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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진리의 오두막 라브리 공동체

기독교 세계

by Bliss Yeo 2012. 12. 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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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진리의 오두막 라브리 공동체
(L’Abri Fellowship)

라브리의 이야기는 그 유명한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박사의 개인적인 소명으로 시작된다. 쉐퍼는 191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독일계 미국인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완전히 노동자 계층의 집안이었다. 소년 프랜시스는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하였고 11살 때는 루즈벨트 중학교에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목공일과 공예제도 두 과목을 선택하였다. 17세에 그는 생선을 나르는 화물차에서 시간제로 일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그는 삶에 불만을 품었다. “나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시의 쓰레기 하치장을 배회하며 수마일 씩 걷곤 했다. 비록 소년이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그들의 돈을 소비하는지 생생히 실감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삶을 거칠지만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
불신자인 부모님 아래서 그는 자유주의 계열의 교회에 다녔었는데 그 교회의 설교는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이어서 쉐퍼가 제기했던 삶에 대한 의문들을 만족스럽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철학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또한 미국 문화가 기독교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18세 때 성경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갈급했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철학을 비교하여 읽으면서 “모든 문제들이 성경 안에서 통일된 사상 체계로 연결되어 마치 실타래가 풀려지듯이 다 해결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크리스천이 되고 난후 그는 복음주의 교회에 다녔다. 그가 성경을 통해 받은 진리에 대한 체험은 그의 일생을 가늠하는 중요한 체험이었고 후에 라브리 공동체 사역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
버지니아에 있는 햄프든 시드니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쉐퍼는 1935년 전 중국 선교사의 딸이었던 이디스 세빌(Edith Sevile)과 결혼한다. 노동자 계층의 환경 속에서 자란 프랜시스의 신선한 통찰력과 이디스의 섬세한 교양이 어우러져 그들의 결혼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독특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20년 후 라브리 사역의 기초가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거쳐 페이스 신학교를 졸업한 쉐퍼는 장로교회 세 곳에서 주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를 하였다.

쉐퍼는 1947년 유럽 교회를 둘러보았으며 그 이듬해에 교단으로부터 유럽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951년 쉐퍼 가족은 스위스 샹뻬리 지역으로 이사해서 산 속의 조그만 산장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는 거기서 중대한 영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정립하고 유럽의 신학적, 사상적, 문화적 공허의 심각성을 안타까워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과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사명감을 가진다. 그는 미국 정통 장로교단의 선교사직을 사임했고 재정적 후원도 끊었다. 1954년 그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리의 피난처’로 바꿀 것을 결심한다.
그는 기도를 생활화했으며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세워 준수하였다. “첫째, 기부금을 요청하지 않고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만 아뢴다. 둘째, 간사를 모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셋째,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고 그날 그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넷째, 우리의 사역을 알리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매우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실 것을 믿는다.”
