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과 목 개 요
(Course Description)
개혁주의 예술신학은 예술현상에 대한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이해방식을 참고하면서
성경에 나타나는 예술과 예술가의 본질과 역할을 탐구한다. 특히 21세기의 상황 속에서의
예술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개혁신학적 입장에 어떻게 접근하고 대안을 마련할지를 논의한다.
본 세미나는 다음의 주제들을 다룰 것이다.
1. 예술과 예술경험에 대한 이해: 예술의 정의, 아름다움의 개념, 예술적 모방과 창조의 개념
2. 예술에 대한 성경적 이해
3. 칼빈과 카이퍼의 예술이해
4. 현대 개혁주의 예술이론의 이해(쉐퍼, 로크마커, 시어벨드, 월터스토프)
5. 예술과 창조성
6. 예술과 윤리
7. 예술과 성(性)
8. 예술과 수용자
9. 기독교와 문학
10. 기독교와 음악
11. 기독교와 미술
12. 기독교와 영상예술
제1강 예술, 아름다움과 예술경험
1. 예술개념의 역사
서양에서 예술이란 말(art)은 라틴어 ‘ars'에서 왔고 이 라틴어는 헬라어 ’τέχνη‘의 번역이었다. 본래 이 말은 오늘날의 ’예술‘이란 뜻과는 달리 훨씬 넓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테크네 또는 아르스란 말은 고대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대상을 다루는 ’솜씨‘(skill)를 의미했다. 즉 도자기를 굽거나 조각상을 만들거나 집을 짓거나 옷을 짓거나 배를 건조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군대를 지휘하거나 땅을 측량하거나 청중을 움직이는 솜씨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예술의 원 뜻은 순수예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기능적 솜씨를 포함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실천지‘(poietike episteme; productive knowledge)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들 솜씨에 공통적인 것은 규칙(rules)에 대한 지식이었다. 비록 각 분야마다 구체적인 규칙의 내용은 다르지만 모든 솜씨는 일시적인 영감(inspiration)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적 규칙을 파악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법(grammer)이나 논리학(logic)도 규칙의 집합으로서 솜씨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중세에는 이러한 솜씨가 정신적인 솜씨인 ‘liberales'와 신체적(일상적) 솜씨인 'vulgares'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엄격한 의미의 솜씨인 ’liberal arts'(artes liberales)(인문학: 문법, 수사법, 논리, 대수, 기하, 천문, 음악)는 대학에서 가르쳐 졌다. 여기에 대응하는 7개의 실제적 솜씨인 기계적 예술(mechanical arts)은 복식, 건축, 항해, 농사, 조리, 의술, 연극으로 규정되었다. 즉 중세의 구분은 현대의 예술(fine arts)의 정의와는 다르다. 인문학의 하나로 구분된 음악은 작곡, 성악, 기악연주가 아닌 음의 조화(화음)를 다루는 이론이었고 건축이나 연극은 실제적인 기능에 강조를 두었다. 반면에 시작(poetry)은 영감에 의한 일종의 예언이었지 기능적 솜씨에 속하지 않았다. 또한 회화나 조각은 두 종류의 예술목록에서 빠질 정도로 주변적인 기술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중세적인 예술개념은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되었다. 과학이나 기능적인 기술이 예술로부터 배제되었고 그 대신 시작(poetry)이 예술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가속시킨 사건은 16세기 중반의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Peri poetikes)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르네상스의 예술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이탈리아 도시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이제 미술가, 조각가, 건축가는 단순한 장인이 아닌 특별한 존재로 인장되었다. 초기의 르네상스 대가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코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스스로를 일종의 과학자로 여겼지만, 점차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업과 과학을 분리시켰다. 16세기 후반에는 바사리나 단티 등이 회화, 조각, 건축을 통합된 하나의 예술로 보려는 ‘디자인 예술’(arti del disegno)의 개념이 제시되었다.
오늘날 통용되는 순수예술(fine arts; beaux arts)의 개념은 16세기에 생겨났지만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였다. 1765년 건축이론가 프랑소와 블롱델은 건축 외에 시, 웅변술, 희극, 회화. 조각, 음악, 춤을 조화미를 통해 기쁨을 제공하는 ‘순수예술의 체계’로 보았다. 19세기에 들어 와 순수예술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고 예술이론가 바퇴는 실재를 모방하는 작업을 순수예술의 공통점으로 보았다. 바퇴 이후 순수예술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인정되어 왔다.
1) 예술은 아름다움(beauty)을 산출한다.
2) 예술은 실재(reality)를 재현(reproduce)한다.
3) 예술은 형식들(forms)을 창조한다.
4) 예술의 기능은 표현(expression!)에 있다.
5) 예술은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을 산출한다.
6) 예술은 충격(shock)을 산출한다.
2. 아름다움(美)의 개념사
헬라어의 ‘아름다운’(καλόν)이란 말은 라틴어 ‘pulchrum'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르네상스 시기에 ’bellum'으로 대치되었다. 서양 예술사에서 아름다움(美)처럼 다양한 의미의 변화를 거쳐온 개념도 드물다. 그러나 크게 보아 아름다움의 개념은 세 가지의 방식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도덕적’ 아름다움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
둘째, 순수한 미학적 의미의 아름다움으로서 미적 경험을 일으키는 '정신적인' 내용.
셋째, 가장 좁은 의미의 아름다움으로서 형태와 색을 통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의미. 이 의미가 현 대의 가장 일반적인 미의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이스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균형미(summetria; symmetry)와 시각이나 청각을 통한 감각적 아름다움(euruthmia,; eurhythmy)으로 구분된다. 플라톤은 균형미를 초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이데아의 미로 간주하고 감각적 미를 허상으로서 평가절하했다. 플라톤 이후 미의 범주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전통은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7세기의 샤를 페로는 필연적 미와 우연적 미를 구분했고 18세기의 헨리 호움(케임즈 경)은 절대적 미와 상대적 미, 19세기의 구스타브 페히너는 본래적 미와 파생적 미를 구분했다.
이러한 미의 형식적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규정한 다양한 내용들이다. 미의 규정에는 적합성(aptness), 장식성(ornament), 미모 또는 잘생김(comeliness), 은혜(grace), 정교함(subtlety), 숭고함(sublimity), 질서(order)와 스타일(style), 고전미(classical beauty), 낭만적 미(romantic beauty) 등이 있다.
적합성(aptness)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는 미를 목적에 맞는 적절함으로 이해했고(크세노폰의 Memorabilia) 영국의 공리주의자들도 미를 목적에 맞는 기능적 유용성으로 이해했다. 건축에서도 거대한 구조와 비례를 추구했던 고대와 중세의 건축미 대신 현대의 기능주의는 건축의 기능성을 미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장식성(ornament)은 중세 스콜라학문에 의해 ‘ornamentum' 또는 ’venustas'으로 불렸는데, 고대 건축의 장식으로부터 중세와 르네상스(르네상스 후기의 로코코)에 이르기까지 장식성은 아름다움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장식미는 현대의 기능주의자들(그리너프, 설리반, 루스, 르코르뷔지에)에 의해 기능성과 기하학적 단순성으로 대치되었다.
미모 또는 잘생김(comeliness)은 로마시대에 남성적 위엄(dignitas)과 여성적 미모(venusas)로 구분되었고 이러한 구분이 중세에도 전승되어 한편 남성미인 ‘위엄’에 대해 여성미인 ‘우아함’이 대칭되고, 다른 한편 외면적인 미모와 내면적 미로 구분되었다.
은혜(grace), 헬라어 ‘charis'와 라틴어 ’gratia'로서 고대에서 자비와 박애를 의미했다. 중세에는 하나님의 은헤로서 이해되었으나 르네상스 이후 고대적인 의미로 다시 사용되었다. 근대에서 낭만주의의 영향아래 쉘링은 은혜를 최고의 예의와 모든 힘들의 조화로 이해했다.
