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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레위기의 속죄제 연구

신앙 신학방

by Bliss Yeo 2014. 4. 2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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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속죄제 연구

 

김의원  교수

 

레위기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역사의 일부이거나 히브리 종교의 고대 제사 자료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의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셨던 내용이다. 그렇기에 레위기 제사신학은 자료비평에서 말하는 제사의 기원에서 출발하기보다는 모세 오경의 전체적 틀에서 보아야 하며 특히 출애굽 신학과 민수기 신학의 전후 맥락과 밀접한 상관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런 문맥에서 볼 때 레위기 제사신학은 출애굽 신학의 시내산 언약과 성막 건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시내산 단락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밑에 머물면서 경험하였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소개되어 있다. 즉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일, 성소-회막을 짓는 일, 제사를 드리라는 규례들, 정 부정에 관한 규례들, 성결해야 될 것을 강조하는 규례들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레위기의 내용은 시내산 언약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2.2 시내산 단락은 연대기적 어구를 통해 하나의 통합된 단락을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대기적 어구(백성들은 출애굽 첫 해 "제삼월"에 시내산에 도착하였으며 [출19:1], "제이년 이월 이십일"[민10:11]에야 이곳을 떠난다)는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2년 동안 머물면서 율법과 장막에 관한 말씀을 청취하였음을 말해준다. 시내산 단락은 크게 출19:3("그리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갔다[   ]...여호와께서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의 표현을 통해 출19:1-2 // 출19:3-민10:10으로 나눌 수 있다.    (출19:3a)라는 동사를 통해 이제까지 수평적으로 이동하였던 모세가 산에 오르는 사실을 언급 할 뿐 아니라    라는 동사를 통해 산 위에 계신 여호와께서 산아래 있는 모세를 큰 소리로 부르셨다고 한다. 이제 3a 이후의 사건은 더 이상 이주여정이 아니고 정주 기사임을 암시하여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제까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시내산 위에 거하시면서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다.다시 시내산 단락은 출19:3-40:38 // fp1:1-27:43 // 민1:1-10:10으로 삼분된다. 레위기의 첫 글자       (와우 미완료 연속법)는 앞 절, 출40:38과 직접 연결됨을 표시한다. 그러나 레위기는 단지 출애굽기의 연속만은 아니고, 출19:3-민10:10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왜냐하면 레위기는 '부르시다'라는 동사와 더불어 여호와의 새로운 거주 장소, '회막'을 언급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 모세를 부르시고." 시내산에 거하시던 하나님이 이제 회막에서 말씀하신다. 레위기 1:1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의 변화를 강조한다. 이전(출19:3-40:38)까지는 여호와께서 산에서 말씀하셨으나, 이제부터 회막에서 말씀하신다(레1:1-민10:10). 앞선 모든 사건들은 산에서 듣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면 레1:1-민10:10은 성소, 곧 회막에서 듣는 여호와의 말씀이다. 다시 민수기 저자는 동일한 여호와께서 시내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고 전한다(민1:1). 이는 레1:1과 더불어 두 개의 병행된 구조적 지시를 나타냄으로 레위기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 놓고 있다(참. Smith 1996:19). 여기에 분명하게 레위기는 민수기나 출애굽기에 속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레위기의 끝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요약하면 출애굽기 후반부에 장막이 어떻게 먼저 세워지고 민수기 전반부는 이를 분해하여 이동하는 것을 준비시키기 위한 준비를 언급한다. 이 둘 사이에 있는 레위기는 처음에 세워진 장막에서 하나님이 주신 법규들을 보여주고 있다. 시내산 단락의 이런 두 구조는 하나의 근본적인 신학적인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두 곳-산과 회막-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은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산에서 이루어졌으니 이제부터 모든 것이 회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에 레위기의 모든 가르침들이 시내산 단락, 아니 전체 오경의 핵심임이 드러난다. "시내산 단락은 레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은 오경의 중심이다"(Knierim 1985b: 405). 