쉐퍼 부부는 엄청난 위험을 각오하였다. 1954년 경에는 벌써 아시아와 중남미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왔다. 1955년 2월에 그들은 스위스 연방 정부로부터 가톨릭 지역에서 개신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6주 이내에 스위스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전은 모든 산꼭대기에 서리라(사 2: 3)”는 말씀의 약속 아래, 기적적으로 그들을 도운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150여 명이 보내 준 헌금으로 현재의 라브리 공동체의 모체가 된 웨이모의 멜레즈 산장을 구입하여 스위스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1955년 6월 4일 불어로 ‘피난처(L’abri)’를 뜻하는 라브리 공동체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라브리 공동체의 생활
쉐퍼가 세운 운영 원칙은 라브리에서 지금도 그대로 운영된다. 라브리의 생활은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융통성 있게 흘러가는 편이다. 강제적인 규칙이라든지 강요 조항 같은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회나 아침기도회가 없다. 그 이유는 라브리에 오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불신자이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개인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노동을 한다. 현재 세계 7개국에 라브리가 있는데 어느 곳이든지 라브리에 가면 간사 중 한사람이 학생의 개인 교수가 되어 모든 문제를 도와준다. 개인 교수는 학생의 개인적인 필요와 문제에 따라 연구 과정을 정하여 준다. 공부는 도서관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거나 담당 간사와 개인 공부를 한다. 라브리에는 미리 짜여진 교과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학생 개인의 관심과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 과정을 정한다. 라브리 도서관에는 50여 권에 이르는 라브리 서적과 라브리 강연을 녹음한 2천여 개의 카세트 테이프 혹은 기타 여러 가지 라브리 자료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담당 간사와 공부나 그 밖에 어떤 문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
오후 노동 시간에는 라브리 생활 운영에 필요한 노동을 한다. 스위스 라브리의 경우 겨울에는 매일 눈 치우기를 하며 그 외에 장작 패기, 채소밭 가꾸기 청소, 요리, 잡초 뽑기 등이 있다. 필자가 영국 라브리에 갔을 때 학생들은 건물 보수공사를 돕고 있었다.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하면서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을 나누고 철학적인 문제와 성경의 기본 진리, 결혼 생활이나 이혼, 동성연애와 같은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기회가 된다. 매주 목요일은 쉼의 날로 스키도 타고(스위스의 경우) 여행도 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한다. 저녁에는 주로 간사들이 인도하는 강좌가 주 2회씩 있는데 전문적인 주제에 대한 강의, 성경 공부 등이 있고 이외에 영화나 음악 세미나 등에 참석하여 함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눈다. 주1회 기도의 날로 정하여 중요한 문제를 두고 각자 자유로이 시간을 정해서 기도한다.
라브리에서는 어떤 공동체의 어떤 규칙이나 제도, 건물과 같은 것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물론 대부분의 공동체가 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곳이며 공동체의 규율은 오히려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공동체 특유의 원숙미를 낳지만 라브리의 경우 쉐퍼 박사의 개인 가족이 영적 필요에 갈급한 사람들을 만나주는 사역으로 시작된 터이라 공동체를 위한 규칙 이전에 우선적으로 사람이 중요시된다는 점이다. 특히 학생들과 방문객들에게 교양있고 친절히 대하는 라브리 간사들의 평소에 훈련된 섬김의 태도는 매우 아름다웠다.
라브리는 일과 공부 그리고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전 영역이 하나로 회복되었고 치유된 것을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곳이다. 스위스 라브리 간사 엘리스 포터(Ellis Potter)는 “라브리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삶의 실재가 하나로 통합된 것을 실험하는 곳이다” 라고 말한다.
간사 가족들은 공동체 내에서 살거나 동네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함께 일한다. 결혼한 간사이든지 미혼의 간사이든지 모두 공동체 내에서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산다. 라브리의 매력은 개인생활과 공동생활이 훌륭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데 있다. 재정 운용에 있어서 라브리는 결코 외부에 기부금을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들의 필요를 아뢰면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재정으로 각 라브리 지부를 운영한다. 방문객이 머물거나 학생들이 공부하는 비용은 개인당 하루에 8파운드이다. 이 액수는 최소한의 하루 식비에 해당하는 돈이다. 라브리는 초창기에는 돈을 받지 않았지만 방문객이 너무 많이 온 이후부터는 식비만 받기로 하였다.

영국 라브리에서
필자는 ‘84년 쉐퍼박사가 소천한 이후 그의 사위가 간사로 있는 영국 라브리를 찾아보았다. 영국 라브리는 런던에서 서남쪽으로 약 두 시간정도 달리면 그레탐(Greatham)이라는 아름다운 시골 동네에 있다. 영국 라브리는 18세기에 포도원을 경영하던 한 영주가 살았던 붉은 벽돌과 나무로 지은 마노아 하우스(Manor House)라고 불리는 대저택과 간사들이 사는 세채의 부속 건물과 약 사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넓은 정원과 채소밭이 있다. 이곳에서 다섯 간사들과 그의 가족들은 각자의 집과 정원을 갖고 함께 살면서 찾아오는 학생들을 돕고 있다. 영국 라브리 사역은 1971년 시작되었는데 전에 이 고풍스런 대저택에 살던 분이 그의 집을 라브리 사역에 기증하였다.
