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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눈들

기독교 세계

by Bliss Yeo 2010. 5. 2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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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눈들

이문식 목사(복음과 상황 발행인, 산울교회)

서론

 크리스천과 교회는 항상 ‘주변부적 삶’에 민감해야한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과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의 삶의 고뇌와 눈물과 외침에 민감할 때에 교회는 건강한 ‘선교적 접촉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만 관심을 갖고, 가진 자와 누리는 자들의 힘과 권력과 기득권에만 민감한 공동체가 되면, 교회의 복음은 어느덧 가진 자들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일종의 ‘종교 이데올로기’로 변질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님이 자신과 늘 동일시하셨던 ‘지극히 작은 자’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예수 상실’ 그 자체이다. 바깥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눈과 소리에 민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주변부적인 눈과 귀야말로 바로 ‘성령께서 보이시는 것’, ‘성령께서 말하시는 것’을 듣는 ‘복 있는 눈과 귀’이기 때문이다.

본론

Ⅰ. 한국 교회는 ‘오만’하다는 시선
 요즘 주변부에서 교회를 향하여 한 결 같이 던지는 형용사는 소위 ‘무례한 기독교’이다.
이 형용사에는 다음의 3가지, 현실적 인식이 그 안에 배여 있다.

 1) 기독교는 ‘힘의 종교’가 되었다는 인식
 우리 사회 속에서 최근의 한국 교회는 어느덧 중산층 기독교, 기득권을 가진 막강한 종교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많은 교인과 커다란 건물들 그리고 거의 종교재벌처럼 행세하는 일부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의 행태는 천민자본주의의 해악이 온통 교회에 덧칠되어 있다는 부정적인 사회 인식을 낳았다. 특히, ‘교회세습 문제’와 ‘사학법 문제’등에서 보인 집단이기주의적 행태는 더욱 반기독교적 혐오를 심화시켰다.

 2) 기독교는 ‘무례한 포교 방식’을 취한다는 인식
 구한말에 들어온 서세동점식 기독교 선교는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와 가치 체계에 대하여 그 모두를 낡은 미신과 관습으로 단순하게 평가하고, 무시하는 ‘제국주의적 문화관’을 그 근본 태도로 삼았다. 이 태도는 구한말 초기의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그 후의 한국 크리스천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쳐, 오늘날에 와서는 ‘다원 종교사회의 시민적 교양’을 상실한 ‘무례한 크리스챤’을 양산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 천당, 불신지옥’식의 공격적이고도 일방적이며 이원론적인 전도방식이 일상화되었고, 다원종교사회에서의 필수적인 시민교양인 ‘대화의 능력’을 상실한 채, 타종교 및 다른 세속 신앙의 가치 체계 등을 무조건 사탄적인 것으로 단순 평가하는 이원론적 흑백 논리, 그리고 양극적 정서에 함몰되고 말았다. 이것이 영화 ‘밀양’을 통하여 보여 지는 기독교, 소위 ‘무례한 기독교’의 인상을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놓은 것이다.