(3) Smith(1996:19)의 구도: 그는 레위기의 큰 단락을 7개의 부분으로 된 구조를 보여준다고 한다(1996:22): 법규(1-7장), 기사(8-10장), 법규(11-15장), 기사(16장), 법규(17:1-24:9), 기사(24:10-23), 법규(25-27장). 그의 주장의 특징은 레16장을 '기사'로 본 점이다. 그는 '본토인'과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16:29)의 언급을 레16장과 이방인과 본토인의 동동성을 언급한 기사체인 24:10-23 사이의 연결로 해석한다.

 

4. 레위기에 나타난 속죄제

 

어느 구도를 취하든 많은 학자들은 여러 종류의 제사규례를 다루고 있는 레위기 1-7장을 하나의 단락으로 본다. 레위기 4:1-5:13에서 '하타아트'(    , 속죄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고대 이스라엘 종교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제이다. 최근 '하타아트'의 개념이 정결제인 아니면 속죄제인가, 또 성소만을 정화시키는가 아니면 죄인의 개인적 속죄도 포함되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때 학자들은 속죄제는 개인의 죄를 속하기 위해 유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속죄제에 대한 해석에 강하게 반대한 사람은 밀그롬이다. 속죄제의 피는 "예배자로 인하여 성소에 부착된 불결을 정화시키기 위해 제사장에 의하여 사용되는 제의용 세척제이다"(Milgrom 1976:392). 만약 '하타아트'의 피가 성소의 불결만을 정화시키고 제사를 드리는 개인을 속죄하지 않는다면 신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교리가 문제가 된다. 성경은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한다. '하타아트'는 속죄제는 개인의 속죄를 성취시킬 뿐 아니라 성소를 정화시킨다. 이런 해석적 차이의 주된 논점은 속죄염소 제의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다.