마노아 하우스에 들어섰을 때는 약 10여 명의 라브리 학생들이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스위스 라브리에서는 주로 저녁 식사시간이 주로 대화와 토론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데 영국 라브리에서는 점심시간이 대화의 시간을 사용되고 있다. 얼굴이 넓고 구레나룻이 썩 잘 어울리는 간사 한 분이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식사 안하셨으면 같이 식사합시다.”라고 친절히 권하여 그렇지 않아도 시장하던 터라 그들과 합석하여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학생들은 깔깔거리며 자신들의 사생활 얘기와 함께 그 주간 토론되는 주제에 대해서 조금씩 의견을 나누고 있었으며 담당 간사는 식사 중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 이야기들을 균형 잡힌 토론의 장으로 인도하려는 듯 하였다.
식사 후 학생들과 간사들이 어울려 간편한 반바지를 입고 어린이처럼 신나게 배구 시합하는 모습은 라브리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곧이어 반나절 공부, 반나절 노동하는 규칙에 따라 남학생 서넛은 건물 수리를 위해 시멘트를 비비고 있고 두 여학생은 정원을 손질하고 있다. 그 속에서 일하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해 나간다. 또 한 여학생은 장미꽃이 소담스럽게 만발한 꽃밭 가의 벤치에 앉아 두툼한 책을 진지하게 읽고 있다. 다가가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지금 뭐 하는 시간이죠?”, “이번 주간의 독서 과제를 읽고 있죠, 그런데 이 책이 참 마음에 들어요!” 알고 보니 그 자매는 독일에서 온 대학생인데 불신자였다. 도서관에 가보니 한 남학생이 열심히 라브리 강의 테이프를 듣고 있다. 이렇듯 라브리 생활은 일과 공부가 함께 흘러간다.
영국 라브리 대표인 레널드 맥컬리(Ranald Macaulay) 간사를 만나 라브리 공동체 사역에 관해 장시간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90년 한국 라브리 수양회 강사로 왔을 때 필자가 다녔던 총신대학원에 와서 채플을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레널드 맥컬리와 잠시 얘기할 수 있었는데 그는 그때의 필자를 기억하며 매우 반가워했다. 영국 캠브릿지 대학 출신으로 1958년 쉐퍼 박사 부부가 영국 방문시 캠브릿지 대학으로 초대되어 학생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맥컬리 간사는 그때 참석한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후에 쉐퍼 박사의 둘째 딸 수잔(Susan)과 결혼하여 라브리 간사가 되었다. 그날 맥컬리 간사는 배구시합 때에 허리를 다쳐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필자가 허리를 주물러 주면서 좋은 교제를 나누었다. 이 조용하고 품위 있는 영국 신사는 지난 84년 작고한 쉐퍼 박사를 대신하여 필자에게 라브리의 은은한 향기를 한껏 안겨 주었다.

