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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에 관하여

신앙 신학방

by Bliss Yeo 2014. 1. 2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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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에 관하여

271. 현세적인 문제에 모세 율법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배격해야 합니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살도록 정해주신 땅에서만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모세에게 맡겨두고, 모세 율법 가운데 ‘도덕법’은 잘 간직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과 본성에 심어두신 것으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섬길 것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 것을 가르치고 명하는 십계명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272. 율법의 독특하고도 유일한 기능은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273. 율법을 마귀에게 넘기신 뒤 그것으로 죄인들을 협박하도록 허용하십니다.

274. 율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쓰입니다. 첫째는 현세의 삶을 위해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예방하고 막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법과 규례를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공포에 떠밀려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은 의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죄와 불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여 그냥 놔두면 기꺼이 죄짓는 데로 달려가는데, 율법이 버티고 있음으로써 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첫 번째 용도는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악한 의도를 단념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율법은 영적인 용도로 쓰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바와 같이, 죄를 더욱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죄와 무지와 거룩하지 못한 행위에서 잉태되고 출생하여 그 안에 살고 있는 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두 번째 용도입니다. 율법은 그처럼 눈멀고 완고한 위선자들을 쳐서 쓰러뜨리는 곤봉과 해머요, 하늘의 벼락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도끼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율법이 무엇이며 그 용도와 기능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과연 작은 일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곧 우리가 영생과 구원을 얻는 의를 열어주지도 나타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와 약함과 죽음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냅니다.

복음의 빛은 비추는 방식이 사뭇 다릅니다. 복음은 겁에 질리고 상하고 슬퍼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비추어 회복과 위로와 쇄신을 베풉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이 없고 정죄받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비를 베푸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복음이 선포하는 것은 은혜의 사죄와 의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런 식으로 율법과 복음을 구분해야 각각의 용도와 기능을 제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275. 이 세상에서 행해진 설교 중에서 모세와 그의 율법으로는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역설한 사도 바울의 설교만큼 대담하고 모진 것이 없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은 그들이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을 잘하는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도의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의식들을 지키되, 형편에 따라 지키기도 하고 안 지키기도 하며, 그 일로 양심이 매이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다고 할 때, 교황주의자들이 인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276. 율법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예리하게 느끼고 번민할 때, 거기에는 우리를 의롭다고 해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곧 천상적이고 신적인 능력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율법이 하는 일이란 오로지 현세적인 것뿐입니다. 율법은 세상의 안팎에 악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율법을 쓰셔서 우리 마음에 이렇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죽을 지격으로 두렵게 만드시지 않고, 오직 율법을 통해서 네 비참함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스도는 의를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277.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해주는 의를 간직하고 있을 때는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오직 그리스도 앞에만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서려면 모세와 그의 율법을 양심에서 치우치기 위해 근실히 노력해야 합니다.

278. 모세가 율법을 가지고 여러분을 장악한 채 하나님의 진노와 사망으로 여러분을 고소하고 위협할 때,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신다면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든 인간적 힘만 가지고는 마치 율법이나 죄가 없었던 듯이 평안을 지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칭의의 문제가 걸려 있지 않다면, 우리는 율법을 숭고하게 여기고, 사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율법이 선하고 참되고 영적이고 신적이라고 불러야 마땅합니다.

279. 나는 모세와 그의 율법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는 나의 주와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원수기이 때문입니다. 율법이 양심을 협박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진노를 쏟으시는 것 같을 때, 그런 순간에는 차라리 먹고 마시고 잠자고 즐거워함으로써 마귀를 무시해 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복음의 법보다 모세의 법을 더 크게 의식하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가 양면성을 갖고 있듯이, 의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280. 율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선포되고 설명된 율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로 율법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오셔서 마음을 감화하시고 말씀에 힘을 주시어 죄를 자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하시며, “아, 이 말씀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구나. 내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하고 말하게 하십니다.

법은 세 가지로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성문법이고, 둘째는 불문법이고, 셋째는 영적인 법입니다. 성문법은 벽돌과 같아서 항상 고정된 상태를 유지합니다. 불문법은 죄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영적인 법은 성령의 감동 없이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81. 모든 율법 혹은 계명에는 두 가지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약속이고, 둘째는 경고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은 명하고 악한 것은 금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율법 없이 약속이 있는 곳에는 오직 믿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되셨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282. 율법과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비 없는 구름과 같습니다.

283. 복음은 행위로 말미암는 공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정 선한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284. 율법을 토대로 서서 마귀와 대결하는 사람은 반드시 패하여 사로잡히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토대로 서서 그와 대결하는 사람은 그를 정복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의 대가를 요구할 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율법이나 죄에 관하여 그와 대결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285. 세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온갖 주관적이고 가변적인 견해들이 세상을 이끌고 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정직하고 순수하고 명쾌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시녀가 되어 그들의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궤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궤변만큼 사악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진실보다 거짓을 믿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견해를 폄하하고 흠을 끄집어내어 모든 것을 왜곡하는 것이 겉으로는 정당해 보여도, 나는 그런 행위를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좋아합니다.

286. (롬8:3-4)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셈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 본성에 박혀 있고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을 폐지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현세적인 사람들은 율법을 폐할 수 있는 사람,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세가 폐지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을 떠받들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까 생각이 들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엄히 금하시고, 우리를 그런 오류에서 지키시며, 그런 상태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287. 율법은 부도덕하고 악한 사람들을 위해서 전해야 하지만, 대체로는 옛 본성과 혈육에 관계된 것 아니면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선량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춥니다. 복음은 선량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위해 전해야 하지만, 대체로 그것을 받아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는 악하고 불경한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복음에서 현세적이고 육체적인 자유만을 섭취하여 오히려 더욱 악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걸맞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입니다.

양심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평안과 위로를 받을 때는, 정심을 차리고 하나님이 명하신 선행을 힘써 준행함여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288. 오직 은혜로 사방에 전파되어 권유되는 양심의 보화를 누가 인간의 말로 다 예찬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죄와 율법과 죽음과 마귀를 정복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모든 전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289. 구약성경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치는 율법 책으로서, 어떻게 하면 율법을 지키게 되고 어떻게 하면 범하게 되는지 예를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는 율법말고도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오늘날 우리와 동일하게 지키고 붙들어준 약속과 은혜의 말씀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었다는 복음과, 복음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은 사람들이 각각 내놓은 행동을 기록한 책입니다.

과거에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모세를 이끌어 내거나 모세로부터 그리스도를 이끌어내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복음에 비추어 율법을 해석한 계명과 교리들을 제시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다른 사역과 은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명령만 알아서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 모든 곳에서 복음이 율법 책이 아니라, 우리가 믿으면 우리의 것이 되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관한 온유한 선포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율법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과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늘에 두고, 율법은 땅에 두어야 합니다. 복음은 천상적이고 신적인 의로 받아야 하고, 율법은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의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은혜를 옳게 분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말뿐 아니라 행동과 사상에서 그 차이를 분명히 견재해야 합니다.

290.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은 율법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죄악된 본성에 있다. 석회 덩어리는 가만히 두면 아무렇지도 않다가 물을 부으면 연기를 내며 타기 시작하는데, 그것은물의 잘못이 아니라 물을 견디지 못하는 석회의 본질 때문이다. 석회에 물이 아닌 기름을 부으면 그대로 있으며 타지도 않는다. 복음과 율법도 그와 같다.”

291. 바울은 특정한 상황에서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여 율법을 지켰으나 우리 시대에는 그러한 배려가 필요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교부가 잘 말해놓았습니다. “시대를 분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쉽게 타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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