4.1 최근의 논의밀그롬은 '하타아트'를 정화제라고 번역하여(1971:237). '하타아트'의 번역을 "속죄제"로 하는 것은 문맥상으로나 형태론적으로나 어원학상으로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1982:67-69; 1971:237-239). 그는 이 제의에서 죄라는 개념을 부인한다. 그는 죄를 성소에 '자석처럼'(magnet-like) 달라붙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그곳에 계실 수 없게 하는 독기로 보았다. 이를 정화내지는 제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하타아트'의 피를 드린다. 그는 어원연구를 통해 kipper 동사의 기본적 의미를 '지운다, 정화한다'로 해석하였다.밀그롬은 '하타아트'를 속죄제로서 예배자의 죄를 속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바르는 대상 즉 성소와 성물을 정화시키는 정화제라고 주장한다. 그의 논지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하타아트'의 피는 결코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고, 성소, 성소 기구와 번제단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다(예. 8:15). 이는 kipper가 사람을 직접 목적어로 취한 적이 없고 다만 제단이나 성전과 같은 물건에 국한된 사실에서 확증된다. 후자의 경우 이 동사는 직접 목적어와 전치사구를 취할 수 있다: 직접 목적어를 취할 경우 정화되어지는 것을 표시하고, 전치사구(`al, 혹 be)를 취하면 정화가 집행되는 장소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밀그롬은 생각하기를 성전 정화(kipper)는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는 휘장 앞 바닥 위(on, `al), 향단 위, 속죄소 위와 지성소 안(be)에서 일어난다. 대속죄일에 방 전체가 정화되어진다(예. 출30:10; 레6:23; 16:14, 18-19). 2) 죄의 종류에 따라 오염되는 장소의 차이가 있다. 개인의 비고의적인 죄는 제단을 오염시키고, 회중이나 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는 성소(향단)를 오염시킨다. 고의적인 죄는 가장 큰 죄로서 지성소(법궤)를 오염시킨다(1976a:390-399; 1976b: 333-337; 1983:75-84). 비고의적인 죄는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정화제를 드려 제단과 성소의 오염된 것을 씻을 수 있으나, 고의적인 죄로 더럽혀지는 지성소는 아무도 회개하지 않아 오염된채로 방치되었기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짐승의 피로 오염을 씻어낸다. 3) 제사는 개인의 속죄를 위해 요구되지 않는다. 개인의 육체적 부정일 경우 물로 제거할 수 있다(레15:8; 참. 12:6-7, 8; 14:9, 20). 개인적 정화는 회개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 무고한 죄, 무지와 태만의 원인들이 사람 내부에 있다고 보았기에 정화는 본질상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Milgrom 1976c:3-12). 죄인이 정화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일뿐이다. 죄인이 제물을 준비해서 제사장에게 정화제를 드리는 것은 죄인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소 오염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하타아트는 죄의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타아트'가 정화시키는 것이 성소만으로 볼 때 문제가 된다. 밀그롬에 따르면 '하타아트' 제물을 가져오는 죄인은 죄가 나쁜 부정의 원인이지만 자신이 제의로 깨끗케 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뉘우침과 회개만으로도 개인적 정화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밀그롬은 구체적 제의에서 영적 과정을 분리시키는데 이같은 주장은 잘못이다. 성소의 정화뿐 아니라 죄인의 개인적 정화도 '하타아트' 제의에 포함되어야 한다.밀그롬의 이런 주장에 강하게 반박한 사람은 Zohar(1988)이다. 그는 희생제물의 피 가운데 가장 적은 양만이 성소로 가져가고 사체는 외부에 남겨진다는 관찰에서 시작하였다. 피를 '제의용 세척제'로 보아, 부정으로 야기된 오염을 제거하는 힘을 가졌다면, 피가 정화하는 큰 힘을 가졌는가? 또 동물의 피와 사체는 부정하게 되어 이를 만지는 모든 자를 오염시킨다고 하는데(예. 레6:27-28), 만약 성소가 부정의 유일한 장소라면 어떻게 제사용 짐승의 '고기'와 (성전 정화에 사용되지 않은) 피의 나머지도 또한 오염되어지는가? "어떻게 그리고 왜 오염이 내적 성소에서 바깥에 있는 사체로 껑충 뛰어 오를 수 있는가"(Zohar 1988:612)? 조할의 논지(1988: 165ff.)는 다음 두 개로 요약할 수 있다: 1) 부정은 '하타아트' 짐승의 살과 피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성소에 피의 일부분을 뿌린 결과가 아니고 그 단계 이전에 배경으로 주어진다. 만약 부정이 성소의 짐승에게서 오지 않으면 어디서 기원하는가? 부정(죄)은 성소의 정화가 되기 전에 시점에 사체와 피에 옮겨져야 한다. 분명한 원천은 죄인 자신이다. 그는 짐승의 사체와 피는 예배자가 짐승에게 안수를 거행할 때 오염되었다고 제안한다. 곧 부정이 죄인에게서 희생제물로 전이되는 방법과 시점에 관심을 가졌다. ① 죄인은 짐승을 조달하여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자신의 죄-오염을 전가시킨다. ② 다음에 짐승은 죽임을 당하고 관심은 이제 죄-오염이 피에 주어진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부정이 제거되기를 바라며 피가 죄-오염을 갖는다고 본다. ③ 다음으로 죄인은 하나님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여 후외와 죄의 분리를 보여야 한다. 만약 죄가 밀그롬이 말하는 '자석과 같이' 성소에 부착되는 오염이라면 제의용 세척제로 씻어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제사를 드려 적절한 곳에 피만 뿌리면 자동적으로 제거되는 마술적인 것이 아니고 피에 옮겨진 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속죄가 이루어진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제거한다. 2) 조할은 이같은 결론을 위해 대속죄일의 속죄염소 규례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인에게서 제사용 짐승에게로 전이되는 방법이나 순간을 밝혀낼 수 있다. 첫째 대속죄일은 그런 전이의 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제사장은 [속죄]염소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염소에 놓는다. 그러나 안수의 유사한 행위가 (설명이 없이) 하타아트[속죄제]에 지시되었고 실제로 모든 제사에게 그렇다 .... 적어도 하타아트 문맥 자체에서 손을 얹음은 기초적으로 대속죄일 [속죄양] 제의에서와 같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Zohar 1988:612-3). '하타아트' 제의에서 손을 얹는 일은 기본적으로 대속죄일에 행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죄-오염을 사람에게서 짐승에게로 전이시키는 것을 표시한다. 오염이 짐승에게 전가될 때 죄인 자신을 오염시켰던 것처럼 짐승도 오염시킨다. 즉 죄는 짐승 전체에 들어가 이를 오염시킨다. (손을 얹음으로) 오염을 짐승에게 전달하는 방법 뿐 아니라 영적 본질을 전가하는 방법이 다른 문맥에서도 발견된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신34:9).속죄제의 의미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이 주어진다. 1) 속죄염소 제의를 '하타아트'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파라다임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2) 두 손을 머리에 얹는 속죄 염소 제의는 한 손만을 사용하는 '하타아트' 제의와 다른가? 전자의 질문에 관하여 많은 학자들은 속죄양 제의를 유대교 밖 이교적인 것으로 보아 레위기 신학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한다(Kaufmann 1960:114; Noth 1965:124; de Vaux, 507-508; McLean 1991:351ff.).이뉴는 '아사셀'을 고유이름, 곧 광야의 약령으로 간주하여 공동체의 죄를 속죄염소에게 전가한 뒤 메신저는 속죄염소를 예루살렘에서 광야로 끌고 가 그곳에 거하는 '아사셀'에게 버린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일부 학자들은 희생제물의 머리에 얹은 손이 하나와 두 개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여 대속죄일의 제의에 나타난 죄의 전가로서의 개념을 속죄제에 적용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뒤에서 다루겠지만, 레위기 16장의 구도를 살펴 볼 때, 속죄염소가 광야로 보내어지는 것이 일종의 속상적 제사로서 악령에게 드려진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며, 면밀하게 구성된 병행법을 통해 '하타아트' 제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레위기 16장을 살피면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된다. 대속죄일에 두 마리 속죄염소가 각각 여호와와 '아사셀'에게 보내어지는데, 이를 두 개의 다른 악을 제거하기 위한 두 개의 다른 제의인가 아니면 한 제의에 대한 두 국면을 강조하는 것인가? 일부 학자들은 대속죄일의 제의를 두 개의 다른 악을 제거하기 위한 두 개의 다른 제의로 해석한다. '하타아트'로 사용된 첫 염소는 성전에서 오염을 정화시키고(레16:16), 두 번째 염소-속죄염소-는 백성들의 '고의적 범죄'를 제거한다(레16:21). 그는 두 개의 다른 제의로 해석하여, 레16:20에 '하타아트'로 드려진 염소의 기능이 속죄염소의 것과 대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4.2 레위기 16장 연구