 3) ‘개종’을 목표로 한 선교의 문제에 대하여…….
 최근 SBS에서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일부 극단적인 길거리 전도행위와 함께 대광고등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의 신앙 강요 문제 등을 주요 이슈로 선정하여, 소위 ‘개종을 강요하는 기독교 포교 방식’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특히 기독교의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사들의 언사를 인용하여 성경의 지상명령(마28:18~20) - 그 자체를 아예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극단적인 편향성을 보였다. 공영 방송이 민주 시민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종교교육의 자유(포교, 개종, 종교교육의 자유)’ 자체를 인정하기 거부하는 듯한 편성을 한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종교의 자유란 ‘특정 종교의 포교, 개종, 교육’을 금함으로써 비 종교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표현되나,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는 종교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포교, 개종, 교육, 종교기관 설립)을 보장하며,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공공질서를  위배하지 않은 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 ‘개인의 신앙에 의한 양심적 병역 거부행위’까지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로써 허용하려는 입법 추세에 비추어 보아도 교회가 종교적 개종을 목표로 하는 선교방식을 취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개종을 목표로 한 선교행위’가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든지, 공공장소에서의 소란행위를 동반한다든지, 아니면 타인의 의사에 반하는 일방적 강요를 수반하여 대중적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등의 행위 등에 대하여서는 일정정도 공공적 제한을 가할 필요도 있으며, 그러한 입법조치를 행하는 것도 일정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종교 본연의 포교행위, 개종, 교육, 종교기관 설립 - 그 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내부에서 ‘개종을 목표로 한 선교’ 자체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파괴적 자기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사랑과 나눔과 섬김의 실천을 통한 선교의 결과로써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개종을 더욱 선호하고 높이 평가하나, 모든 종교가 정치권력이나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며, 적극적으로 포교하며 개종의 열매를 얻는 것, 자체를 비난해서는 아니 된다.  심지어는 이단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자유롭게 포교, 개종, 교육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의 기본권 보장인 것이다. 포교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사회주의적 방식이나 미국 청교도들이 초기 미국에서 행한 ‘청색법률’(Blue law) 같은 강제적 포교행위의 양극단 모두를 우리는 단호히 거부해야한다. 모든 종교는 ‘권력’이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도덕적 가치와 영향력에 의하여 포교할 수 있어야 하며, 각 개인의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개종의 자유를 허락해야한다. 다만, 대광고등학교의 경우 기독교교육이념을 표방했던 기독교사립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국가 평준화 정책에 순응하여 기독교인 학생선발과 기독교 교사 채용의 자율권마저 확보하지 못하고, 더 중요한 기독교교과과정을 채택하지 못하는 비참한 구조적 상황, 즉 ‘바벨론 포로의 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에 바로 문제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의석’군의 종교의 자유와 ‘대광고등학교’의 ‘종교교육의 자유’의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강의석’군 개인이나 ‘대광고등학교’라는 개 학교의 차원에서 풀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계가 먼저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국고 지원을 포기하고 ‘대안학교’로 돌아가서 종교 교육의 자율권을 다시 되찾을지 아니면 학생선발의 자율권을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평준화 정책’을 뜯어 고치든지 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거의 준 공립학교로 전락한 기독교사립학교들이 다시 기독교교육이념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Ⅱ. ‘분단’과 ‘분열’의 주역이라는 시선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분단에 깊이 개입 관여한 죄책이 있다. 해방이후 한국교회의 분열은 한국사회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후의 동서분열은 민주개혁세력의 분열과 남북의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세대 간의 갈등,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문제에 기폭제로 작용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에 한국교회는 세간의 빈축을 살 정도의 추한 핵 분열상을 더 깊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교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교권과 이권의 문제로 대립하였으며, 여기에는 지방색에 기초한 분열이 가장 근본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런 한국교회의 분열상은 동서화합과 남북분단을 극복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됨의 영성」과 「통합의 리더십」을 드러내는 데에 결정적으로 실패한 것이며, 이로 인해 한국 국민의 마음속에 깊은 실망과 환멸을 안겨주고 만 것이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최근의 한국교회는 보수적 냉전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숭미적 편향성을 더욱 깊이 드러냈으며, 미국 내의 기독계 마저도 거의 반대하는 부시행정부의 침략적 군사정책에 대하여도 무조건 지지하고, 남북의 평화공존, 공동번영의 통일 정책에 앞장서 반대하는 정치적 대중 집회를 잇달아 개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분열과 남북분단의 고착을 가장 앞장서서 강화하는 집단이라는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한국사회 속에 깊이 심어놓고 말았다.

Ⅲ.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는 시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 보기 드문 급속한 성장을 이루는 동안, 어느덧 집단이기적인 개교회적 성장과 경쟁의 욕구에 함몰하여 절제와 검소, 섬김과 나눔의 미덕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직 개교회의 성장과 확장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회적 비판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민주화와 개혁 그리고 경제 양극화 해소 및 사회적 봉사에 등한히 함으로써 대 사회적 영향력과 선교적 접촉점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다. 그 결과 2005년 인구센서스에 나타난 기독교인의 뚜렷한 감소로 드러났다.(95년 대비 개신교 1.32%감소, 가톨릭은 74.4%성장) 종교사회학자인 조성돈 교수는 이 결과는 개신교에서 나온 반감 때문이라고 분석하여 다음의 3가지 무제를 지적하였다.