정교함(subtlety)은 고대의 수사학의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날카로움, 간결함 등의 의미를 함축했다. 16세기의 카르다노 역시 단순 명료함을 아름다움과 조화를 산출하는 조건으로 보았다.
숭고함(sublimity)은 고대의 수사학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오랫동안 아름다움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18세기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가 이 사실을 새롭게 부각시키면서 칸트와 버크로 대변되는 숭고함과 미를 대립시키는 입장과 숭고함을 미의 극치로 보는 독일학자들의 입장으로 나뉘었다.
고대의 질서(order)와 스타일(style)은 건축에서 도리아, 이오니아, 프리기아(코린트) 양식으로 구분되었고 연극에서는 비극과 희극의 양식으로 뚜렷이 구별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그 후 음악과 회화에도 적용되었다. 17, 18세기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스타일의 차이에서 일종의 보편성과 항구성을 찾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고전미(classical beauty) 역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원래 이 말의 어원인 ‘classis'는 고대의 신분을 의미했으나 점차로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인정받은 ’고대의‘ 작품이나 최근의 ’우수한‘ 작품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고전적이란 의미는 고대의 작품의 스타일을 모방하거나 완벽한 조화와 균형미를 갖는 작품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낭만적 미(romantic beauty)는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운동으로서 생명의 근원적 충만함을 상상과 환성을 통해 재발견하려는 운동이었다. 이들은 아름다움을 상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고 모든 형태미와 규칙에 대해 정신적 미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일상적인 기준과는 낯선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들은 자연(신)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상상적인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했다.
3. 예술경험의 개념
1) 예술경험이란 ‘감각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미에 대한 주관적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고대에는 미를 경험하는 ‘보편적’ 주체를 인정했으나 근대 이후 미적 감각 자체를 개인의 주관적 취향으로 보는 입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이스에서는 미적 태도를 비참여적 관람자(spectator)의 태도와 동일시했고,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까지 예술경험에 대한 기본태도로 보게 만들었다. 헬라어 ‘αἴσϑησις’는 ‘감각인상’(sensory impressions)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지성적 인식인 ‘νόησις’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이 다시 미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용어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독일의 라이프니츠-볼프 학파의 알렉산더 바움가르텐(A. Baumgarten)에 의해서였다. 그는 고대의 범례를 따라 지성적 지각(cognitio intellectiva)과 감각 지각(cognitio sensitiva)을 구분하고 감각지각을 미적 지각(cognitio aesthetica)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생각은 칸트 후기의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수용되었고 헤르바르트와 헤겔을 거쳐 하나의 독립된 철학분야인 ‘미학’(Aesthetik)으로 정립되었으며 미학은 아름다움의 경험을 파악하는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2) 고대 그리이스인들의 예술경험에 대한 전형적인 파악방식은 B. C. 5세기 경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 의해 언급된 대로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ㄱ) 환상이론(apatetic or illusionist theory)
연극의 기능이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가상적인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 현상을 관객들이 실재로 느끼도록 하는데 있다고 본다. 이 이론에서는 예술경험은 일종의 환상(ἀπάτη)의 경험으로서 마법(술)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ㄴ) 정화이론(kathartic theory)
음악이나 시의 일부(예: 비극적 서사시)가 관객들의 마음에 격렬하고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심리적 충격(shock; ἔκπληξις)을 경험하게 만든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충격이 감정을 해방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았다.
ㄷ) 모방이론(mimetic theory)
예술의 기능을 인간의 실제 행동이나 사물을 모방함으로써 관객의 마음속에 가상적인 상(ἒιδωλα)을 산출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모방(μίμησις)이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채용되어 중세에 이르기까지 예술경험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이론이 되었다.
3) 고대로부터 근대(18세기의 계몽기) 이전까지의 예술경험에 대한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ㄱ) 집중(concentration): 피타고라스는 관찰자가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그의 눈을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아름다움의 지각(경험)은 감각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는 감각의 집중을 통해 시각적인 대칭(symmetry)과 청각적인 조화(harmony)를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ㄴ) 이데아(Idea): 플라톤과 플로티누스는 예술경험을 아름다움 자체인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험은 감각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이데아의 세계를 직관하는 영혼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ㄷ) 매혹됨, 황홀(enchantment):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소윤리학(Ethica Eudemia)에서 시각이나 청각 같은 감각기관을 통한 쾌감이 의지적 통제를 초과하는 황홀감의 경험을 묘사한다. 이 경험은 직접적인생리적 만족이 아니라 쾌감을 촉발하는 대상을 관조하거나 예상할 때 일어나는 미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ㄹ) 영혼의 감각(Sensus animi): 중세의 사상가들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종합하여 아름다움을 감각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보았다. 이 능력을 스코투스(Scotus Erigena)는 ‘영혼의 내적감각’(interior sensus anima)라고 불렀고 보나벤투라(Bonaventura) ‘영혼의 봄’(spiritual vision)이라고 불렀다. 이 감각은 아름다운 대상을 소유하거나 이용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관조할 때 얻어지는 창조주와 그의 작품의 영광에 대한 경험이었다.
ㅁ) 영혼의 복종 또는 의탁(Lentezza): 르네상스 시대의 이론가들 역시 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미적 경험이 대상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선천적인 미적 관념(이데아)에 일치할 때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 때의 경험은 근대의 주체처럼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주관에 의해 일어난다.
ㅂ) 착각(Delirio); 18세기 초 후기 바로크 시대에 활약했던 그라비나(Gravina)는 미적 경험이 비합리적 감정의 흥분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착각으로서 아름다움의 파악뿐만 아니라, 창조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4) 근대 이후의 예술경험의 개념
ㄱ) 18세기 영국의 예술이론은 로크(J. Locke)와 샤프츠베리(Shaftsbury)의 영향아래 심리주의적인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냈다. 모든 실재(being)에 대한 분석은 마음(mind)에 대한 분석으로 대치되었다. 그들은 미적 감각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이 감각도 도덕감각과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기능의 산물로 보았다. 샤프츠베리의 후계자 허치슨(F. Hutcheson)은 미적 감각을 도덕감각으로부터 분리하여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지각현상으로 보았다. 18세기 중반의 버크(E. Burke)와 홈즈(H. Homes)를 거쳐 흄에 이르러 예술경험은 극단적인 주관주의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흄에게 아름다움이란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다만 지각하는 정신의 작용에 불과했다.
ㄴ) 18세기 후반 독일의 칸트는 영국과 독일의 이론들을 종합했다. 그에게 미적 경험은 취미(taste; Geschmack)는 선험적인 논리에 따르는 경험적 인식능력과 달리 개념화할 수 없는 주관적인 쾌의 감정 이지만, 동시에 주관에 주어진 자연의 합목적성(Zweckmaessigkeit)이라는 선천적인 원리에 의해 작용한다. 즉 미적 판단은 쾌/불쾌의 감정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합목적성이라는 질서에 따라 경험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칸트는 예술경험의 주관성과 객관성을 보장하려고 시도했다.
e) 칸트 이후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예술경험을 무관심한 관조를 통해 실제적 목적 없이 대상 자체에 몰입할 때 일어나는 주관에로의 객체의 수동적 충만으로 설명함으로써 현대적 관조이론(contemplation theory)을 제시했다.
ㄷ) 20세기에 들어와서 예술경험의 이론은 더욱 다양해 진다. 미적경험을 심리적 기본요소로 환원시키는 분트심리학으로부터 크로체의 합리적 직관이론, 랑에나 폰 하르트만의 환상(가상)이론, 로체나 맆스의 감정이입(Einfuehlung)이론, 쇼펜하우어를 이은 퀼페나 듀카스의 관조이론, 전체적 지각체계의 경험으로 미적경험을 설명하는 게슈탈트심리학, 아브라모프스키나 발레리의 감정도취(euphoria)이론 등의 이론이 제시되었다.