쉐퍼의 기독교 사상
쉐퍼 박사가 유럽 선교사로 파송되어 스위스에 머무르면서 그는 당시의 비관적인 신앙과 현실 앞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대하여 심각한 재고를 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팽배해 있었으며, 사상적 문화적으로 공허해 있는 당시 유럽의 상태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경이 진리라면 어째서 기독교인들은 실천이 부족하며 교회는 생명력이 없고 교회가 분열되며 대사회적으로 무기력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 역할을 해 내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쉐퍼는 그러한 문제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그릇된 세계관으로부터 왜곡된 정치·사회·문화가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고가 행동을 규정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과 행동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 바른 믿음의 대상은 바로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무오한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기초로 삼을 때 비로소 바른 영성(true spirituality)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기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가치관이 혼돈되고 허무주의가 유럽을 강타하고 있었을 때 기독교가 제 기능을 발휘 못하게 하는 기독교 내적인 장애 요소로서 쉐퍼는 자유주의 신학 사조와 맹목적인 신앙 두 가지를 들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페이스 신학교에서 공부한 프랜시스 쉐퍼의 신학적 배경은 그레샴 메이첸, 커넬리우스 반틸 같은 성경무오와 성경의 권위를 믿는 복음주의 전통 위에 서 있다. 쉐퍼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에는 오류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기독교의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쉐퍼는 성경의 권위를 뒤흔드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야말로 바른 영성을 추구하는데 큰 해악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 맹목적인 신앙을 비판했다. 예를 들어 웨슬리의 부훙운동이 영적 열정으로 당시에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지만 가치관에 대한 재고가 없었으므로 현재 그 영향은 영국에서 3퍼센트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 사상과 세계관과 문화, 사회적 전 영역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와 투자가 없었으므로 교회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밀려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깊은 재고가 없이 영적 열정으로만 타오른 경건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로 흐르고 지속성이 없는 극히 편협한 영역의 한 때의 운동으로 축소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쉐퍼는 로이드 존스와 연대하여 총체적인 복음주의 운동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지성’이 겸비된 신앙을 강조하면서 “참된 싸움은 외적인 그 어떤 것에 있지 않고 사상계(world of idea)에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셔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은 내용 없는 경험이 아니라 내적으로 역사 하시는 불꽃같은 사상” 이라고 한다. 그러나 라브리의 사역은 단지 사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에 관한 것이고 지성의 참된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전체성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쉐퍼의 강조점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영적 실재성(spiritual reality)이다. 살아 계셔서 인격적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과 성경의 무오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인의 지성(Christian mind)이다. 정신 사고의 변화 없이 어떠한 영적 영역도 지키기 힘들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실천성(social responsibility)이다. 교회의 영역 안에만 머물지 말고 정치·경제·사회적인 구조 환경, 낙태, 교육 등과 같은 사회 문제에 과감히 대처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총체적인 복음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확장되는 라브리 사역
쉐퍼 박사의 사후 라브리는 축소되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갔다. 현재 스위스를 필두로 하여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미국(2)등 5개국에 6개의 라브리 공동체(L ‘Abri Fellowship) 지부가 있다. 또한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 한국에서는 라브리 센터(L ‘Abri Center)를 통하여 사역이 계속되고 있다. 라브리 센터는 기존 라브리 공동체와 같은 운영 원칙은 그대로 따르지 않으나 그에 준하는 다양한 사역을 펼치는 새로운 형태의 사역체이다.
라브리 사역의 국제 조직은 국제위원(members), 간사(workers), 기도 가족(prayer family)으로 되어 있다. 위원은 전세계에 25명정도로 라브리 사역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책임 그룹으로 항존직이다. 간사는 각 지부에서 전임 사역하는 일꾼으로 학생들을 맡아 섬긴다. 간사들은 지적 능력이 아니라 올바른 성경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조심스럽게 선발된다. 기도 가족은 라브리 사역을 위해 기도로 후원하는 그룹으로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1990년에는 프랜시스 쉐퍼 재단(The Francis A. Schaeffer Foundation)이 미국 뉴욕에 설립되었다. 쉐퍼 박사의 사역과 그의 사상이 보다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하고 그의 통찰력에 힙입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연구와 공헌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쉐퍼에 대한 모든 자료를 갖추어 공급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주간, 월간 세미나를 개최한다. 또한 기독교 지도자 훈련을 위한 특별훈련 과정도 운용한다. 스위스 라브리 간사였고 현재 뉴욕의 킹스 칼리지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우도 미들만(Udo Middelmann)교수가 이 재단 회장으로 있다. 또한 미국 커버넌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내에 부설 쉐퍼 연구소(The Francis A. Schaeffer Institute)가 설립되어 신학교 차원에서 쉐퍼 사상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라브리센터 사역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 장로교회 사역
“라브리는 교회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통로인 교회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쉐퍼 박사의 말처럼 라브리는 교회를 섬기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라브리 사역이 시작되면서 전세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라브리 근처 지역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언어상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라브리의 국제인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영어로 예배드리는 일종의 국제적인 교회가 형성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쉐퍼를 따라 라브리는 장로교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영국 라브리의 경우도 장로교는 런던에 있고 마을에는 성공회가 있어서 이들은 마을에 교회를 개척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 각 지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전세계에 라브리가 개척한 교회가 일곱 군데가 되는데 이들은 편의상 ‘국제 장로교회(International Presbytarian Church)’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교단을 형성하여 매년 총회도 연다. 영국 라브리가 개척한 인근의 리푹 장로교회에는 현재 약 3백여 명이 모이고 있다. 이들은 건강한 교회가 있는 지역에는 결코 교회를 세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라브리는 그 성격상 자신들의 교단에 머무르지 않고 전세계의 교회를 섬기고자 한다.

