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찰] 도덕과 욕구라는 이름의 두 카드
2005.4.6. 수요일 딴지 성생활규제개혁위
스와핑, 진짜 심각한가? 일단 이 질문부터 하자. 스와핑이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반화된 현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스와핑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극히 일부에게만 국한된 현상이라면 이것은 그냥 특수한 사례로 보는 것이 맞다. 통계를 내 보면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후자에 가깝다. 보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스와핑 인구는 2-3천 명 정도라는데, 2000년 기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30세에서 44세사이의 인구가 약 1천 2백만 명이므로 그중 0.002% 내외라는 얘기다. 찌라시성 언론들의 선정적 보도로 부풀려져서 그렇지,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본능과 보편적인 심리에 비추어 봤을 때 스와핑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사랑을 구성하는 심리적 요소들, 특히 그 중에서도 성욕은 자기 파트너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려는 욕구 자체이다. 그런데 그 욕구를 되살리기 위해서 남의 파트너와 자기 파트너를 교환한다? 이건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심리적으로는 모순이다.
혹여 스와핑을 통해 받은 자극으로 파트너에 대한 욕구가 되살아났다고 치자.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미 저질러진 스와핑이 이제 문제가 되고 파트너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이 뒤따를 공산이 크다. 욕구를 살리기 위해서 스와핑을 했다지만, 되살아난 욕구는 그 스와핑을 문제로 삼는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지기 쉽상인 것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불륜과 스와핑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사실 논리적/이성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본능적/심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스와핑 자체의 특성이자 매력이다. 어떤 문화권에서든 '인간은 감정보다는 이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는 믿음이 강한 시기나 집단에서 스와핑이나 그와 비슷한 행동이 일종의 유행처럼 나타나곤 했다. 현대 들어와 처음 시작했다는 미국이 그랬고, 그 미국을 따라한 일본이 그랬다. 유럽에서 사르트르와 보브와르가 주장했던 계약결혼도 결국 비슷한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스와핑 커플들이 비교적 학력이 높고 소득수준도 높은 층인 이유도 아마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 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로 쿨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필부필부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을 따르는 존재들이다. 적어도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스와핑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안의 1997년작 <아이스 스톰>에서도 그렇고, 큐브릭의 1999년작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나름 쿨하다는 주인공들도 결국 체질에 맞지 않아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스와핑 논쟁 속에는 스와핑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스와핑을 찬성하지는 않더라도 변호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섹스는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고, 스와핑은 합의에 의한 섹스일 뿐인데 그것을 남들이나 국가가 간섭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개인 자유의 침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주장하고 말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섹스가 개인적인 활동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자. 어떤 사회가 규범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 규범의 존재를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늘상 접하는 활동을 건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먹고 싸는 일이고, 돈과 명예, 권력에 관한 일들이다. 사회 규범의 구속력은 바로 이런 활동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먹고, 내가 원하는 것을 입고, 내가 원하는 섹스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뭘 먹고 싶어하고 뭘 입고 싶어하며 어떤 섹스를 하고 싶어해야 하는지를 정해준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라는 것이다.
Gordon이라는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제도는 개인적 감정을 조직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심지어 어떠한 제도는 감정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결혼은 사랑이 제도화 된 것이며, 군대는 공격성의 제도화이다. 사회제도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감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결정해준다. 이 과정을 통해서 개개인의 즉흥적이고 제각각인 감정들이 조직화되어 공동체를 구성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스와핑에 대한 논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논쟁은 섹스가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라 믿으며 왜 남의 사생활을 간섭하냐며 스와핑을 하는 사람과 스와핑을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스와핑을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논쟁의 핵심은 개인적 섹스로서 스와핑을 해야 하느냐 말야야 하느냐가 아니라, 사랑과 결혼제도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이다.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는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느며,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개인적 자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 논쟁의 핵심이란 말이다.
스와핑에 분노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스와핑은 개인적인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화된 감정을 위협하는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스와핑을 변호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도 스와핑은 이전의 제도화된 감정이 아닌 새로운 감정의 제도를 제안하려는 계기일 뿐이다. 결국 스와핑에 관한 논쟁은 섹스에 대한 서로 다른 규범의 충돌 현상이다.
성적 변태는 존재하는가? 변태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정신의학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4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통계적인 일탈이다. 평균에서 지나치게 벗어나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지나친 천재도 지나친 바보만큼이나 비정상이다. 두 번째 기준은 사회문화적 가치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동성애는 정신병으로 치료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문화가 바뀌면 정상도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도 정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기준은 개인적인 고통이다. 당사자가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다면 통계적으로 많이 벗어나 있어도 굳이 간섭하고 치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기준은 사회적인 위험부담이다. 당사자는 편하고 즐겁더라도, 그 사람으로 인해서 남들이 피해를 입으면 치료대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영철 같은 사회병질자(sociopath)들은 살인을 하면서도 별로 개인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붙잡아 가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인 변태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단지 그 변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는 위의 기준을 따르면 된다. 그 행동으로 인해서 당사자가 갈등과 고통을 겪거나, 그에 관련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 변태는 붙잡아서 고쳐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단 두고 봐도 상관이 없다. 그럼 스와핑은 어디에 속하냐고? 법적으로야 스와핑은 처벌대상이 아니지만, 심리학적인 진단 결과는 아마 그때 그때 다를 것이다.
앞서 설명했 듯, 스와핑은 애초부터 많은 사람이 즐기기는 어려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상반되는 활동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스와핑이 필요하거나 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부부생활 문제의 타개책으로 스와핑이 훌륭한 선택이 될 수 있는 커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부부 중에 한쪽이 주도적으로 스와핑을 요구하고 다른 쪽은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스와핑의 결과로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는 더 심각해질 커플들도 있을 수 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그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전문가의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와핑을 모두 변태라고 규정하고 공격하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스와핑을 그냥 한 묶음으로 치부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결국은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분류해야 한다는 말이다.
도덕률과 욕구가 상충될 때, 어디서 어떻게 합의점을 찾아야 하나. 조지 버나드 쇼에게 한 여배우가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가 결혼하면 당신의 훌륭한 지능과 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완벽한 아이가 생기지 않겠어요?" 그러자 버나드 쇼는 대답했다. "저의 형편없는 외모와 당신의 텅빈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스와핑은 나름대로 도덕률과 욕구 사이의 타협이다. 결혼 제도라는 도덕적 틀도 깨지 않으면서 욕구를 충족하려는 행동이니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참신한 시도는 버나드 쇼의 비관적인 예측처럼 일부일처제로서의 결혼제도도 망가뜨리고, 욕구는 욕구대로 더 혼란스러워지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만약 평생을 전제로 한 부부 관계라는 큰 판돈을 거는 베팅이라면, 도덕이든 욕구든,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승산이 높을 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디까지나 내 개인 생각이지만, 욕구보다는 도덕을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나. 사실, 인류 역사 전체로 봤을 때 일부일처제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아직도 보급되지 않은 곳이 남아있는 불완전한 제도다. 하여, '도덕'이라는 카드보다는 '내 솔직한 욕구'라는 카드에 인생을 거는 것이, 지고 나서도 덜 억울하지 않겠나 말이다.
성생활규제개혁우원회 자문우원 짱가(jjanga@yonsei.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