제2강. 예술의 성경적 이해
1. 성경적 모델
1) 긍정적 모델
ㄱ) 유발의 음악과 악기의 제작(창 4: 21)
ㄴ) 제사장의 의복장식(출 28: 15-21)
ㄷ) 브사렐/오홀리압에 의한 성막건축(출 31: 1-11)
ㄹ) 후람의 성전건축(왕상 7: 15-22)
ㅁ) 에스겔의 이상(겔 1: 5-14, 26-28; 41: 17-20)
ㅂ) 성전 완공 때의 음악(대상 9:33, 15: 16, 23: 5, 시 150: 3-5)
2) 부정적 모델
ㄱ) 바벨탑 (창11:3)
ㄴ) 아론의 금송아지상(출 32: 1-6, 17-24)
ㄷ) 새긴 우상에 대한 숭배(출 20: 4, 5; 사 44: 9-20)
2. 성경적인 예술의 원리
1) 예술의 원리(168-169쪽)
ㄱ) 예술은 하나님 뜻 안에 있다. 예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히 8: 5)
ㄴ) 예술가의 직업(vocation)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천직이다
ㄷ) 예술적 재능은 하나님의 특수한 은사(gift)이다.
ㄹ) 하나님의 절대성과 예술양식의 유한성(변화성)(206쪽)
ㅁ) 성육신의 원리(260쪽):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가 되신 것처럼 하나님의 비가시적 영광을 가시적으로 표현함.(참고: 성상논쟁)
2) 은사의 종류(출 35: 31)
ㄱ) 성령충만: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ㄴ) 재능: 그에게 충만케하여 지혜(ability)와
) 총명: 총명과
ㄹ) 지식: 지식으로
ㅁ) 솜씨: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ㅂ) 가르침: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3. 성경적 예술의 대안
1) 유일신적 추상주의: 기하학적 문양, 장식
2) 창조의 모방: 구상(표현)미술
3) 히브리적 상상력: 상징미술, 상징주의 문학-->초현실주의
4) 기독교적 상상력: 히브리적 전통과 그리스적 전통의 종합
제3강 칼빈의 예술이해
1.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문주의자(Humanist)였다. 칼빈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통해서 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조정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인문주의는 고대의 수사학 전통에서 유래되었다. 이 전통은 언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관습적 도구라는 점을 처음으로 간파한 프로타고라스, 수사학을 체계적인 교육학으로 정리한 이소크라테스를 거쳐 로마의 키케로(치체로), 퀸틸리안(퀸틸리아누스) 등에 의해 확립되었고 르네상스와 북유럽 인문주의자들(로렌쪼 발라, 쿠자누스, 로이힐린, 위클리프, 에라스무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인문주의는 고대의 문화유산을 로마 카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었고 종교개혁을 준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즉 인문주의는 성경 자체의 언어와 사상에로 돌아감으로써 기독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운동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칼빈은 프랑스 인문주의자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였고 에라스무스, 부데, 쯔빙글리, 부처로부터 성경해석과 신학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칼빈은 그의 저술에서 크리소스톰, 키프리안, 암브로스, 그레고리, 어거스틴 등의 교부들과 함께 키케로와 퀸틸리안, 호머(호메로스)와 버질(베르길리우스), 플루타크와 세네카를 인용했다. 실제로 칼빈은 1532년 에라스무스가 새로 출판한 세네카의 <온유에 관하여>(De Clementia)에 주석을 달라 자비로 출판하기도 했다.
2. 칼빈에게 언어는 “인간사회를 묶어주는 접착제”로서 인간성(humanitas)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정통했으며 성경해석에 대한 그의 수사학적 원리를 ‘간결’(brevitas)과 ‘용이’(facilitas)로 규정하면서 성경의 철학적이거나 우의적(allegorical) 해석을 피하고 성경언어의 단순하고 구체적인 파악을 중시한다. 또한 그는 인간의 특별한 감정들을 전달해 주는 언어의 능력을 중시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생생함을 표현해 주는 성경의 수사적 특성을 고려하는 해석을 시도했다. 따라서 그에게 ‘이것은 내 몸이다“(막 14: 22, 고전 11: 23)라는 주님의 말씀은 일종의 환유(metonymy)로서 성찬식의 떡(빵)이 실체로 변화하거나 단순한 언어적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실재(임재)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3. 『기독교강요』(Chriatianae Religionis Institutio)(1536/1559) 2권(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칼빈은 기독교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초자연적인 은사는 파괴되었고 자연적 은사도 부패되었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을 짐승으로부터 구별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제2장 12절). 즉 인간에게 주어진 선과 악,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는 이성의 판단력은 비록 약화되고 오염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칼빈은 모든 학문, 즉 예술(arts)과 과학(science)이 선천적인 하나님의 선물(God's gift)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예리한 능력은 예술과 과학을 배우는 데서 나타난다. . . 모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인정해야만 하는 이러한 선함은 여전히 보편적이다.”(제2장 14절) 뿐만 아니라 칼빈은 예술과 과학의 능력은 성령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가장 뛰어난 은사를 인간의 공동선을 위해 당신의 의지대로 누구에게나 나누어주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 . 인간의 삶에서 가장 뛰어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은 성령과의 교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제2장 16절) 이렇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이며 예술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재현하는 인간의 창의적 행위라고 칼빈은 보고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창 4: 20-21에서 유발에 의한 예술의 시작에 대해 감탄하면서 이러한 능력을 ‘성령의 뛰어난 선물’로 간주한다. 그는 비신자들의 학술과 예술에도 하나님의 은사가 나타나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을 이용하도록 권장한다.(제2장 16절)
4. 그러나 칼빈은 동시에 이러한 인간의 은사가 인간을 뒤덮고 있는 죄와 무지 때문에 효과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칼빈은 예술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되려면 자기애와 야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선함과 사회공동체에서의 책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예술이 이 원리를 무시할 때 하나님 대신에 다른 대상을 경배하는 우상숭배에 빠진다고 보았다.
5. 칼빈은 건축이나 예배에서 외적인 미보다도 내적인 거룩함(holiness)의 미를 존중했다. 회화나 조각의 표현에도 어떤 제한이나 금지를 두지 않았지만, 자연에 들어있는 창조의 법칙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그는 십게명의 제2계명을 이유로 조각을 부정하는 생각을 맹목적 편견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진지성, 조화, 기쁨을 표현하는 음악을 창조적인 음악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가대만이 부르는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 같은 고정된 성가(Catus firmus) 대신에 그 당시의 대중의 선율을 채용하여 회중 전체가 부르는 시편찬양을 작곡하게 했다. 그러나 칼빈은 고도의 기교보다는 단순한 표현방식을 선호했다. 한 예로 1541년 칼빈을 따라 제네바에 와서 시편찬송을 지은 로와스 브르조아(Loys Bourgeois)가 다성적인 시편찬송을 더 많이 채용하려고 하자 칼빈은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제4강 카이퍼의 예술이해
1. 칼빈의 예술관을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가 화란(네델란드)개혁교회의 신칼빈주의자(Neo-Calvinist)이며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의 설립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이다.
카이퍼는 그의 저서들인 『거룩한 신학의 백과사전』(Encyclopaedie der Heilige Godgeleerdheid), 『일반은총론』(Gemeene Gratie), 『왕을 위하여』(Pro Rege), 『예술에서의 칼빈주의』(Calvinisme en Kunst)에서 일관되게 세계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을 강조했다.