4.21 레16장의 문학적 구도를 살펴보면 다양한 단락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차대구와 동의적, 반의적, 종합적 병행법이 전 장을 통해 드러나 있다. 이 장을 읽으면 역사적 배경(1-2절)과 결론적 어구(34d)가 문학적 봉투를 형성하여 16장 전체를 하나로 묶고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명을 받아 무엇인가 해야했으며 마지막에서 명하여진 것을 정확하게 행하였다. 16장은 5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지며 각 단락은 잘 구조되어 있다. 1) 3-5절, 서론; 2) 6-10절, 첫 전개; 3) 11-22절, 두 번째 전개; 4) 23-28절, 결론적 제의적 행위들; 5) 29-34c, 제의의 제도화. 또 일련의 행위들이 어떻게 도입되고 종결되는가를 16장 전체가 통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번제: 3절, 5절에서 시작되었고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24절에 끝난다. 2) '아사셀' 염소: 5절에 소개되고 구체적인 염소 선별은 10절에 기록되었다.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고 이를 광야로 보내는 일은 20b-22절에 나타난다. 3) 속죄제: 3절에 소개되고 희생제물은 6절에 제시되고 11절에 죽이고 피 처리는 14절에 기록되었으며, 기름을 불태우는 것은 25절에, 마지막으로 27절에 제물의 고기를 처리하는 일로 종결되었다. 4) 백성들의 속죄제: 이것이 소개되고(16:5), 여호와께 드려지며(16:9), 죽이고, 피 처리가 수행되고(16:15), 기름이 불태워진 뒤(16:25), 마지막으로 고기 처리를 다룸으로 종결되어진다(16:27).

