 우유병 혹은 우유중독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죽음으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톰은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사라 부시 존스턴 링컨(영어: Sarah Bush Johnston Lincoln, 1788년 12월 13일 - 1869년 4월 12일)과 1819년 12월 2일에 재혼하였다. 부지런한 성격의 사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받아다가 씻길만큼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았으며,책을 좋아하는 링컨의 편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링컨은 풍부한 학식을 얻을 수 있었다. 청년시기에는 우체국장, 변호사 ,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1832년에 일리노이 주 의회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첫 정치경험을 하였다. 1833년에는 관심이 있던 법률을 혼자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1834년 일리노이 주 주의원당선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 1846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노련한 정치가 더글러스 현역 상원의원과 경쟁을 벌인다. 이때 이들의 논쟁 주제는 노예제도였는데,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로 노예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들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결과는 더글러스의 상원의원 재선이었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예제도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861년 3월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노예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링컨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전쟁 중이던 1864년 11월에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1865년 4월 3일 남북전쟁은 남부의 항복으로 끝났으며, 1865년 4월 14일 연극을 보다가 총격을 당했고, 그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의 원인은 남북 갈등 때문일지도 몰라도 미국의 인디언 박해와 관련된 전승인 테쿰세의 저주 때문에 그런 듯 하다는 의견도 있다.
링컨의 암살 배후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링컨을 암살한 저격수 존 윌크스 부스의 배후에 남부의 결사단체가 사주했다는 설도 있으나, 부스는 재판도 받기 전에 의문사했기 때문에, 배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링컨이 노예제도가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아 반대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링컨의 주된 관심사가 노예제도의 폐지나 노예제도 자체라기보다는 노예제도 존폐문제로 서로 대립하던 남부와 북부의 분리를 막는 것이었던 점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1]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노예출신 흑인들은 옛 상전 밑에서 농장 노동자로 다시 종속되었으며, 공화당의 반발로 흑인들에 대한 사회에서의 차별도 여전했다. 오히려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비밀 테러 단체(대표적인 예가 KKK단)의 출현으로 흑인들은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
물론 링컨 자신은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 '악의 제도'라고 할 정도로 다소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노예제도와 흑인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는 자본주의 경제지역이라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가 일하는 북부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다.[2] 나아가 링컨은 의지가 박약하거나 미숙하여 남북분리를 초래했다는 우려를 듣기도 하였다.
경제학자 토머스 딜로렌조는 저서 《링컨의 진실-패권주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에서 링컨의 연설문, 군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서한 등 1차 문헌을 참고자료로 인용하여,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해방선언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이며, 남북전쟁 당시 조직적 파괴, 자신을 비판한 언론 탄압, 인신보호영장 정지 등으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점을 들어 링컨을 "정략적 독재자"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미국 중앙정부의 비대화, 로비의 횡행, 정경유착형 엽관제를 불러왔다고도 비판했다.
한편 링컨은 청년기의 성관계로 매독에 걸려서 고생하였다. 호색하였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출세하고픈 출세욕에 대한 의지로 그는 자제력을 보였다.[3] 그러나 1835~1836년경 비어스타운에서 묘령의 소녀와 관계 중 매독에 걸리게 된다. 그는 신시내티 주의 다니엘 드레이크 박사에게 찾아갔지만 의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라서 그는 끝내 병을 치유하지는 못하였다.[3] 이는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인 인적사항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친어머니(우유병으로 죽음)와 누나(아이를 낳은 후 몸조리가 잘못되어 죽음)의 죽음, 우체국장 시절 사귀던 애인을 잃은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재임 중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링컨은 메리 토드와 연애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문화갈등을 겪었다. 물론 링컨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아들을 사랑했지만, 메리와의 성장환경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메리는 명문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몸에 밴 사람이었던 것에 반해, 소작인의 아들인 링컨은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벽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 부부가 갈등을 겪게 했다.어떤 사람은 토드가 악처였다고도 얘기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의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뉴스위크 한국어판 보도에 의하면 1960년대에 한 내과 의사는 그가 마르팡 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냈다. 링컨은 키가 매우 크고 사지가 길었는데 이는 마르팡 증후군의 특징이며, 이 증후군을 가진 소년이 링컨의 먼 친척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링컨의 DNA는 현재 남아 있지만, 그가 이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링컨의 일생에 대한 사료(史料)로는 어머니 낸시의 사촌인 드니스 행크스의 증언[4]과 변호사시절 같이 활동한 윌리엄 핸더슨 변호사의 전기가 있다. 개인적으로도 한 소녀에게서 전염된 매독으로 고생하였다. 링컨과 그의 아내 메리 토드 링컨은 3명의 아들이 어려서 죽았는데, 링컨은 이 문제를 자신의 질병인 매독과 관련되었을 것이라 보고 고민했었다.[3]
게티즈버그 연설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이 전투 격전지에서 발표한 선언문으로, 짧은 문장 속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잘 요약했다는 평을 받는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다음은 공통점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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