2. 카이퍼는 인간의 생명력이 외부 세계로 표현되는 방식을 지적, 윤리적, 종교적(신앙적), 미적 영역의 4가지로 나누면서 이러한 영역들의 통일은 오직 생명의 근원 자이시고 무한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예술적 표현 역시 무한 자로부터 오는 특별한 충동과 영감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예술의 가장 풍부한 원천은 종교이다. 원시 예술이나 고대 그리스의 건축이나 회화, 공예 등의 조형예술에는 항상 종교가 개입되어 있었다. 비록 그들이 궁극적인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종교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이유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있다: “하나님이 창조를 끝내고 나서 모든 사물을 보았을 때, 모두 보기에 좋았다. 모든 사람의 눈이 닫혀지고 귀가 막혀지더라도 미(美)는 여전히 미이며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미를 보고 들으신다. 왜냐하면 최초의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뿐만 아니라, 그 분의 ‘신성’ 또한 피조물 속에 영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Kuyper, Lectures on Calvinism, 1931, 156). 그러므로 예술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美)을 감각하고 느낀 것을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영감을 통해 표현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의 불변하는 기초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3. 카이퍼는 서양예술의 역사를 종교와 예술이 밀접한 관계로부터 점진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은총의 빛에 의해 형성된 위대한 예술은 종교와 관련되어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에 의해 확립된 생동감 있고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이고 풍부한 예술은 바로 종교적 예술의 전형적인 예이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대로 예술(음악)이 유발에 의해 시작된 이후 예술은 종교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겪어 왔다. 그러나 예술의 종교적 원천을 무시한 로마의 예술은 그리스의 모방에 그쳤고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창조적인 예술양식을 산출해내지 못했다. 근대 이후 많은 예술은 종교적 영감의 원천과 단절된 양식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에 오늘날의 예술의 문제가 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는 일반적으로 예술이 죄로 오염된 세상 속에서 더 높은 실재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있음을 인정한다: “예술은 칼빈주의자에게 다음의 사실을 제시한다: 일찍이 놀랄만큼 아름다웠던 창조의 폐허 옆에서 예술은 아직도 남아있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경륜과 그 이상의 것, 즉 최고의 예술가이며 건축가이신 하나님이 언젠가 본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하고 높이실 휘황찬란한 회복을 향하게 한다”(Ibid., 155). 카이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뜻에 따라서 이러한 은사를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부여해 주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이러한 일반적 예술의 재능을 개혁주의가 더욱 장려하고 기독교 문화형성에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역사적으로 칼빈이 유명한 교회음악가 팔레스티나의 스승인 구디멜(Goudimel)이나 브르조아와 같은 음악가와 동역 했던 사실과 화란 개혁교회가 렘브란트나 베르메르 같은 훌륭한 화가들을 배출했던 사실을 예로 든다. 비록 순수한 의미의 ‘기독교 예술’은 신앙인 만이 창작해 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비신자들의 예술을 배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고 기독교적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제5강 프랜시스 쉐퍼의 예술이해
1. 쉐퍼는 그의 글 <예술과 성경>에서 그의 기독교 예술신학을 전개한다. 먼저 그는 제1장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술”에서 성경적 예술관을 정리하고 있다. 쉐퍼에게 성경적 예술관의 출발점은 창조세계 전체와 인간 전체(전인)에 적용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주권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이나 영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과 인간의 육체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칼빈의 신학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인용하면서 죄로 타락한 인간이 자연과 자신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지만, 이러한 상실을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한편으로는 종교와 신앙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과학에 의해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따라서 쉐퍼는 예술과 과학이 삶의 지엽적인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술작품과 더 넓게는 예술활동이 하나님께 대한 영광송(송영)이 될 수 있다고 이해한다.
2. 쉐퍼는 출애급기 20장 4-5절과 레위기 26장 1절의 말씀을 “성경이 조형예술 작품을 금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이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섬기는 것, 특히 예술을 하나님 이상으로 섬기는 것을 반대하는 것”(II, 408)으로 본다. 따라서 에술작품이나 예술을 ‘숭배’하는 태도가 잘못이지, (어떤 대상이건 간에)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는 성전예술을 구체적 사례로 든다. 하나님께서는 실용적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과 보석으로 꾸민 그룹(천사)형상이나 웅장한 기둥과 사슬과 석류모양으로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거대한 놋바다를 바치는 12마리의 청동소를 만들도록 하셨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름다움(우아함, 휘황찬란함, 웅장함)을 통해 거룩함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이 모세의 놋뱀을 부순 것처럼(왕하 18: 4) 예술작품이 숭배의 대상이 될 때 그 아름다움을 오히려 거룩함을 파괴한다.
3. 또한 쉐퍼는 성경에서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세속예술을 발견한다. 그 예로 상아와 금과 사자로 치장된 솔로몬의 보좌(왕상 10: 18-20)는 다윗의 왕권의 힘과 권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이러한 세속예술을 창조하는 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고 본다. 인간의 전인적인 아름다움(신체, 성, 감성, 지성, 영성)을 표현하는 시와 음악과 연극과 춤, 회화와 조각(그리고 오늘날은 영상예술)은 영적인 세계보다 열등하지 않은, 하나님의 진리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일 뿐 아니라, 요한계시록 15: 2, 3에서처럼 천국에서도 지속된다.
4. 쉐퍼는 고급(클래식)예술뿐만 아니라, 대중예술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감상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11가지로 제시한다.
1)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술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재현이기 때문이며 둘째, 예술작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피조물로서의 인간다움과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만 존립하지도 않으며 특정한 메시지의 선전수단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세계관을 함께 보여준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그의 삶과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다.
2) 예술양식은 그것을 통해 표현된 세계관을 강화시킨다. 다른 말로 하면 각각의 예술양식은 독자적인 특징이 있고 그 특징들은 작품의 내용에 담겨있는 세계관과 친화성 내지는 거리를 가진다.
3) 모든 예술은 의사소통의 조건으로서 공통의 문법이나 상징형식을 사용할 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4) 예술이 그 안에 담겨진 세계관을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예술가의 메시지의 진리성은 미학이 아닌 다른 근거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5) 예술작품 자체의 판단기준으로는 ⓛ 기술적 탁월성, ② 타당성(상업성과 분리된 진지성, 독자성) ③ 지적내용(세계관)의 적합성(기독교 세계관을 표현하는 신앙인 예술가), ④내용과 방법의 통합성을 들 수 있다.
6) 예술양식은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7) 예술양식과 스타일은 변한다. 이러한 변화와 다양성은 생명현상의 표현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술은 시대와 나라마다 다르다.
8) 예술의 스타일(양식)이 세계관이나 메시지를 위한 상징표현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처음부터 경건한 스타일이나 불경건한 스타일 자체는 따로 있지 않다. 엘리엇은 신앙인이 되기 이전의 <황무지>의 형식을 신앙인이 되고서 쓴 <동방박사의 여행>에서 채용하여 메시지에 적합하게 변형시켰다.
9) 작품 속의 기독교 세계관의 성격은 단조(비극)와 장조(희극)로 구분될 수 있으나 궁극적인 희망(장조)로 끝난다. 그러나 표현의 과정 중의 단조는 작품의 깊이를 준다.
10) 기독교 예술이 반드시 종교적(성경적, 신앙적)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기독교 예술은 그리스도인의 정인적 삶 전체를 표현한다. 여기에는 예술가의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의 자유가 작용한다.
11) 한 작품이 예술가의 정신과 세계관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가는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그의 신앙적 삶을 표현한다. 예술의 목적은 삶이다.
5. 쉐퍼는 <이성으로부터 도피>에서 서양문화사의 구조를 상층부의 ‘계시’와 하층부의 ‘자연’으로 구분하고 점차로 상층부의 ‘계시’를 다른 것(이성, 허무, 계시없는 영성)으로 바꾸어 온 역사로 파악했다. 그는 특히 아방가르드 이후의 현대 예술이 계시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절망, 허무, 계시없는 신비를 대신 추구했다고 비판한다.