삶 속에서 용해된 진리의 공동체
라브리가 유명해지면서 라브리가 지적인 단체로 맹목적으로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라브리는 지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라브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물을 판단, 분석하고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이다. 그러한 지혜는 쉐퍼가 현실과 분리된 신학교나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강의 한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손님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개신교인이든, 가톨릭이든, 보수주의자이든, 진보주의자이든, 배운 사람이든, 무식자이든 간에 마약중독자, 히피와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열린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실험되고 실천된 삶의 열매였다는 사실이다. 라브리는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배움터이다. 삶 속에서 실험되는 않은 지식은 공허한 것이다.
라브리 사역이 전세계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로 명확한 가르침이다. 라브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하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다. 라브리는 지성 사역이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있다고 본다. 둘째로 라브리의 가정 사역을 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의 가정이 파괴되어가고 있을 때, 쉐퍼 박사의 부인 이디스 여사의 내조에 힘입어 가정을 개방하여 아름다운 가정 생활을 보여 준 열린 가정사역에 라브리는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디스 여사는 쉐퍼의 비밀이었다.”고 한다. 셋째로는 공동체 사역이다. 한 개인에 의해서만 사역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헌신되고 잘 훈련된 많은 간사들과 함께 라브리 사역이 수행되며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적 삶의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
쉐퍼는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는 메이첸(G. Machan)의 복음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장로교 합동측의 중심인물인 고 박형용 박사는 쉐퍼와 같이 메이첸의 훌륭한 제자였다. 메이첸의 영향은 박형용 박사를 통하여 지금도 한국의 정통 보수를 견지하는 장로교 교단에게 지대한 영양을 주고 있다. 문제는 바로 삶 속에서 실험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은 신학이라는 것이다. 쉐퍼와 라브리 공동체의 의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체로 믿고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메이첸의 정통보수 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입증한 것이다. 실천되지 않은 정통은 죽은 정통이다. 한국에도 신학이 삶의 전 영역에서 실험되는 라브리 공동체와 같은 신학교, 몸으로 신학을 사는 쉐퍼와 같은 신학교 교수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브리는 세계에서 유일한 장로교 배경을 가진 공동체이다. 장로교는 교회의 정치구조 생리상 공동체적인 분위기를 갖기에 매우 힘든 구조이다. 전통적으로 정통 개혁신학의 유산과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즉 ‘학(學)’을 매우 중시하는 장로교 체질의 한국 교회에게 라브리 공동체야말로 가르침과 삶이 조화된 교회 갱신의 자연스러운 모델로 어울리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한 사람의 헌신되고 유능한 사고 체계가 얼마나 큰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라브리 사역을 통해 보게 된다. 보다 값진 것은 지난 84년 쉐퍼는 갔으나 그의 사상과 삶을 이어 받은 그의 자녀들과 후예 간사들에 의해 라브리의 공동체 사역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라브리(L ‘Abri) 공동체의 삶 속에서 용해되는 올바른 지성이야말로 정말 러브리(lovely)한 것이 아닌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미가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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