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죠 크루스 |
텔레비젼 함정 저자: 죠 크루스 목사 -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가장 주의를 깊이 기울여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시청하는 것이 영적인 감각을 무디게 하지 않을지는 더욱 더 의문시 되어가고 있다. 상스러운 말들의 분별없는 사용이 아주 정선된 교육 프로그램들 안에 기어들어 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늘 그러한 언어들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그러한 언어들을 배워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종종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야비한 말을 듣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그러한 사회에 노출시켜야 할까? 우리들이 길거리를 걸어갈 때에 피할 수 없는 악한 장면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심각한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방 바로 안으로 유혹의 원천을 고의적으로 불러들여 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모두 채우려고 하는 유혹들은 얼마든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보는 데에도 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에덴 동산에 있는 하와 할머니 뒤에 와서 그녀에게 금지된 나무 앞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저 보고만 있어”라고. 그러나 하와가 그렇게 본 것이 6천년의 비극적인 세월동안 수십억의 인류에게 슬픔과 죽음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어떤 날 오후 잠이 깬 다윗 왕은 아주 우연히 아름다운 이웃집 아내가 지중해 지방의 지붕 정원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만일 누군가가 다윗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그저 보고 있을 따름이니라”는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쳐다봄이 그로 간음과 살인을 하도록 이끌었고, 한 민족이 하나님을 잊게하는 슬픈 죄들을 짓도록 만들었다. 밧세바와의 불륜의 관계는 다윗의 가족들에게 너무나 현저한 비극을 가져왔는데, 그의 자녀 중 넷이 비극과 반역으로 그 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아무 생각없이 그저 본 것으로 인한 쓰라린 결과를 그는 후일 얼마나 아프게 후회했을까! 정신적 사고방식의 지울 수 없는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생각은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형성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언 23:7). 바로 그러한 이유가 텔레비젼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파괴할 수 있다는 가장 두려운 이유들 중 하나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죄에 참여하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7,28). 사람들은 상상적인 장면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부디 유의하기 바란다. 그 참여한다는 것은 너무나 생생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마음에 무슨 생각이 깃들도록 허용한 것은 우리가 마치 실제적으로 그것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두뇌는 인체를 위한 결정 센터이기 때문에 실행된 모든 행동은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지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광대한 신경 소통조직을 통해서 두뇌는 손과 발과 다른 신체적 기관들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기별을 보낸다. 그리하여 두뇌는 가장 강한 유혹이 전달되는 센터가 되는 것이다. 일단 정신적인 어떤 장면이 두뇌에 품어지게 되면 그것이 상당히 망상적이고 의지를 쇠약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상상력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돌아 설 수 있도록 자신의 행동 양상을 바꾸는 사람은 불과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기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사단이 마음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악한 생각이나 상상력이 들어오는 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악한 생각이 품어졌거나 고려되기 시작하면 비록 생각하는 것만으로서도 마음과 육체의 놀랄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육체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게 되어 있다. 두뇌의 빠른 전류 속도는 품어진 행동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기도록 전 인체를 깨우는 기별을 보낸다. 이제 마음과 육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행동을 실행에 옮기도록 함께 연합하여 압력을 가하게 된다. 자. 그럼 그 사람이 마음에 자극된 생각인 육체적인 방종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정욕적인 어떤 태도가 마음에 생겼지만 그 죄를 실행에 옮길 상대자가 없거나, 혹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그 사람은 마음의 충동을 실행에 옮기려는 그 생각을 저항하려는 지독한 노력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생각이 가지고 있는 그런 놀라운 능력은 그것이 비록 생각으로 범한 죄일지라도 육체적으로 범한 죄처럼 아주 심각하게 취급하신다. 