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는 부자연한 일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죄악의 의식이라고 하겠다.
1. 일생에 매우 큰 가치를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은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칸트
2. 어떻게 해서라도 생활을 잃지 않겠다고 비겁한 걱정을 하는 자는 결코 인생을 즐길 수 없다.
3. 이 세상에 단 한루를 산 사람이나 1세기, 그리고 그 이상 산 사람이나 다들 마찬가지다. 태양, 토지, 이 세상 가지가지 인상- 이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오늘 있는 것이 역시 내일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것, 다시 말해서 육체가 없어지고 다만 심령만으로 되는 것은 정말로 호기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온갖 사물의 새로운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사람도 오로지 죽음에 대해서만은 오기심을 갖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이유없이 불안해 하며 끊임없이 생활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도 살아가는 데는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란 너 나 할것 없이 생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병이 들거나 고통을 겪거나 죽은 사람을 보게 되면 인간은 또 하나의 세계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도망친다. 이런 일드에 대해 인간이 깊히 생각하도록 이끄는데는 종교의 모든 힘이 필요케 된다. -라 브류이엘
4. 참된 삶을 맛보지 못한 자만이 죽음을 두려워 한다. -제이메
5. 개인주의에 독점되어 있었던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일컫는다. 개인주의가 인간의 본질이라기보다 차라리 인간의 본질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또한 완전히 인간의 본질적 상태가 부활한다 할 만한 순간에 참된 제일의적인 새로운 자유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을 더욱 잘 알려면 죽은 사람을 보라. 대체로 죽은 사람이 평화롭고 평안한 표정을 띠고 있는 이유는 분명 여기에 있다. 모든 선한 사람의 죽음은 대개가 평화롭고 편안한 것이며 용이한 것이 보통이다. 자진해서 즐거운 심경으로서 죽음에 임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권이랄 수 있다. 그러나 생활을 위해서 즐길 여유와 의지가 없을 뿐더러 그 의지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특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자살하는 자가 요구하는 것은 현실에 죽는 것일 뿐이며, 자아가 먼 장래까지 존속해 나가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또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쇼펜하우어
6.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이들의 속에 나타나는 감정이란, 생활의 내면적인 모순에 대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7. 인생이 하나의 조그만 부분적인 유기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릇된 감정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8. 만일 인생에 대해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냉정한 판단을 가질 뿐더러 인생에 대한 그들의 사고 방식을 올바르게 가질 수 있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즉, 우리들은 죽음을 육체상의 변화 그것만으로 생각하고 두려워 하나, 그 변화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나 모든 동물에게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하등 불유쾌하다거나 두렵다고 생각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9. 인생을 벌이라고 생각한 성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벌이라고 하는 것은 건강한 두뇌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다.
날마다 밤이 오고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는 것과도 같이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정이다. 우리들은 밤에 대해서는 거기에 해당하는, 겨울에 대해서는 또 거기에 해당하는 준비를 하면서 어째서 죽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준비하지 않을까? 죽음에 대한 준ㅂ지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하나란 훌륭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훌륭한 인생을 살아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면 할 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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