제6강 예술과 사회
“세상에는 사랑타령 말고도 중요한 게 있다”(밥 딜런: 1970년대 말 회심)
1. 예술은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의 산물이고 사회와 관계 지울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예술가와 그의 작품은 사회적 산물이므로 사회적 관계와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19세기의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라는 구호를 내건 예술지상주의와 낭만주의에 반발하면서 과학적 사고를 예술에 도입하고자 했던 사실주의(Realism)라는 두 입장이 대립했다.
2. 예술지상주의는 예술의 자율성을 신봉한다.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테오필 고띠에(Th. Gautier)는 “예술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예술이 어떤 유용성이나 도덕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스스로의 기질과 느낌과 이상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예술적인 실험을 할 수 있을 때, 결과적으로 예술이 아니면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사회에 준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월터 페이퍼는 인간의 지혜 중에서 “시적 정열, 미에 대한 욕망, 예술자체를 위한 예술에 대한 사랑” 만이 부르조아 사회에 활기찬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19세기의 사실주의는 예술을 일종의 과학으로 보았다. 에밀 졸라에게 영향을 주었던 텐느(H. Taine)는 문학작품을 작가의 고독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당대의 관습의 사본’이기 때문에 가장 가치있는 작품은 사회를 투명하고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플로베르(Flovert), 공쿠르(Goncourts), 졸라(Jola)에게 계승되어 그들은 사회의 선과 악을 마치 실험실에서 설탕물과 황산염을 분리하듯이 예술로써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졸라는 부르조아 사회의 부도덕성을 예리하고 냉정하게 그려낸다. 그에게는 예술작품의 구조나 형식을 완성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사회를 있는 그대로 과학자의 초연함을 가지고 냉정하게 그려내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었다. 그에게는 외설적인 묘사나 표현도 이러한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4. 반면에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사람들로는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인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과 실증주의자 꽁트, 영구의 존 러스킨, 러시아의 톨스토이 등이 있다. 생시몽은 가장 바람직한 예술을 ‘(사회적) 진보를 위한 예술’에서 보았다. 꽁트 역시 예술의 역할을 인간 상호간의 공감과 유대를 강화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했던 톨스토이는 진정한 예술작품의 생산을 위한 조건으로서 표현의 분명성과 같은 형식미와 함께 주제에 대한 진지하고 도덕적인 태도라고 보았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특정인들에게 쾌감을 제공해 주는 요소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함께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완전을 향해 나가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5. 예술의 자율성(독자성)과 사회성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예술형성과 평가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 개인도 자율성과 사회성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을 평가하는 미학 역시 두가지 원리를 서로 다르게 강조하는 이론이 있다. 예술은 창작자의 의도와 예술적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또한 예술은 사회적 요구나 상업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중예술일수록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예술은 자율성과 사회성 가운데 어느 하나의 원리만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예술은 개인의 독자적 창작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다. 한 예술가의 그 시대의 상황으로부터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그 시대의 예술적 경향과 기법을 배운다. 또한 그렇게 산출된 예술은 그것이 사장되지 않는 한,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영향을 끼치는 범위와 양상은 다를 수 있지만, 예술도 사회현상의 하나이다. 따라서 예술도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예술에 대한 모든 종류의 비평과 언급들은 그 예술에 대한 사회적 반응인 셈이다. 물론 예술 작품을 윤리적 기준 하나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지만 예술이 인간성 - 인간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존엄성 -을 무시할 때, 우리는 그러한 예술을 비판하고 거부할 수 있다.
6. 오늘날 예술의 사회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산-텍스트-청중의 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즉 예술의 생산이 어떤 경제적, 제도적 맥락에서 일어나며 어떻게 예술작품의 텍스트가 구성되며 이렇게 구성된 텍스트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청중에게 수용(소비)되는 가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예술이 만들어지는 조건과 필요를 파악하고 나서 구체적인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이 항상 동일하게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성격과 사회적 상황이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사회학적 분석은 오늘날의 복합적 예술이해에 도움을 준다.
제7강 예술과 사회
“세상에는 사랑타령 말고도 중요한 게 있다”(밥 딜런: 1970년대 말 회심)
1. 예술은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의 산물이고 사회와 관계 지울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예술가와 그의 작품은 사회적 산물이므로 사회적 관계와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19세기의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라는 구호를 내건 예술지상주의와 낭만주의에 반발하면서 과학적 사고를 예술에 도입하고자 했던 사실주의(Realism)라는 두 입장이 대립했다.
2. 예술지상주의는 예술의 자율성을 신봉한다.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테오필 고띠에(Th. Gautier)는 “예술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예술이 어떤 유용성이나 도덕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스스로의 기질과 느낌과 이상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예술적인 실험을 할 수 있을 때, 결과적으로 예술이 아니면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사회에 준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월터 페이퍼는 인간의 지혜 중에서 “시적 정열, 미에 대한 욕망, 예술자체를 위한 예술에 대한 사랑” 만이 부르조아 사회에 활기찬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19세기의 사실주의는 예술을 일종의 과학으로 보았다. 에밀 졸라에게 영향을 주었던 텐느(H. Taine)는 문학작품을 작가의 고독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당대의 관습의 사본’이기 때문에 가장 가치있는 작품은 사회를 투명하고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플로베르(Flovert), 공쿠르(Goncourts), 졸라(Jola)에게 계승되어 그들은 사회의 선과 악을 마치 실험실에서 설탕물과 황산염을 분리하듯이 예술로써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졸라는 부르조아 사회의 부도덕성을 예리하고 냉정하게 그려낸다. 그에게는 예술작품의 구조나 형식을 완성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사회를 있는 그대로 과학자의 초연함을 가지고 냉정하게 그려내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었다. 그에게는 외설적인 묘사나 표현도 이러한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4. 반면에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사람들로는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인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과 실증주의자 꽁트, 영구의 존 러스킨, 러시아의 톨스토이 등이 있다. 생시몽은 가장 바람직한 예술을 ‘(사회적) 진보를 위한 예술’에서 보았다. 꽁트 역시 예술의 역할을 인간 상호간의 공감과 유대를 강화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했던 톨스토이는 진정한 예술작품의 생산을 위한 조건으로서 표현의 분명성과 같은 형식미와 함께 주제에 대한 진지하고 도덕적인 태도라고 보았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특정인들에게 쾌감을 제공해 주는 요소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함께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완전을 향해 나가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5. 예술의 자율성(독자성)과 사회성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예술형성과 평가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 개인도 자율성과 사회성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을 평가하는 미학 역시 두가지 원리를 서로 다르게 강조하는 이론이 있다. 예술은 창작자의 의도와 예술적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또한 예술은 사회적 요구나 상업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중예술일수록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예술은 자율성과 사회성 가운데 어느 하나의 원리만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예술은 개인의 독자적 창작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다. 한 예술가의 그 시대의 상황으로부터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그 시대의 예술적 경향과 기법을 배운다. 또한 그렇게 산출된 예술은 그것이 사장되지 않는 한,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영향을 끼치는 범위와 양상은 다를 수 있지만, 예술도 사회현상의 하나이다. 따라서 예술도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예술에 대한 모든 종류의 비평과 언급들은 그 예술에 대한 사회적 반응인 셈이다. 물론 예술 작품을 윤리적 기준 하나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지만 예술이 인간성 - 인간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존엄성 -을 무시할 때, 우리는 그러한 예술을 비판하고 거부할 수 있다.
6. 오늘날 예술의 사회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산-텍스트-청중의 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즉 예술의 생산이 어떤 경제적, 제도적 맥락에서 일어나며 어떻게 예술작품의 텍스트가 구성되며 이렇게 구성된 텍스트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청중에게 수용(소비)되는 가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예술이 만들어지는 조건과 필요를 파악하고 나서 구체적인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이 항상 동일하게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성격과 사회적 상황이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사회학적 분석은 오늘날의 복합적 예술이해에 도움을 준다.