 1. ‘세속화된 기독교’에 대한 반감
 개신교는 현재 너무 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어서 목회자들의 질이 보장되기 어려운 지경이고 그들에 의해 너무 많은 교회가 설립되다 보니 그 회중의 질도 보장이 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교회와 목회자의 과잉 공급 상황은 교회 사이에서, 또 목회자들 사이에서 경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전도의 이데올로기화인데 이는 전도를 내 교회로의 인도로 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열 경쟁으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우들이며, 또 전도를 신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만들어 내는 신학화의 문제들이다. 또, 전도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믿음이 형성되기도 전에 강요된 헌금과 과다한 봉사에의 요구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믿음이 형성되어지기 전에 만나게 되는 이러한 강요된 헌금과 봉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2. ‘시끄러운 기독교’에 대한 반감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 빠르게 진행되어지는 현대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그들의 내면이 쉼을 얻을 수 있는 신비의 장소를 찾고 있다. 교회에 대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 역시 종교기관으로서 그들의 이러한 신비에 대한 열망을 채워 주는 초월의 충만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런 현대인의 영적 욕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개신교 예배는 ‘묵상의 종교’라기 보다는 ‘표현의 종교’이다. 개신교예배의 중심은 설교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예배자가 중간에 들어와서 설교를 듣고, 설교가 끝나면 축도 전에 예배당을 떠나는 모습까지 보인다. 과거 국민교육이 필요하던 산업화시기에는 이런 설교중심의 예배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순기능을 하였으며, 때로는 통성기도가 산업화 사회에서의 급격한 사회변화와 내면의 갈등에 직면할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에는 대중 찬양을 중심으로 한 참여형의 찬양예배가 교회의 큰 활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 모던시대에는 음악이나 설교가 중심이 된 문화적 접근을 중시하는 구도자 예배가 중요한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포스트모던시대에는 ‘묵상과 예전 중심’의 예배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고 있다. 서구에서도 최근 명상을 중시하는 종교나 동양 신비 종교들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서양인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성직자가 된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이한 돌출현상이 아니라 현재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교적 현상의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상들이 현재 급속히 정보화되어가는 한국사회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 개신교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너무 시끄럽고 장터와 같다”고 반감을 나타내며, 심지어 ‘종교적 초월성’보다 ‘세속의 경영학적 원리’가 너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3. ‘사회적 존재의미가 퇴화된 개신교’에 대한 반감
 한미준이 한국 갤럽과 함께 조사한 자료에 보면 종교별 이미지 조사에서 한국교회는 교세 확장에만 관심이 있다(76%)든가 지나치게 헌금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70.8%)고 비쳐지고 있고, 오히려 구제 봉사 활동 등 대사회적인 역할을 잘 하고 있다(37.8%)고는 이해되지 않고 있다.(한미준/한국갤럽,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 활동 및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 타종교인 및 비종교인과의 비교 분석」(서울, 두란노, 1999, p.117) 이것을 종교별 이미지 포지셔닝을 통해서 보면 한국교회는 헌금강요나 교세 확장에 치중한다고 보여 지고, 천주교는 지도자가 우수하고 대사회적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에서 등을 돌리는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결론

 한국교회는 선교 이후 100년 동안 사회를 리드하기도 하고 사회적 요구에 응답을 하면서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최근 10년 동안 이 흐름을 놓치고 만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겸손하게 이 시대의 물음에 귀 기울이고 응답할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현 시기는 과도기이다. 과도기라고 한 것은 한국교회가 현 위기를 극복해 나갈 돌파구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희망을 포함하고 있다. 아니 벌써 영성이나 봉사라는 두 방향의 큰 흐름이 형성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지 바라는 것은 개신교가 이제 한국사회라는 큰 틀 안에서 시대를 바라보고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더 이상 경쟁의식에 매어달려 내 교회만 살겠다는 식의 전도활동을 통해서는 수평이동만 일어날 뿐 한국교회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이제 이 큰 틀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구축되어질 때 한국교회는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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