자, 이제 이 원칙을 텔레비젼을 보는 문제에 적용시켜 보자. 다른 어디서 우리가 그토록 생생한 대리행동(정신적인 범죄)의 과시를 목격하겠는가! 비록 시청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단지 꾸며낸 장면이라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마치 자신이 실제로 그 경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 장면에 정서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놀람으로 가슴이 쿵쾅 뛰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시청자는 정신적으로 자신이 그 장면 속에 참여하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살아나려고 싸우거나 총을 쏘는 상황에서 난치의 질환인 종양으로 고생하거나 아주 난잡한 침상의 장면이 자아내는 흥분이거나간에 시청자는 그 장면들에 사로잡혀 그 배우가 하는 모험을 대리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종류의 상상적인 죄도 실제적으로 범하는 죄처럼 나쁘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텔레비젼이라고 하는 매체를 사용하여 벌이는 기막힌 전략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생각하는 것조차 가슴을 떨리게 하는 일이다. 여기 마귀가 사람에게 짓도록 하고 싶어하는 가장된 죄가 있다. 예로, 간음하는 한 장면을 사람들에게 보게 한다. 그는 감정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하나의 죄의 장면을 통하여 백만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간음이라고 하는 진짜 죄를 범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으로 동일시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그 장면이 믿도록 만들기 위한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몸이 그에 대해 반응할 정도로 아주 생생한 실제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정욕과 두려움의 정서가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았으므로 비록 그들이 육체적으로는 그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과 뜻은 마치 그들이 그 죄를 범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아주 엄숙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치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러한 죄를 범한 것으로 취급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도둑과 살인자와 간음자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얼마나 교묘하고도 흉악한 방법인가! 단지 사단은 가장 호소력 있고, 진짜와 같은 정서적 극물을 만들도록 영화제작자들과 배우들만 감동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영화를 보면 사람의 내적인 본성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의 정서적인 노예들이 되어버린다. 언젠가 그들은 슬쩍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되는 경험을 하고, 그 다음에는 살인자, 또 그 다음에는 간음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스크린에 나오는 배우에게는 그러한 장면이 아주 터무니없는 가짜의 장면이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최소한 순간적으로라도 하나님과 사회가 금하는 온갖 흥분을 자아내는 일들을 그로 인한 결과를 직면함 없이 하게 되는 기회가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결과들을 직면해야만 하는가? 아마 물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대리행위(대리범죄)를 한 도덕적 책임을 매 사람은 심판날에 직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죄들을 고백하거나 버리지 않은 사람들은 마음과 의지의 성스러운 능력을 더럽게 팔아버린 책임을 추궁당할 날이 올 때에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대신 죄를 범하게 되는 이와 같은 사실은 왜 성경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오감에 대한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거리를 안전하게 지키도록 노력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하신 후에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태복음 5:29). 이 성경절은 자주 잘못 해석되어 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눈 하나를 잃은 사람도 나머지 한 눈으로 계속 악하고 더러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그 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만일 눈이 그 사람의 마음에 죄를 짓도록 이끄는 어떤 것을 보고 있다면 그 장면을 보지 않고 피하기 위해 무언가 결단력 있는 행동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영적인 양심에 위반되거나 범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보는 일을 그만 두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죄를 짓도록 하며,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게 되는 원인이 된다. 나쁜 그림들을 “그저 보는 것”의 위험에 대한 얼마나 극적인 본보기인가? 