제8강 예술과 성(性)
1. 성(Sex)은 주로 시각예술과 문학에서 주제가 되어왔다. 문제는 예술이 어떻게 그리고 왜 성을 표현해 왔는가, 그리고 개혁주의 예술신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예술적 성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이다. 먼저 역사적 고찰을 해보자.
2. 최초의 예술적 성 표현은 가슴과 둔부를 과장되게 표현한 석기시대의 여성조각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남(여)근석 등도 이와 유사하게 다산에 대한 염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3. 서양의 시각예술의 발생지인 고대 그리스에서는 초기(B.C. 5-6세기)의 도자기나 사티로스 조각에 노골적인 성행위가 표현되어있으나, 고전시대(B.C.4-2세기)에는 남성의 누드상과 여성의 반누드상이 보다 예술적으로 표현되었다. 그 후 헬레니즘과 로마시대에는 다시 좀더 선정적이고 제의적인 성 표현이 발달하였다.
4.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후 억제되었던 누드표현은 비로소 14세기의 지오토의 <최후의 심판>(1310)에서 나타나는데 이 때의 누드는 지옥의 형벌이나 육체적 쾌락의 비참함을 표현하기 위한 중세적인 수단이었다.
5. 이탈리아에 르세상스가 시작되면서 15세기 후반부터 고대 그리스의 신화나 특정한 정신적 주제를 알레고리로 표현하면서 누드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보티체리의 <비너스의 탄생>(1478)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세속적 쾌락의 정원>(1485)은 중세적 요소와 르네상스적 요소를 함께 표현했고 16세기의 라파엘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대가들과 그 후계자들인 코레지오, 틴토레토, 브론치노, 장 구종, 스프랑게르, 반 하를렘에 의해 그리스적 신화와 구약의 내용이 생동감 넘치고 관능적인 누드화로 그려졌다.
6. 16세기가 끝나가면서(1590년대) 유럽의 시각예술은 바로크라는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제 17세기의 화가들은 매너리즘화 되어있는 신화적 환상에서 탈피하여 현실의 세계를 자신의 감각에 따라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탈리아의 코레지오와 카라바지오, 독일의 뒤러와 크라나하, 스페인의 벨라스케즈, 화란의 루벤스와 렘브란트는 개성적이면서 사실적인 관능미를 표현했다.
7. 18세기에는 프랑스의 화가들이 에로틱 장르를 계속 발전시켰다. 와토, 그뢰즈, 보두앙, 베스티에, 부셰, 프레고나르 등의 화가는 그 당시의 프랑스 루이 왕조의 궁정과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한편 18세기 후반 인간의 격렬한 감정과 환상에 몰두하는 낭만주의가 대두되면서 화가들은 성과 폭력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퓌셀리, 제리코, 고야, 들라크로와, 앵그르 등은 성적 복수, 강간, 살해, 노예매매를 주제로 에로티시즘과 새디즘적이 혼합된 성의 모습을 다루었다.
8. 19세기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에 따른 도시화의 시대였다.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도시빈민층이 형성되면서 하층여성들은 생계 때문에 환락가와 창녀촌에 몰려들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1860년경에는 최초의 누드사진이 등장했다. 모파상, 졸라.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등의 사실주의 문학가들과 보들레르 등의 영향아래 드가, 포랭, 툴르즈-로트렉, 루오 등의 화가가 하층 직업여성들의 몸과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르조아 사회의 외면적인 도덕주의와 실제 이루어지는 성의 현실을 사실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했다.
9. 19세기말과 20세기의 에로티시즘은 표현주의자이거나 초현실주의자인 롭스. 실레, 클림트, 뭉크, 피카소, 달리, 마그리트에 의해 전통적인 윤리와 관습을 넘어 왜곡․변형된 신체형태와 와 풍자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모더니즘 화가들은 비정상적인 성과 관능을 통해서 그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정신적 폭행(충격)을 가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을 주제로 한 커비, 시카고, 셔먼, 쿤스, 메이플도프, 뒤로, 세라노의 회와나 사진들은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이성과 동성, 정상적 성과 비정상적 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0. 지금까지 예술에 표현된 성의 역사를 살펴본 결과는 무엇인가? 예술의 성 표현은 그 시대의 성에 대한 가치(신앙)관과 성의 현실(성의 억제와 개방,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관계, 사람들의 성 경험을 반영한다. 즉 에로틱 예술은 사회적 성의 현실을 긍정하든지, 부정․비판하든지 그 시대의 성 문제를 반영한다. 예술이 성을 표현하는 이유는 성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며 인간사회를 유지시켜주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서나 성은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금기와 윤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누드(에로틱) 아트는 ‘관음증’(Voyerism)에 호소한다. 누드아트의 대부분을 여성이 차지하는 이유도 작가와 관람자의 대부분이 남자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 이전의 누드아트는 이상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써 관음증을 충족시키려 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왜곡된 성 행동을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인간의 성이 단지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과 폭력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인간의 현실적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고자 시도했다.
11. 그렇다면 성에 관한 예술과 포르노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술(누드아트)은 신체의 관능적 미를 표현하되 대부분 직접적으로 성기를 노출시키거나 성행위를 묘사하지 않는다. 물론 포르노가 직접 성행위를 다루지는 않는 경우에는 누드아트와 거의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미세한 차이를 통해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목적을 구별할 수 있다. 즉 포르노는 모든 목적이 관람자의 성적 흥분유발에 있다. 따라서 인물의 표정, 동작, 색상이나 빛의 노출도 이러한 목적에 의해 통제․조작된다. 반면에 누드아트는 인물의 신체나 동작 전체와 배경의 관계를 중시한다. 그 결과 예술과 포르노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누드아트는 인간의 신체와 성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포르노는 성적흥분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관람자의 성 행동을 자극한다. 물론 누드아트도 성적 자극을 주며 관람자의 관음증을 이용한다. 포르노의 경우는 성기나 성행위 묘사의 목적이 상업적 성공과 직결되어 있다.
12. 누드아트를 포함해서 성을 표현하는 예술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예술은 인간의 삶의 근거 내지 본질로서 성을 부각시키거나 성(욕)이 낳는 고통과 갈등과 죽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즉 성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을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여주는데 있다. 이 예술의 한계가 바로 포르노이다. 포르노는 인위적으로 인간의 성 충동을 충족시키려는 시도이다. 예술은 항상 성 충동 충족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위기 속에서 성의 의미의 발견을 추구하고 있다. 개혁신학은 성에 대한 모든 표현을 금지하는가? 만일 아니라면 어디까지 허용하는가? 타락과 함께 인간에게 들어 온 성의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창조질서의 아름다움과 축복으로서의 성의 회복을 추구하고 표현하는 예술이 필요하다.
제9강 기독교와 음악
1. 기독교와 음악의 관계는 이미 구약시대부터 매우 밀접한 사이였다.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반대로 성전이나 왕궁건축을 제외하고는 회화, 조각 등의 시각예술을 제한해 왔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표현을 춤과 음악(성악 및 기악)을 통해 표현했고 그 증거를 구약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 15:20, 삼하 6:5, 대상 9:33, 시 9:11, 시 150). 신약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교회의 초기부터 찬송을 즐겨 불렀다( 행 2: 47, 16:25).
