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와 들보 마7:1-5
1-5절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야 할 이유를 접하게 됩니다. 첫 번째 이유는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하거든 비판하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믿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너희를 비판하는 것을 싫어하거든 너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본문의 진술이 사실이며 항상 비판적인 유의 사람은 차례를로 비판을 받으며, 따라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비판을 피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덜 비판적이며 덜 혹평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이런 뜻으로만 해석한다면 아주 잘못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살펴 본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비판)에 대면하도록 의도된 본장 전체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일 뿐 아니라 이것과 유사하며 따라서 이것을 설명하고 보충하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 때문입니다. 그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해석을 즉각 반대를 표시하는 복음적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심판의 영역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뜻이 분면하다고 말하는 가르침을 기초로 해서 참된 기독교인들에게는 심판(비판)이 이제 다시없다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찰하고 있는 말씀은 불신자들에게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취급하는 최상의 방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비판(심판)이 있는데 이같은 혼란을 일으키는 까닭은 이 세 가지를 분리시키고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복음적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무리들 가운데 이 문제에서 입담의 죄를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에 매우 부족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너무 열심히 주장한 나머지 이신칭의론과 함께 우리의 믿음의 일부가 되는 성경의 다른 교리를 과소평가하고 소홀히한 죄를 범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비판과 관련한 이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최종적이며 영원한 비판(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사람의 신분 또는 그 위치를 결정해주는 비판(심판)입니다. 둘째 심판(비판)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순응해야할 할 심판(비판)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들을 판단할 것을 거부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탄-사망의 세력에 쥐고 있는-에게 내어줄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2장에 확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자녀들의 죄와 허물을 심판하십니다. 이것을 시편 73편에서도 발견하실 것입니다. 세 번째 심판은 ‘보상의 심판’이라 일컬어지는 심판입니다. ‘보상의 심판’이란 표현이 바른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한나님의 백성을 위한 심판이 있을 것을 성경에 매우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먹는 문제로 비판하지 말라)에서 이것을 봅니다. 모든 사람들 자신이 심판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께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기독교인이 된 후 행한 것에 대한 비판을 말하며,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이며 선악간 우리가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비판(심판)을 받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주게 될 심판인데, 천국인가 지옥인가를 결정함으로가 아니라 영광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있을 것을 결정하는 심판입니다.(갈6:5, 딤후1:16-18, 계14:13)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주된 이유는 우리가 주께 비판받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모습 그대로 보게 될 것이요, 그분을 만나볼 것이ㅛ, 이 심판 앞으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교임이며,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천국에 가게 되어 있음을 알지만 우리는 여기 이생에서, 그리고 이생 이후에도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 대목에서 우리 주께서 여기에 요약한 진술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대해 불친절한 말을 하지 않기 원하면 너희도 그들에게 불친절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란 뜻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이 옳으며,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비판(심판)에 노출시키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런 일들에 대해 받변을 해야 하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예중하신 비판하지 말아야할 둘째 이유로 이끌어 갑니다. 비판하지 말아야할 둘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비판을 낳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비판의 표준을 설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여기서 그칠수 없습니다. 제가 서술해온 심판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표준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주께서 선언하고 계십니다.(눅12장. 롬2:1, 약3:1)
지금 고찰하고 있는 여기서 주님을 이것을 명백하게 표현하셨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놀라운 진술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대해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이 주장하는 그 지식의 관점에서 비판(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우리가 권위자 노릇을 한다면 우리가 이 표준에 따라 비판받는다고 불평할 권리가 내게는 없습니다. 이 지식을 작고 있다면 지식에 따라 삶으로써 이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나 자신의 주장에 따라 나 자신이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을 살피는 일에 용의주도하다면 바로 그 판단이 내게 돌아올 것이며 내게는 불평할 근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차례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이유로 이끌어 줍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3-5절) 이같은 풍자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 논법을 원칙의 형태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할 셋째 이유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없게 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 주는 이것을 이렇게 증명하십니다. 주는 우선, 우리가 바른 판단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은 점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른 판단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것을 우리들 자신 속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술을 한 단계 더 밀고 나아가, 이런 사람은 그런 원칙에 관심이 없고 단순히 사람들에만 관심이 있음을 주께서 보여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주제나 원칙에가 아니라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가 실제 바라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하기보다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에 편견이 있다면, 여기에 개인적 감정과 개인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바로 검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 분석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다음 논거는 4절에 들어 있습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이 말씀은 가히 풍자 중에서도 최고의 풍자라 하겠습니다. 주는, 우리 자시느이 상태가 이러한 즉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작업은 너무 섬세한 과정이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주께서 말씀합니다.
끝으로 주는 우리를 위선자로 정죄하고 계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얼마나 적중하는 말씀입니까. 문제의 사실을 말씀드리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는 실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정죄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척합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돕고 싶으면 그리고 그들에게 결점과 허물과 단점과 불완전함을 제고하고 싶은 먼저 여러분의 영과 태도가 잘못되어 있음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비판과 우리의 말을 정직하고 참되게 검토한다면, 우리는 누에게 들보를 빼내는 일에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너무 겸손해진 나머지 우리는 비판과 혹평의 정신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참 모습을 볼 때는 다른 사람을 나쁜 방법으로 판단하지 못할 때인 것입니다. 비평과 혹평의 영을 제거하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이 있는데 곧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입니다. 눈에서 티를 빼내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눈을 치료하는데 무엇보다 요긴한 것은 공감과 인내와 침착과 냉정입니다. 이것이 요구되는 까닭은 이 작업의 섬세함 때문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이양시켜 보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겸손해야 하며 공감적이어야 하며, 여러분 자신의 죄와 여러분 자신의 하찮음을 의식한 나머지, 여러분이 그것을 다른 사람 속에서 발견할 때 그것을 정죄하는 커녕 그것으로 흐느끼는 감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맑은 시력을 갖기까지 영적 안과의사는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직면하고 이 들보를 제거하고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겸손과 이해가 가득하고, 공감적이며, 관대하고, 자비로운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서로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며’(엡4:15) 이로써 그를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를 아셨으니 ‘비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생에서 징계와 손실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다면-이것이 성경이 말씀이거니와-다음부터는, 여러분 자신을 먼저 비판하기 전에는 비판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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