오늘날의 상황에 맞추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옮겨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집에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텔레비젼을 가지고 있다면 그 텔레비젼의 영향으로 인해 죄를 짓느니 보다는 그것을 쓰레기 장에 갖다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텔레비젼 없이 한쪽 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텔레비젼에 의해서 자극된 더럽고 죗된 생각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 “(눈을) 빼어 버리라” 는 예수님의 명령은 그 눈이 보고 있는 것에서부터 그 눈을 돌려 버리라는 명령이다. 그에 대한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을 갖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순결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립보서 4:8). 순결하고 정직하며 덕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윗은,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시편 1Ol: 3)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요인들에다가 텔레비젼의 폭행장면이 마음과 도덕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충격적인 통계자료들로 여러 페이지들을 메꿀 수도 있으며, 텔레비젼이 범죄를 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보고도 덧붙일 수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며 자주 반복되는 실례들이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취급된 범죄들이 얼마만큼 노상강도나 도둑들이나 강간범들에 의해 자행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폭력과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만족해하는 경향이 증가되어 가고 있다. 끊임없이 노출되는 텔레비젼에서의 잔인함과 몰인정의 장면들은 우리 동료 인간들에 대한 놀랄 정도의 무관심을 조성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관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개 사람들은 공격을 받은 희생자 곁을 본체 만체하며 지나가 버린다. 지진이나 홍수,기근같은 천연적인 재해에 대한 공중의 반응은 거의 “늘 있는 일인 걸” 식이다. 저녁 6시에 방영되는 뉴우스에 남미나 터키에서 죽어가는 수천명의 사람들에 대한 장면이 그 전날 보았던 영화장면보다도 인상에 덜 남는다. 인상을 깊게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제작된 발랄하고도 해괴한 장면들이 고통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실화보다도 더 큰 반응을 얻는다. 세미한 동정심의 감각들은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헐리웃의 “공포와 전율” 전문가들에 의해 거의 파괴되어 오고 있다. 죽음이 가진 의미도 과도하게 노출되는 끊임없는 죽음의 장면들에 의해 그 엄숙성이 감소되었다. 심지어 뉴우스에 나오는 장면들도 암살과 살인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보고하고 있다. 마치 살인 당한 사람은 죽었다가도 금방 금방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장기간 방영된 리 하비 오스왈드의 살인(Lee Harvey Oswald’s murder) 장면이그러한 텔레비전 폭행의 한 예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은 지금 보여지고 있는 것의 실제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 인간의 양심과 품성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더 물어 볼 것도 없이 그 영향은 죄책감 없이 폭력의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타고난 병적 욕망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한 순진한 시청자는 공격자도 희생자도 아니다. 그저 보고만 있을 뿐 그 일에 간섭을 할 수 없는데, 그러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차차 자신의 무활동의 정신 상태에 적응하도록 하게 한다. 끊임없는 노출하에 마음은 실제로 무엇이 환상이며 무엇이 실제인지 잘 모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자행되는 야만이나 폭행에 대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켜서서 볼 수 있게 된 연유이다. 최근에 한 신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만을 가지고 우리의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필수품들은 침대 하나, 난로 하나, 그리고 텔레비젼 한 대입니다.” 미국인 가정의 98%가 텔레비젼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루에 6시간 반씩 시청할 때 그 영향이 어떠할 지를 생각해 보라.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종종 알지도 못하는 사상과 철학들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는 인공적인 영향력 아래 그들의 깨어있는 시간의 삼분의 일(1/3)을 노출시킨다. 5세와 20세 사이에 해당되는 아이들의 1/4이 수업이 있는 날에도 매일 5시간 이상씩을 텔레비젼을 시청하는 데 보내고 있다. 그 시간은 그들이 학교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며, 그들이 매일 놀거나 먹는 시간보다도 더많은 시간이다. 단지 수면 시간만이 텔레비젼 시청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년 소녀들의 열린 마음 안으로 어떤 종류의 기별이 실제적으로 전해지고 있는가? 모든 텔레비젼 프로그램중 83%가 폭력에 관한 장면을 방영하고 있으며, 만화영화의 98%가 폭행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그대의 자녀가 만화영화를 시청하고 있을 때 그들은 매 2분 간격으로 평균 30건에 해당하는 폭행장면을 시청하게 되는 것이다. 