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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냐 모짜르트냐

명설교

by Bliss Yeo 2010. 11. 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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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냐 모짜르트냐                                                  서중석 목사


마가 15.37; 요한 19.30





고전 음악의 두 거장, 베토벤과 모짜르트는 작곡 형식과 기법에 있어서 서로 대립적이다. 베토벤은 격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모짜르트는 내적 자유를 노래한다. 베토벤이 폭풍우가 치는 산 허리를 오르다가 후퇴하고 또 오르다가 후퇴하는 힘겹고도 거대한 반복을 지속하고 있다면, 모짜르트는 이미 산봉우리 위에 있는 구름에 앉아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평화롭고 기쁘게 이야기한다. 베토벤의 태양이 한 여름 대낮에 사막을 이글거리게 하고 있다면, 모짜르트의 태양은 청명하고 신선한 가을 해변가를 비추는 아침 햇살과도 같다.
신학적 용어로 바꾼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지상의 고통스러운 인간성과 연관되고, 모짜르트의 음악은 천상의 영화로운 신성과 연관된다. 산의 깊은 계곡과 정상, 해방을 갈망하는 끊임없는 고투의 아픔과 신비스러운 합일의 기쁨이 대조되고, 고통스러운 절망의 외침과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 인간의 수치와 하나님의 영광이 대조된다.



신약성서는 이 양 극단을 모두 담고 있다. 예수는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기도 한다. 예수는 변모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그는 십자가 형틀에 처형됨으로써 치욕스러운 고통의 극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의 체포, 재판, 십자가형, 죽음을 생생하게 묘사한 수난 이야기(막 14-15장)를 통해 예수의 수치를 강조했다. 마가가 보도하는 예수의 최후의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막 15.34)하는 절망적인 외침이었다. 이 장면 후에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다"(막 15.37)고 보도된다. 곧 마가가 본 예수는 심지어 하나님에 의해서도 버림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요한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는 예수의 '수치'를 묘사하기 위해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예수의 '영광' 회복을 위한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 요한이 예수의 육적 모습을 제시하기는 하나(요 1.14), 그의 강조점은 예수의 신적 모습에 현저히 가해진다. 요한이 보도하는 예수의 최후는, 마가복음서의 고통스런 외침과 대조적인 "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장엄한 마지막 언급으로 대변되고 있다. 요한은 예수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얼굴로 이해한다.



물론 베토벤에게도 모짜르트적인 요소가 다소 있고, 모짜르트에게도 베토벤적인 요소가 다소 있듯이, 마가에도 요한적 분위기가, 요한에도 마가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감지된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지배적인 분위기만을 지적한 것이다. 곧 큰 무게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규명한 것이다.
마가복음서는 베토벤의 음악을 방송하고 요한복음서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방송한다. 이것은 마가나 요한 둘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이 독특한 관점을 각기 선택, 집중, 확대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둘 중 누가 더 위대한가 하는 질문은 있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생의 각기 다른 큰 흐름들을 각각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와 요한, 베토벤과 모짜르트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각각 위대한 인물들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사상이나 삶의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괴로와하거나 제거해야 할 품목이 아니라 기뻐하고 격려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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