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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명설교

by Bliss Yeo 2010. 11. 3. 10:48

본문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서중석 목사

 누가복음 10장38-42절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본문이다. 여기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두 개의 각각 다른 길을 가는 전형으로 나타난다. 본문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은 말씀을 듣는 것과 봉사로 유형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화는 종종 더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구분되고, 거기에 순종하는 자와 불평하는 자라는 정당치 못한 인상까지도 덧붙혀진다. 본문에서 예수는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 주지만, 옅에 놓인 마르다의 모습 때문에, 마리아의 승리가 개운치만은 않다. 이런 불편함 때문에, 종종 마르다를 도
와주지 않은 마리아가 이기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하고, 혹은 더 좋은 것을 따르지 않은 마르다가 미련하고 심술 사나운 여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 두 여자들의 영원한 평행선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는 이원론적 해석에 제동이 걸기도 한다. 예수는 본문에서 결코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좋은 것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42절에 나오는 '좋은 것'이라는 표현은 마르다의 일을 상대적으로 깍아 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리아를 인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마르다와 마리아를 화해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이들을 화해시켜 놓아도,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들은 어느새 분리되고, 각자 더 좋은 일과 더 낮은 에 복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역시 말씀을 듣는 것이 여타의 봉사 보다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봉사와 말씀을 듣거나 선포하는 일뿐 아니라,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과 직책에 대해서 서열의식을 갖고 있다. 항상 더 좋은 일, 더 거룩한 일, 더 바람직한 일들이 있고, 그 좋은 것에 종사하는 자들은 더불어 더 좋은 사람, 더 거룩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이 된다. 물론 이러한 더 거룩한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사실은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나는 이 본문을 단지 여성신학적인 입장에서만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
타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각각 다른 길은 교회 내에서 행해질 수 있는 다양한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본문이 가지고 있는 힘은 가능성을 현실화했다는데 있다. 본문의 정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서 강조되었듯이, 여자에게 말씀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의 현실이다. 예수가 활동했고 누가복음이 쓰였던 기원후 1세기의 근동지역에서 여자는 사람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자유인으로서 결혼한 남자만이 정당한 자격을 부여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당한 인간들의 그룹에서 제외된 여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할 아무런 이유
가 없었다. 여자에게 율법을 가르치느니 율법을 불쑤시개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은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말씀을 듣겠다고 다가온 마리아를 내치지 않는다.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예수의 행동은 마르다의 불평을 일축함으로써 더욱 도드라지고, 여기서 해방자, 자유를 주는 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손색 없이 드러난다. 마리아를 옹호한 예수의 행동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파격적인 것이며, 그것은 예수가 선포하는 해방의 혁신적인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묻고 싶어진다. 왜 예수는 마르다를 해방시키지 않는가? 기존질서를 무너뜨리는 예수의 자유에 왜 마르다를 참여시키지 않는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본문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이 있다면, 본문에서 예수가 "마르다야, 너도 와서 말씀이나 들어라"라고 강권하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화해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는 달리, 예수는 그들을 굳이 하나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왜 예수는 마리아의 길과 마르다의 길을 하나로 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나는 본문의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키(key)를 42절에 나오는 '선택하다'라는 말에서 찾고자 한다. 본문에서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를 허용한 예수에게서부터 본문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은 말씀을 듣기로 결단한 마리아로부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그들의 집에 들어올 때부터 마리아의 선택은 분명했다. 마르다는 손님을 맞이하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던' 반면, 마리아는 자신의 치
를 '주의 발 아래'로 고정시켰다. 본문에서 제기된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은 마리아의  선택에서부터 연유한 것이며, 이러한 면에서 본문에서의 주도권은 사실상 마리아에게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예수는 이러한 마리아의 주도권을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라는 말로 인정한다. 예수의 선포가 놀라운 것은 이전에 아무도 마리아와 같은 여자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여자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이 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여자란 선택될 수 있는 대상일뿐이지, 자신의 선택을 주장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의 마르다가 마리아와 다른 것은 바로 이 '선택권'의 사용 여부이다. 마르다는 분주히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의당 그녀가 해야된다고 생각되었던 일을 했을뿐이다. 그녀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등 떠밀리기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그녀의 일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면, 마르다는 마리아의 선택을 인정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이러한 마르다에게 예수는 무엇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든지, 혹은 한 가지라도 그녀의 선택에 의한 일을 하라고 종용한다. 마르다에게 부여한 이러한 선택권이 바로 예수의 해방 방식이다.
 
 마리아는 마르다와 달리 그녀가 하고픈 일을 선택했고, 예수는 이를 인정한다. 이로써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질서를 뛰어넘는 해방자로 드러낸다. 예수를 통해서, 마리아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은 '인간'으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냐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마리아가 남자들과 같은 인간으로 회복된 것은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을 들을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다. 남자들이 매양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마리아가 스스로를 위해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상
황이 바뀌어서, 마리아가 예수에게 마르다로 하여금 말씀을 듣게 하려고 했다면, 그리고 마르다가 스스로 봉사 일을 택한 상황이라면, 예수는 마리아에게 아마도 같은 말을 했을지 모른다:"마르다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일과 저 일을 비교하고, 이것과 저것을 무모하게 화해시키려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예수가 그녀들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하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는, 어느 하나를 강요하지 않은 채, 마리아의 선택을 꿰뚫은 혜안(慧眼)을 가진 자이고, 이것이 회복자로서의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 준다. 오늘날 여자들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으로 회복되기에 걸림이 되는 것들이 산재해 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최첨단의 시대에서도 인간으로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 내가 주체적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세상이다. 스스로 선택하려고 끝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예수가 회복시킨 우리의 인간성이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마리아처럼. 내게 금지된 것들을. 나는 소망한다,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회복된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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