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이다? '계몽주의'라는 도전
현대 신학 산책 (1)
뉴스앤조이
내일도 해는 동쪽에서 뜬다. 한 달 후에도, 일 년 후에도, 십 년 후에도, 천 년 후에도 그럴 것인가. 무얼 근거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가?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에도,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날들이 그러했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믿음에 대한 필연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처녀가 임신을 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 아내가 안 그랬고, 내 어머니가 안 그랬고, 내 할머니가 안 그랬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안 그랬다는 사실이, 그 누구에게도 그런 일이 결코 있어날 수가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필연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았다.
첫 번째 질문 형식 : 왜 벼락에 맞았을까. 평소에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닌 때문에 하늘로부터 벌을 받았다.
두 번째 질문 형식 : 어떻게 벼락에 맞았을까. 벼락은 지상에서 뾰족하게 솟은 곳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첫 번째 대답은 미신적(신화적)이라고 정죄되었다. 두 번째 대답은 과학적이라고 추앙되었다. 이것이 근대 계몽주의와 근대 과학의 업적이다. 계몽주의는 한발 더 나아가 두 번째 대답에 이런 신념을 첨가하였다. 그가 이전에 무슨 짓을 했건 상관없이 자연법칙에 따라서 그가 벼락을 맞았다.
왜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닌 그였을까. 근대 과학에 근거한 계몽주의의 대답은, 하필 그때 그 자리에 간 그가 재수가 없었다(우연)는 것이다. 자연 세계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목적과 의미(왜)는 상실되고, 오직 인과적 연결(어떻게)만이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자연 세계의 모든 움직임은 관찰 가능한(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법칙에 따르고 있다. 그 법칙 세계에서 예외는 없다. 인간은 관찰과 실험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그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 기사는 과학 법칙을 벗어난 것으로 미신(신화)이다.
과학이 알지 못하는 자연법칙은 없기 때문에(과학은 이런 신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과학이 아는 법칙에서 어긋나는) 이적에 대한 성경의 기사는 모두 신화적 과장이다. 과연 과학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법칙의 세계는 없는 것일까? 초능력의 세계와 같은 것 말이다. 과학은 그런 것을 비과학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그 자연법칙의 절대성(예외 없이 적용된다)은 누구에 의해 보장되는 것일까. 법칙 스스로가 법칙으로 유지되기를 시도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논의는 접어 두도록 하자. 자연법칙을 지지해 줄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든 비과학적인 것이라 규정하고 말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현상과 법칙에 대한 진술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자.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도대체 형이상학과 같은 말장난이 아직도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철학도 빨리 형이상학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근대 과학이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생명체는 진화한다. 자연계의 생물은 단순하고 원시적인 형태에서 점점 복잡하고 문명적인(?) 형태로 발달되어 왔다. 그 발달의 원인과 과정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상상력으로 그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근거는 '아주 오랜 시간'이다.
물론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현재 과학의 법칙이지만 진화론에서는 이 법칙이 무시된다. 아주 오래 전 옛날에, 우연히 딱 한 번 무생물에서 생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와 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원숭이가 사람을 낳을 수는 없다는 것이 현재 과학의 유전 법칙이지만, 이 역시 진화론에서는 무시된다. '아주 오랜 시간'이라는 상황이 개입하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와 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인간의 정신도 진화의 산물이다. 즉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신세계는 단순하고 원시적이었다. 그들은 객관적인 관찰이나 실험이 결여된 미신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에 근거해 사고하였다. 그 이전의 인간들은 훨씬 더 미개해서 거의 원숭이 수준이었을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정신적 수준이 발달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 논리대로라면 앞으로 오랜 시간이 더 흐르면 인간의 정신은 훨씬 더 고차원적이 될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2,000년 혹은 그 이상 먼 옛날 사람들이 적은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정신적 수준은 지금 사람들보다 훨씬 미개하고 원시적이다. 인간 정신의 진화 과정에서 볼 때, 성경은 수천 년 전 사람들의 기록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 당시의 사람들이 적은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훨씬 더 계몽된 현대인들이 취할 태도가 결코 못 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기록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수천 년 전 과거의 계몽되지 못했던 미성숙한 이성의 관점에 근거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인간 이성의 수준을 반영한 것이기에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자면 당연히 오류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기록한 수천 년 전의 이성보다는 오늘날의 이성이 더 정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이성은 아직 미계발된 상태에 있었고 원시적이고 미개해서 세상을 객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때의 기록에는 미신적 과장과 왜곡이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진보한 이성의 관점에 따라 성경의 기록들이 재검토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을 아는 현대인들이 취해야 할 합리적인 태도라고 계몽주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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