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회적 희생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
"그리스도인이여! 교회의 정치화를 경계하라!
필자는 지난번 두 번의 연재 기사에서 한국의 보수적인 대형 교회들이 천민자본주의에 기반한 낡은 정치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정치의식을 정립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정치의식 정립을 위한 이론적 기반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최근 국외 부재자 투표를 위해 독일 본(Bonn)에 설치된 투표소를 찾았던 필자는 비례대표 투표용지에 20개의 정당이 난립하는 가운데 2개의 '자칭' 기독교 정당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움과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이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기독교'라는 미명 아래 정당을 급조하는 구태는 1933년 독일의 나치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운동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며 이는 이명박 정부 내에서 정치적 수구 세력으로 성장한 한국교회의 왜곡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 필자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 독일 나치 정권 내에서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교회의 정치화(Politisierung der Kirche)'와 이에 저항하였던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Politisches Engagement von Christen)'의 차이를 분석하고 현재 한국 기독교 수구 세력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칭' 기독교 정당 운동이 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가 아니라 교회의 정치화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적 믿음은 기독교적 믿음을 변질시킨다"라고 주장하면서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고 또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 독일 교회들은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이를 묵인하였다. 1933년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유대인 문제 앞의 교회'라는 글에서 이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 교회는 각 사회질서의 희생자들에 대한 무조건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설사 그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교회는 국가가 원칙과 권리를 지나치게 억압하거나 그것을 방조하는 것을 볼 때, 그로 인해 수레에 깔린 희생자들을 붕대로 감싸 주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그 수레 자체를 저지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Dietrich Bonhoeffer, Die Kirche vor der Judenfrage[1933], in: DBW 12, S. 354)."
칼 바르트는 나치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35년 독일 본(Bonn) 대학 교수직을 박탈당한 채 스위스로 쫓겨난 이후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운동을 이끌며 나치 정권과 독일 교회의 정치화에 저항하였는데, 그는 1946년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인자의 오심에 대한 증인으로서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해야 한다. 이것은 잘못된 비당파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무엇보다 정치적 영역에서 낮은 자들을 돌아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입장에서 약자들과 억압받는 자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그리고 특별하게 더 참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특히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시민 공동체가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Karl Barth,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1946, S. 27)."
본 회퍼와 바르트의 정치적 저항과 신학적 논리는 나치 정권과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하였던 '교회의 정치화'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즉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란 "사회적 약자와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독일 교회의 정치화는 '기독교 언약과 시대 제한적인 정치 양식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왜곡된 인식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는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Dorothee Sölle, Politische Theologie, 1971, S. 73). 하지만 나치 정권 당시 대부분 독일 교회는 유대인 학살에 침묵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영역에서의 이익을 보장받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채 '순수한' 신앙적 문제를 강조하였다(Helmut Gollwitzer, Forderungen der Freiheit, 1962, S. XXXIff.). 이와 함께 독일 교회는 사회적 영역에서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의 종교적 활동을 미화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까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Joachim Mehlhausen, Art. Nationalsozialismus und Kirchen, TRE 24 [1994], S. 43−78.).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정치화란 "교회가 자신들의 기득권 혹은 정치적 기득권 세력(교회의 도움이 없이도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이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영역에 영향을 발휘하거나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기독교 수구 세력의 정치의식과 한국의 '자칭' 기독교 정당들의 정치 구호는 나치 정권하에 형성된 '교회의 정치화'라는 개념과 너무나 놀라운 동일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러한 개념 규정에 너무나 적합한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다.
교회의 정치화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로 미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양자를 구분하지 못했던 1930년대의 독일교회는 나치 정권의 등장을 막지 못했고 홀로코스트(Holocaust)의 협력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교회는 과연 이러한 과거 독일 교회의 오류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운가? 필자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의 오류를 답습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약자와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익과 사회적 기득권층을 위해 교회의 정치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결국 몰락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물이다.그리스도인들이여! 교회의 정치화를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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