2. 교부시대에 교회음악(성가)에 관심을 보인 이는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이다. 그는 그의 『고백록』33장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성가를 통해 받은 감동을 고백하면서 성가의 유용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관은 인간의 감성적 즐거움보다는 가사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성가는 그레고리우스 1세 때 이르러 미사(예배)를 위한 성가의 형식으로 체계화된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하나의 선율로 된 단성성가이며 매주 같은 가사로 노래되는 5개의 미사통상문인 키리에(Kyrie), 영광송(Gloria), 사도신경(Credo), 거룩송(Sanctus),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성음악은 9세기 무렵 오르가눔(organum)이라는 형태로 시작되었는데, 기존 선율에 조화되는 일정한 음정을 낮추어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중화음을 만들었다. 이 오르가눔은 기존의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을 사용했고 12세기 이후 점점 복잡한 선율이 첨가되었다. 15세기에는 북부 프랑스(브루고뉴)의 작곡가인 뒤파이(Dufay)와 방슈아(Binschois)가 13세기부터 유행된 음악인 모테트(motet)를 발전시켜 불협화음을 사용하는 다성적 미사음악과 세속적인 샹송을 만들어 냈다. 16세기에는 교회의 순수 합창음악인 아카펠라(A Cappella)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르네상스 세속음악인 마드리갈(Madrigal)이라는 장르가 발달했고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한 가톨릭의 종교음악인 다성적 미사음악을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525-1594, 찬송가 156)가 완성하게 된다. 그는 다성음악에서 각 성부의 선율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잘 어울리게 하는 규칙인 대위법(counterpoint)을 창안했다. 가톨릭교회의 음악은 18세기에 이르러 모차르트(1756-1783), 하이든(1732-1809), 베토벤(1770-1827)에 의해 세련된 미사곡, 오라토리오, 소나타의 형식으로 발전한다.
3. 개신교의 교회음악은 루터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오래된 그레고리오 성가나 독일 민요의 선율을 바탕으로 모든 회중이 부르는 4성부의 찬송가인 코랄을 작곡했다. 반면에 쯔빙글리나 칼빈은 단성적인 시편찬송을 선호했다. 음악과 악기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 때문에 루터교회에는 이탈리아의 바로크음악에서 시작된 (기악과 합창을 결합한) 오라토리오와 그보다 짧은 칸타타가 발전했다. 헨델(1685-1759)과 바하(1685-1750)가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개혁교회에서는 개혁파 경건주의 목사 요아힘 네안더(1650-1680)가 다성음악을 다시 도입하여 찬송가를 작곡했다(찬송가 21, 250) 영미의 찬송가는 아이작 와츠(1674-1748)가 자신의 찬송시를 제네바의 찬송곡에 붙인 데서 시작하여 웨슬리 형제와 죠지 휫필드의 부흥운동과 함께 발전했다. 영국의 부흥운동을 이어 미국에서도 부흥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면서 대중적인 가스펠이 블리스, 생키, 크로스비에 의해 작시, 작곡되었다. 한국에 소개된 많은 찬송가가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흑인의 전통적인 영가(spirituals)도 흑인(블랙) 가스펠로 발전했다. 19세기의 가스펠에 칸트리 음악을 결합한 서던(백인) 가스펠은 1950년대에 유행하다가 1960년대에는 록음악을 요소를 수용하여 오늘날의 C.C.M.으로 발전했다.
4.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물음은 주로 기독교 음악의 정체성과 다양성의 문제이다. 과연 어떤 음악이 기독교 음악인가? 전통적으로 기독교음악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를 표현해 왔다. 경건주의와 부흥운동 이후 개신교 음악은 신자의 신앙의 정서를 강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종래의 가스펠이 현대대중음악의 기법을 사용하면서 CCM이라는 종교성과 세속성을 결합한 형태로 발전했다. 모든 종류의 세속음악의 기법을 기독교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모든 음악이 기독교 음악이 될 수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 공통 근거는 무엇인가? 기독교 음악에도 좋은(수준높은) 것과 나쁜(수준낮은) 음악이 있는가? 기독교 음악 중에서도 예배음악으로 사용될 수 있는 음악은 어떤 것인가? 예배찬송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기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음악이어야 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의 기쁨, 신자의 사명을 노래하는 찬송은 예배음악으로 적합하지 않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우리는 대답해나가야 한다.
제10강 기독교와 영화
1. 오늘날 문학, 음악, 무용, 미술, 건축 연극에 이어 ‘제7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영화는 대중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이자, 대중매체로 등장했다. 동시에 영화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수십만 명이 종사하는 거대한 다국적 복합(오락)산업이 되었다. 즉 영화산업은 자본-기획-제작-홍보-배급-극장이라는 다단계의 복합구조를 가진 산업이다. 한편의 영화는 감독과 배우, 촬영 및 조명기사 뿐만 아니라, 음악가, 광고대행사, 각종 캐릭터 상품을 동반하는 멀티미디어 복합체이다.
2. 영화의 역사는 1888년 에디슨이 영사기로 50피트 짜리 필름을 상영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1896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카페에서 <기차의 도착>이란 영화(활동사진)을 상영하자 관객들은 영화와 실재를 혼동하기도 했다. 1915년 경 부터는 극영화가 흥행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던 극영화는 1차대전과 함께 미국에게 주도권을 넘겨야만 했다. 유럽이 전쟁 때문에 영화생산을 현저하게 줄인 반면에 미국은 1917년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영화의 85%를 생산해 내었다. 이때부터 철저하게 미국의 관객의 취향에 맞춘 미국영화가 전 세계의 영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 1920년대 후반에는 독일과 러시아의 영화가 미학적으로 영향을 주었지만, 미국영화산업은 <재즈가수>(1927)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사운드(유성)를 도입함으로써 다른 나라의 경쟁을 따돌렸다. 이 때 파라마운트, 폭스, 골드윈, 유니버셜 등의 메이저 영화사가 설립되었고 영화 제작, 보급, 상영의 분야를 수직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사의 독점체계는 1948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로 무너지고 결과적으로 영화산업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컬러영화는 이미 1932년에 개발되었으나 테크니컬러사의 독점에 의한 고비용 때문에 1960년대 컬러TV가 등장하고 나서야 일반화되었다. 1950년대에는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등의 와이드 스크린의 개발이 가속화되었고 입체(3-D)영화도 개발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인터넷 영화가 등장했다.
3. 영화의 장르에는 서부극, 코미디, 뮤지칼, 만화영화, 드라마와 같은 전통적인 것부터 액션, 스릴러, 필름느와르, 섹스, 컬트, 전쟁, 호러, 페미니즘, 동성애 영화 같은 비교적 새로운 장르가 있다. 최근에는 장르사이의 혼합(퓨전)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4. 영화의 기본단위는 한 장면을 의미하는 ‘숏(shot)’과 이 장면의 틀을 의미하는 ‘프레임’(frame), 한 숏의 프레임내의 모든 요소를 지칭하는 ‘미장센’(mise-en-scene)이다. 1910년대의 러시아 감독 에이젠슈타인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숏을 결합한 ‘몽타쥬’를 통해 관객이 감독이 의도한 새로운 의미를 파악한다고 보았다. 50년대의 감독 앙드레 바쟁은 현실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숏 자체를 구성하는 것, 즉 미장센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중시했다. 여기서는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위치, 카메라 위치, 조명, 세트디자인, 카메라 렌즈의 딮포커스 등의 요소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바쟁은 한 숏에 카메라가 오래 머무는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들이 프레임을 분석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영화비평의 종류에는 미학적 분석비평, 작가주의 비평, 기호학적(구조주의)비평, 정신분석학적 비평, 이데올로기 비평, 페미니즘 비평 등이 있다. 미학적 분석비평은 영화를 구성하는 내용(이야기구성, 인물, 대사)과 형식(촬영, 조명, 색조, 편집, 음악, 녹음)의 상호관계와 조화를 분석한다. 작가주의 비평은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의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분석한다. 여기서 ‘독창성’과 ‘일관성’은 작가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기호학적 비평은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의미들의 구조와 기호로 분류하는 일이다. 정신분석학적 비평은 주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이다. 이 비평은 영화를 보는 행위는 영화를 보려는 욕망에서 나온다는 관점에서 영화를 이해한다. 따라서 관객은 어떻게 ‘대리참여’를 하는가, 또는 ‘관음증’을 자극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데올로기 비평에서는 영화가 표현하거나 억압하는 정치적인 관점을 분석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한 사회나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비평은 이데올로기 비평의 하나로서 영화를 남성지배의 표현으로 파악하고 그 내용을 분석한다.