서부영화나 탐정영화도 97%의 폭행장면을 담고 있어서 그리 썩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학령기 전에 있는 어린이들은 어떤가? 3세에서 5세 사이의 아이들이 거의 1200만명이 있는데, 닐슨 텔레비젼 인덱스(Nie1sen Television Index)에 따르면 이 학령전기 아동들은 매주 평균 54.1시간을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다고 보고되었다. 이 갓난 아기들 같은 아이들의 휘청거리는 마음과 정서에 미치는 세력이 어떠할 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깨어있는 시간의 64%동안 그들은 상업성이 두드러진 텔레비젼의 긴장과 폭행과 신경을 뒤틀리게 하는 공허함을 들이 마시고 있다. 우리는 왜 요즘의 나이든 젊은 세대가 실제적인 생활에서 사람들과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을 궁금하게 생각하는가? 유타 대학의 빅터 클라인 박사(Dr. Victor B. Cline)는 유치원생과 14세 사이에 해당하는 어린이 한 명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13,OO0명의 사람이 폭행으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고 보고했다. 학령전 아동들이 하루의 64%를 텔레비젼을 보는데 소모한다고 하면 그들은 13,OO0명 보다 더 많은 살인장면을 목격하게된다. 아마 텔레비젼의 폭력에 관한 주제를 가장 잘 결론 지은 연구는 Journal of Abnorma1 and Social Psychology에서 출판된 알프레드 반듀라와 동료들(Alfred Bandura and Associates)에 의해 보고된 것일 것이다. 그들의 결론은 정상아들에게 폭력의 장면을 보여 주면서 그들의 반응을 실제적으로 관찰하여 내린 것들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결론은 자막에 나오는 공격적인 장면은 아이들의 공격적인 성향을 강화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텔레비젼에서 본 그 폭행장면을 틀림없이 흉내낸다. 1969년에 국제 폭행원인과 예방 위원회(Nationaㅣ Commission on the Causes and Prevention of Vioㅣence)는 그들이 한 광범위한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염두에 두고 시도할 수 있었던 이 연구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폭력이 청중들, 특히 어린 청중들에게 나쁜 영향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또 가져다 주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아이들이 텔레비젼에 도취되는 것에 대한 가장 슬프고도 명백한 결과 중 하나는 부모들과의 비극적인 대화 단절이다. 매일 5시간 동안 아이들은 아무와도 교류가 없다. 펜실바니아주의 인디애나에 위치한 펜실바니아 대학의 사회학 및 인류학 부장인 아지미 박사(Dr. D.M. Azimi)는 아이들이 폭행과 섹스, 그리고 공격으로 가득찬 장면들에 “환각”될 수 있다고 믿는다.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을 방해할 때 그가 얼마나 그 텔레비젼에 깊이 빠져 있는지를 유의해 보라. 그대가 약에 취한 것 같은 그의 몽상을 방해할 때 그는 귀찮다고 할 것이지만 만일 그대가 방금 그 프로그램에서 말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그대에게 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텔레비젼의 스윗치나 눌러주는 사람들이 되고 있다. 아주 어린나이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과 따뜻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부모들은 그들에게 말한다. ‘가서 텔레비젼이나 좀 보렴, 나는 바쁘단 말이야.’ 이내 그들은 유리같은 눈으로 멍해져 가지고 텔레비젼앞에 꼼짝 못하고 앉아있는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한번 그러한 습관을 가지게 되면 그 습관을 없애기란 마치 약물을 끊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만일 부모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끊임없이 몰아닥치는 텔레비젼의 정서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상업광고주나 회사는 남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그들은 한 가지 일, 즉 소비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의 첫번째 접근방식이 인간의 허영과 정욕, 그리고 탐욕이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상업을 하는 정신과 의사들은 그들의 상업광고들을 아무런 방비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보는 순진한 시청자에게 보여 준다. 멋지고도 위선적인 주장들은 곧 거짓임이 판명되지만 계속 엉터리 같은 것이 나타난다. 불행하게도 그 후의 영향은 청년들에게 냉소와 불신의 부패한 태도를 갖도록 한다. 그대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보통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묘사되는 지를 유의해 본 일이 있는가?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무능하고 앙심을 품은 부적격자로 묘사된다. 행복은 젊고 성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될 때 오는 것으로 묘사되며 결혼이란 지긋지긋한 쇼나 무언가 흥분시키는 불충실에 의해 허영을 부리는 어떤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부모들은 종종 아무런 권위나 건전한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고리타분하고 무능한 인물로서 투영된다. 가정과 사회의 근본적인 기초가 가장 인기있는 쇼를 포함한 대다수의 텔레비젼쇼에 의해서 교묘하게 훼손당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우리의 가족을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크게 이상하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출처: www.sostv.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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