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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과 결별하기, 자유주의 신학으로

신학과 학문

by Bliss Yeo 2010. 4. 3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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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과 결별하기, 자유주의 신학으로  
현대 신학 산책 (2) - 슐라이어 마흐 
  
뉴스앤조이


헬라의 학문적 전통은 철학이 중심이었다. 기독교가 헬라적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학적 논증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희랍 철학의 개념들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들이 신학의 중심을 이루었고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의 신성, 인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논쟁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근대라 불리는 시대는 철학으로부터 과학으로 학문의 중심이 이동하는 시기였다. 즉 진리 추구에 있어서 '왜'와 '의미(본질)'를 따지기 위한 추리와 논증보다는 '어떻게'와 '사실(현상)'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과 관찰 쪽이 더 학문적 권위와 무게를 갖게 되었다.

더 이상 기독교 신학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교리들이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쓸데없는 말장난이라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제 세상에 교양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시대로부터 기독교의 입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권위 기반이 요구되었다.

형이상학은 더 이상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과학의 핵심인 감각적 경험과 관찰이라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권위도 감각적 경험과 관찰에 근거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여전히 경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과 거리가 먼 형이상학적 교리와 이적 기사에 의존하고 있는 한, 멸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슐라이어 마흐는 기독교가 인간의 경험에 기초하는 종교로 탈바꿈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형이상학적 교리는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교리에 대한 복종(무조건적 수용)의 문제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보편적 감정(경험)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슐라이어 마흐의 표현을 따르자면 무한자(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의식(감정적 경험)의 문제였던 것이다.  

과학이 경험과 이성에 근거한 것이고, 도덕이 행동과 양심에 근거한 것이라면, 종교는 감정과 직관에 근거한 것이다. 이성과 양심이 인간에게 보편적이듯이 감정(의식)도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감정(의식)이 바로 종교의 토대다.

누구나 인간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으리라는 느낌을 갖는다. 또한 위기가 닥치면 인간을 넘어선 존재를 향해 기도하며 의지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절대자에 대한 감정적 경험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절대자에 대한 감정(의존 의식)을 성찰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이다.

종교는 유한하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존재(인간)를 넘어서 무한하고 영원하고 전체적인 존재(하나님)를 모색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이성의 잣대로 종교의 가치를 재단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슐라이어 마흐는 선언했다.

다른 종교와 다르게 기독교가 갖고 있는 특징은, 이런 종교적 감정(의존 의식)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된 십자가의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기독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종교적 감정인 '하나님 의식'(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감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되는 경험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조리 있게 설명하고 표현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 의식’에 대한 설명과 표현이라면, 기독교 교리는 절대 불변의 것이 될 수 없다. 시대의 변화는 인간들의 경험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표현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각각의 시대는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시대가 갖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학문적 상황이 바뀌면, 하나님 경험에 대한 표현과 설명(교리)도 변화될 것이기에, 기독교 교리는 문화적, 역사적 한계(상대성)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슐라이어 마흐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슐라이어 마흐는 하나님의 속성(전지, 전능 등)에 대한 신학적 진술(혹은 교리)들을 하나님의 실제 존재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제까지 전통 신학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들은 하나님의 속성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 즉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 내용을 진술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화적, 역사적, 학문적 상황과 수준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의 표현과 설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체험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의식’과 이것이 후세에 미친 영향들이 아주 잘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종교적 경험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른 양식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다만, 그 이후의 시대가 각각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신학)를 할 때마다, 의지해야 할 하나의 모범으로서의 역할과 권위를 갖고 있을 뿐이라고 슈라이어 마흐는 보았다.

슐라이어 마흐의 입장에서 볼 때,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초자연)은 자연법칙(과학적 지식)을 몰랐던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방식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오늘날의 학문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적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하셨음(자연법칙)을 부정하려는 아주 위험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적을 인정한다는 것은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의도(자연법칙)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주재(자연법칙)를 거부할 수 있는 세계(이적)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이는 오히려 하나님이 제한당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적 기사가 도리어 하나님의 절대적 결정권(주권)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적의 거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슐라이어 마흐에 따르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막강한 '하나님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 외에는 본성상 사람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 의식'의 수준(능력의 정도)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속에 이 '하나님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분은 신자들을,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 의식' 속으로 끌어들인다. 즉 하나님 의식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하나님 의식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사람들과 '하나님 의식'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성오 / 휘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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