6. 기독교 영화란 무엇인가? 고전적인 <시골 사제의 일기>, <벤허>나 <쿠오바디스>, 80년대 이후의 <불의 전차>, <미션>, <로메로>, <어둠 속의 외침>과 90년대의 <데드맨 워킹>, <바베트의 만찬>, <사이먼 버치>를 떠올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나 내용을 다루었어도 그 메시지에 기독교적인 신앙의 가치관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영화는 작가(감독)의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기독교를 다룬 모든 영화가 순수하게 기독교적이지는 않다. <벤허>나 <쿠오바디스>처럼 호교적이면서도 철저히 대중적 영웅주의의 요소를 결합하는 영화도 있으며 <할렐루야>나 <박하사탕>에서처럼 기독교인의 모습을 풍자하거나나 어둡게 그린 영화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처럼 폭력을 주제로 삼았지만 기독교적 의미을 제시해 주는 영화도 있다. 즉 기독교 영화는 <예수>나 <낮은 데로 임하소서>와 같은 선교영화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세계)관을 담은 영화를 기독교적 영화라고 할 수 있다.
7. 기독교 영화비평은 기독교적인 작품을 분석할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적인 또는 반기독교적인(뉴에이지, 유물론, 허무주의 등) 작품을 성경적 신앙의 관점에서 분석, 평가할 수 있다. 이 때 영화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다른 비평이론의 기준을 참고할 수 있다.
8. 기독교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한 시대나 사회의 기독교 문화수준의 표현이며 중요한 선교적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나 기독교인들의 재정적 후원이나 투자도 중요하지만, 좋은 기독교인 작가(평론가)와 감독을 양성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교회에서 영화에 대한 신앙적 감상이나 실기에 대한 교육의 기회를 만듦으로써 다음 세대의 영상전문인을 키워야 한다.
제11강 기독교와 문학
1.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지은이의 상상과 감정을 통해 읽는 이의 상상과 감정에 호소하는 글자에 의한 예술활동의 총칭”(허웅/박지홍) 또는 “정서,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어서 언어 또는 문자로써 표현한 예술작품”(이희승)이라고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들에 따르면 문학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이 세계와 인간의 삶의 모습과 의미를 언어로서 표현하는 작업이다. 문학이 세계와 삶의 경험을 언어로 재구성할 때, 필연적으로 언어적 상징을 사용된다. 왜냐하면 세계 내의 모든 사실은 인간의 시각적이고 언어적 상징을 통해 해석되어 표현되고 이러한 상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해석으로부터 출발하여 해석으로 귀결되는 순환 속에 있다.
2. 기독교 문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문학의 두가지 조건은 기독교인 작가와 쓰여진 작품의 기독교적 내용(메시지)이다. 먼저 기독교인 작가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점이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다. 18세기 이전의 서양 작가들은 그들이 살았던 기독교적 환경 때문에 대부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엄격한 기준에서 볼 때, 분명치 않은 경우도 많다. <실락원>을 쓴 존 밀턴은 분명히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기독교인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주홍글씨>의 나타나엘 호손은 청교도의 후손으로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상징을 심오하게 사용한 <백경>의 허만 멜빌이 기독교인인지는 불확실하다. 두 번째로 작품의 내용 자체가 복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을 때 기독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 작가가 쓴 글이라고 해서 반드시 신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며 비기독교인도 기독교 이념을 담은 글을 쓸 수 도 있다. 한 예로 오스카 와일드의 <이기적 거인>은 어린이들의 이기성을 경고하고 예수님의 죽음의 비이기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와일드는 기독교인이기 보다 탐미주의자이고 동성애자였다.
3. 문학에는 시와 소설, 논픽션, 희곡 등의 장르가 있다. 시(Poem)는 가장 오래된 문학 형식이며 모든 문화에 존재했다. 전통적으로 서정을 담은 노래는 시(lyric)였다. 인쇄기술이 발달하면서 시와 음악이 분리되고 시를 낭송하지 않고 조용히 읽게 되면서 운율도 자유롭게 되었다. 서사시(epic)는 고대로부터 신이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문학에서 기독교인 시인은 조오지 로버트, 존 던, T. S. 엘리어트 등이 있다. 소설(fiction)과 넌픽션(nonfiction)은 포함하는 산문은 삶을 이야기하려는 우리의 욕망에서 나온다. 소설은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의 재미를 준다.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는 줄거리(plot)과 인물(character)과 배경(setting)이다. 기독교 소설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으로부터 찰스 디킨즈를 거쳐 플래너리 오코너, 매들린 랭글, 워커 퍼시, 월터 웽거린 등의 최근작가가 있다. 넌픽션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산문으로서 신문, 잡지. 학술서, 에세이, 논문 등의 글이 여기에 포함된다. 좋은 넌픽션은 상투어나 불필요한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투명하고 명료해서 저자의 뜻을 쉽게 알게 하는 글이다. 또한 좋은 넌픽션은 재미있다. 기독교 작가로는 C. S. 루이스, 필립 얀시, 버지니아 스템 오웬스 등이 있다.
한국의 기독교 문인으로는 윤동주, 김현승, 황금찬, 정호승 등의 시인과 조성기(야훼의 밤, 실직자 욥의 묵시록), 윤흥길(빛가운 데로 걸어가면), 김성일(땅끝에서 오다, 제국과 천국, 바깥 사람들) 등이 있다.
4. 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mode)으로는 비극(tragedy), 희극(comedy),, 사실주의(realism), 공상문학(Fantasy) 등이 있다. 비극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문학의 최고봉(아리스토텔레스)으로 인정받았다. 비극은 고귀한 성품을 가진 영웅의 행동을 모방하여 묘사한다. 비극의 목적은 그러한 영웅들에게도 치명적인 결함인 ‘오만’의 죄(하마르티아, 휘브리스)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웅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관객)은 정신적 정화(카타르시스)를 얻는다고 보았다. 반대로 희극은 비천한 인물들의 부도덕한 행동을 파헤치고 풍자함으로써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절망적인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는 그리스의 희극과는 달리 단테 이후의 기독교적 희극은 구원의 메시지에 의해 해피앤딩으로 끝난다. 사실주의 문학은 외부세계(인간의 본성, 사회적 모순)를 그대로 비추는데 관심을 가진 ‘거울로서의 문학’이다. 가장 뛰어난 기독교 사실주의 작가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레이엄 그린, 존 업다이크 등이 있다. 반면에 공상문학은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일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세계를 그려준다. 스위프트, 번연, 맥도날드, 톨키엔, 루이스 등의 뛰어난 기독교 작가들이 공상문학가였다. 훌륭한 공상문학은 허구를 통해 도덕적 감수성과 영적 진실을 표현한다.
5.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작가들의 글만 읽는다면, 넓은 바다와 같은 문학의 풍부함과 다양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도 다양한 문학에 접하고 비평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를 장려하며 폭력과 허무주의를 긍정하는 내용이다. 또한 성욕을 자극하기 위한 노골적인 성표현은 작품의 예술성과 도덕성을 저하시킨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좋은 문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인간의 본질(사랑, 욕망, 복수심, 용서)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보다 대중적인 스릴러, 공상(과학)소설에도 가치있는 작품들이 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작품을 선별해서 읽음으로써 우리의 삶의 세계를 확장해주는 ‘대리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책들에 내재한 세계관과 가치들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반성해 나가야 한다.
참고서적:
수잔 갤러거/로저 런든, 『신앙의 눈으로 본 문학』, IVP
진 에드워드 비이스, 『그리스도인에게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침반
노드롭 프라이, 『성서와 문학』, 숭실대 출판부
추태화, 『기독교 영성에 비추어 문학 새롭게 읽기』, 기독교연합신문사
레먼 샐든, 『현대문학이론』, 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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