4.22 서론(3-5절): 이 단락의 구조는 용어 '하타아트'와 '번제'의 반복에 기초하여 종합적 병행법을 통해 아론의 '통과제의'에 필요한 기본적 요소를 정의한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지 위한 준비로 목욕을 하고 특별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또 모든 제사를 끝낸 뒤에 다시 대제사장은 특별한 옷을 벗고 목욕을 하여야 한다(23ff). 목욕과 이런 종류의 옷은 대속죄일에 '통과제의'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 '통과제의'는 특별한 수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먼저 아론을 위한 속죄제물과 번제물이 언급되었고 뒤이어 회중을 위한 속죄제물과 번제물이 언급되어 각각 병행을 이룬다. 또 5절에 회중을 위한 속죄제물로 수염소 둘과 번제물로 수양 하나가 도입되는데, 수염소 둘은 속죄제물('하타아트')이란 용도로 지적되었다.

4.23 첫 번째 전개(16:6-10):

이 단락은 서론(3-5절)에서 다루었던 아론과 회중의 속죄 제물이 반복되면서 약간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곧 아론을 위한 속죄제사를 언급한 뒤에 곧이어 회중을 위한 속죄제사가 함께 언급되었다. 이 단락은 정확한 교차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교차대구의 시작과 끝은 두 개의 정반대 개념으로 윤곽을 이룬다. 하나는 여호와께 보내어지고 다른 하나는 멀리 보내어지는데 좀 더 낳게 표현하면 여호와께로부터 영구적으로 분리되게 한다. 교차대구 단락들에서 6, 10절은 동사를 갖고 있다. 10절에서 해석하기 어렵다.

이 경우 전치사는 수단을 의미하여 "...으로"(by means of) 번역되어야 하며 이 어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워 광야로 보내어짐으로 이를 통해 속죄가 시행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Peter-Contesse, 253-254). 이 구도의 절정은 교차대구 중심에 있는 병행법에 있다(8절). 병행법은 여호와와 관련하여 두 번 사용되고 아사셀과 관련되어 두 번 사용된     이란 용어로 만들어진다. 5절에서 도입된 두 염소들은 이제 구분되고 각각에게 구체적인 기능이 부여되었다. 여기에서 두 염소의 기능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다. 두 염소 모두 '하타아트'를 구성하는가(예. Snaith 1977:112)? 아니면 8절에 따라 여호와를 위한 염소만이 '하타아트'인가(Rodriguez 1979:113; 참. Gorman 97)? 5절에서 두 염소는 '하타아트'로 드려지도록 지정되었기에 구분되지 않고 계속하여 '하타아트'로 보아야 한다(Kiuchi, 148-149). 첫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여호와께 드릴 염소와 '아사셀'에게 드릴 염소를 선별하는 제비뽑는 일이다.해석의 초점은 '아사셀'이다. 교차대구 중심에 여호와와 '아사셀'이 놓임으로 많은 학자들은 '아사셀'을 여호와와 병행된 인격체로 해석한다. 곧 그들은 서로 정 반대로 보이는 다른 영역에 거한다고 본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나 '아사셀'은 진영 밖 광야에 위치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사셀'을 여호와와 대칭되는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가는 염소'로 해석하려 한다. 오히려 염소는 '가는 염소'라는 의미로 단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영역으로 쫓아냄으로 부정이 확산되지 않도록 하였다. 여기서 대칭되는 것은 여호와께로 드려지는 염소와 밖으로 가는 염소이다. 한 염소는 속제죄로 드리고(9절) 다른 한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 광야로 보낼지니라"(10절). 제비로 다른 역할을 맡는 염소를 구분하는 것은 대속죄일의 주된 요소로서 서로 상호적으로 배타적 역할을 하게 한다. 곧 이 둘은 하나의 제의로서 기능상의 차이를 언급할 따름이다. 두 염소 모두 속죄와 관계된 것으로, 전자의 염소는 정화용이고 후자의 염소는 제거용이다(Rodriguez 1996:274, n.10). 속죄제를 통하여 성소의 부정을 정결케 하는 것과 살아있는 염소를 통하여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의 구분은 현재 형태인 레16장의 텍스트에 나타나지 않았다(Rodriguez 1996:286). 이는 두 개의 제의로 해석하기보다는 한 제의의 강조점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 두 염소 모두 회중들의 죄를 정화내지는 제거하기 위함이다. 레위기 16장의 구도를 살피면 속죄염소 제의를 이교적인 것으로 구분되기보다는 병행법을 통해 '하타아트' 제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24 두 번째 전개(16:11-22)

이는 16장의 중심 단락으로 여기에 대속죄일 제의가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이 단락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교차대구이다. 서론에 언급된 순서대로 아론의 속죄제를 언급하고 뒤이어 회중이 드리는 속죄제 가운데 여호와께 드려지는 부분을 말한다. 각각 피의 처리를 언급하면서 문학적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단락의 중심에 있는 C행은 이 단락 뿐 아니라 이 장 전체의 중심이다. 여기서 속죄일에 시행되는 제의들의 중심을 다루고 있다. C는 다시 3개의 주된 단락으로 나뉘어진다: C1(16절)은 병행을 통해 성소와 회막이 속죄되며, C2(17절)은 병행을 통해 아론과 그의 가족, 그리고 회중의 속죄된다고 말한다. C3(18-19절)는 교차대구법을 통해 소와 염소의 피로 성소와 제단이 정화되어진다고 말한다. 반면에 C'(20a)는 앞서 말한 것을 요약하고 새로운 전개를 도입하는 전환적 구절이다. 그래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B'행은 20b에서 시작한다.

처음에 염소는 아론에게 가져온다(B1); 이 단락의 말미에 있는 B1" 밑에 이것은 광야로 보내어진다. 첫 교차대구 중앙(B3)에 고백이 주어져 이 문학적 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미 첫 교차대구에 포함된 것의 발전인 둘째 교차대구에서 중심(B2")에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가는 염소에 대한 묘사로 차 있다. 두 개의 교차대구는 다르나 서로 보완적 개념을 강조한다. 첫 것은 손을 얹고 고백의 행위를 통해 염소에게 죄의 전가의 개념이 중심적이고, 둘째 것은 그 강조를 광야로 가는 염소를 통해 죄의 제거에 둔다(Rodriguez 1996:280). 전이하고 제거하는 두 행위는 '제거제의'(elimination rite)의 본질이다. 염소를 광야에 보내는 것은 제거제의의 종결을 의미한다. 여기서 죄와 부정은 제거되어 여호와와 완전히 무관하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희생제물의 머리에 얹은 손(B2)이 하나와 두 개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려 한다. 구체적으로 두 손을 얹는 일을 보고하는 텍스트에 따르면 이 행위는 권위(신34:9) 혹 죄(레16:21; 참. 24:14-15)와 같은 것을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전이하는 것을 표시한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레16:21). 이와 대조되어 속죄제의 경우에는 한 손만이 사용되었다(예. 레1:4; 3:2, 8, 13; 4:4, 24, 29, 33). 그러나 한 손 혹은 두 손을 사용하는 것의 차이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정도'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Zohar 1988: 613, n. 24). 레위기 16장을 보면 제비는 어느 것이 성전 정화에 사용되고 어느 것이 백성들의 죄를 제거하는데 사용되느냐를 결정짓기 위해 사용되기에 두 염소 모두 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다: 제비를 뽑기 전에 어느 것이 여호와께 드려지는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제의적 관점에서 이 둘은 동일한 성격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염소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며, 한 손으로 안수하는가 두 손으로 안수하는가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다. 전자는 정화제의의 면을 강조하고 후자는 제거제의의 면을 강조할 따름이다.

 

5. 결론

 

레16장의 현재형태에서 이 장의 내용, 구도, 목적을 파괴함이 없이 속죄일의 전체 사역들 중에서 이 제의들을 구분해내는 것은 실제 거의 불가능하다. 이 장 초두에 뒤에 세부적으로 전개될 것의 짧은 요약이 있으며, 뒤 부분은 요약에 사용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또 새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레16장은 두 개의 속죄제물과 함께 수행되는 여호와께 드려지는 정화용 제의와 광야로 보내는 제거용 제의를 잘 균형잡힌 개념적 대칭으로 기록되었다. 대제사장은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성소에서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정화제의를 수행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며 광야로 보내어지는 염소를 통해 죄와 부정들을 진영에서 제거한다. 곧 광야로 보내어지는 염소에 놓인 죄와 부정은 정화용 제의를 통해 성소에서 제거된 모든 백성들의 모든 죄/부정이다(Rodriguez 1996:286).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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