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에딘버러 대학 신학부 New College 의 형성과 소개

세상 엿보기

by Bliss Yeo 2010. 6. 23. 18:45

본문



개혁신앙의 산실 에딘버러대학교 신학부

(New College, the UniversityofEdinburgh)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

 

스코틀랜드는 영국 (Great Britain)을 이루고 있는 4개 나라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즈, 잉글랜드) 중의 하나이면서, 전체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이다. 척박한 땅, 험한 산세 속에서 독특한 민족문화를 꽃 피워 왔으며 전통과 명예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쪽으로는 바이킹으로 알려진 노르만족의 침입과 동쪽으로는 프랑스의 견제와 침입, 서쪽으로는 아일랜드, 남쪽으로는 잉글랜드의 정복욕에 의해 오랜 세월 시달린 탓에 깊은 한이 서려있는 민족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정학적 여건 속에서 투박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끊임없는 저항 정신으로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민족, 그것이 바로 스코틀랜드이다.

 

그래서인지 불과 5 백만의 인구를 가진 이 스코틀랜드가 하나의 독립된 나라와 같은 강한 자존감을 지니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스코틀랜드의 자존감을 드높이는 원동력의 중심에는 바로 에딘버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에딘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이자 정치, 문화, 종교, 교육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인들로부터 가장 가보고 싶고 살고 싶은 도시 1위로 여러 번 선정된 고도 (古都)이다. 인구 50 만의 이 조그마한 도시에 한 해 외국인 관광객만 1천 2백 만 명이 다녀가고 있으며, 이 숫자는 한국 전체의 한 해 외국인 관광객인 1천 만 명보다 많은 규모이다. 도시 한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에딘버러 성을 중심으로 고풍스런 건축물들의 병풍 같은 즐비함은 18세기 이전부터 도시 계획을 통해 대부분의 건축물과 풍성한 역사적 유물들을 귀중하게 보존해 온 노력의 결실이다. 특히, 바다와 호수, 산에 의해 둘러 쌓인 자연과의 조화는 도시와 자연을 함께 누리며 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에딘버러는 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2. 개혁 신앙의 출발지, 에딘버러

 

그러나, 그보다 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흔적들을 넘어서는 그들만의 고집스런 신앙이다. 바로 그 고집스런 신앙의 역사를 보여 주는 곳이 에딘버러 성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에딘러버 대학의 신학부 뉴콜리지 (New College, 이하 뉴콜리지) 이다. 그들의 끈질긴 저항 정신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은 주여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옵소서! 라고 외치던 존 녹스 (John Knox, 1505-1572)의 개혁정신을 통해 새로운 개혁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산실로서 오랜 세월 동안 여전히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16세기 당시 유럽 사회는 로만 카톨릭 (Roman Catholic) 교회의 부패와 권력과 부를 쫓아 성직을 택한 자들에 의해 혼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또한 그나마 바르게 성직을 유지하고자 한 이들조차 사상과 행실에 매우 보수적이고 경직된 경향을 보임으로써 점차 많은 사람들, 특히 도시의 신흥 유산계급들로부터 신망도 잃어 버렸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시대적 흐름에서 에딘버러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만 카톨릭을 국교로 섬기던 시대에서 점차 벗어나 대륙에서 불어 닥친 종교개혁의 물결을 함께 타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만 카톨릭을 믿던 스코틀랜드 왕가와 종교개혁을 외치던 성직자들이 충돌하였다. 결국 카톨릭의 개혁을 외치던 수많은 이들이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회복을 부르짖었으며, 이 투쟁의 중심에서 존 녹스의 신학과 사상이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교권은 무너져도 신앙은 영원하다 했던가피의 순교와 박해를 통해 결국 로만 카톨릭을 넘어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Church of Scotland) 의 시작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3. 개혁신앙의 대변자, 에딘버러 대학 뉴콜리지의 탄생

 

이러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서 탄생한 에딘버러 대학은 1583년 장로교 교인이었던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James XI, 1566-1625) 에 의해 세워졌으며 데이빗 흄 (David Hume, 1711-1776),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 1771-1832), 로버트 스티븐슨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등의 인물들을 배출한 영국 최대의 규모를 가진 종합대학 중 하나이다. 신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법학, 의학, 수의학, 자연대학, 공학, 음악 등 120여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 어느 대학 평가기관에서 평가를 하더라도 전 세계 50 대 대학에 항상 올라 있는 유럽과 전 세계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약 2500 여 명의 전임교수와 15,000 여 명의 학부생, 4,000 여 명의 대학원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학부는 에딘버러 대학의 설립과 동시에 출범하여 대학의 중심 학문으로 자리잡아 왔다. 초대 교장 (The First Principle, 오늘 날의 총장) 로버트 롤럭 (Robert Rollock, 1555-1599) 은 존 녹스와 함께 개혁신학을 주도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초창기 대학은 신학과 예술연구를 위한 학교로서 역할을 감당하면서 17세기에 들어서자 신학부문은 더욱 발전하게 되어 디비니티 (Divinity, 1630), 히브류와 시만틱 언어 연구 (Hebrew and Semitic Languages, 1642), 그리고, 교회사 (Church History, 1694) 이렇게 세 파트로 세분화 되었다. 이 세분화를 통해 에딘버러 대학의 신학 연구는 스코틀랜드 개신교 전통을 고수하며 사회 속에서 교회의 예언자적.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신학부의 교수들이 에딘버러 내의 주요 교회들의 설교를 담당하여 신학과 목회의 일치, 교회의 사회적 영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로만 카톨릭을 극복한 종교개혁의 결과로서 등장한 에딘버러 대학 신학부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즉, 19세기 초 유럽에 불어 닥친 이성주의 (Rationalism)와 근대성 (Modernity)의 영향이 기독교와 자유주의 (Liberalism) 사상 간의 갈등으로 발전하면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 발단은 영국 의회가 ‘교구목사선택권’ (Patronage)을 회복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목사가 빈 교구에 새로운 목사를 임명하는 권한을 부유한 토지소유자들인 평신도 유지들(patrons)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교회의 자율권을 통제하려는 교회와 국가간의 갈등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834년에 교구목사선택권 의 남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거부권 행사법 (the Veto Act)을 통과시켜 여기에 맞섰다. 하지만, 영국본토 의회의 상원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국왕의 입지를 지지하여 이들에 반하는 정책을 폈으며, 하원 역시 상원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스코틀랜드 교회 내의 교구목사선택권 찬성파들과 국가의 영향력으로, 스코틀랜드 대법원 (the Court of Session)은 1838년에 ‘거부권 행사법’ 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곧 스코틀랜드 장로교 내의 논란으로 이어졌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 소속 목회자의 3분의 1이 1843년 5월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로부터 탈퇴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오늘 날 국가의 권력에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의 독립성을 보호한 영웅적 행동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 결정으로 인해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과 기존 교회 내의 직분, 성직자로서 주어진 특권과 그들의 재산, 심지어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던 해외선교권까지 잃는 박해를 박아야 했다.

 

이런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독립한 그들이 1846년에 세운 신학교가 바로 뉴콜리지였다. 뉴콜리지는 앞서 언급한 국가의 권력에 저항하고 교회의 본질과 신학의 정립을 목적으로 보다 강력한 신학교육 기관의 필요성이 요청됨에 따라 설립되었다. 이 일을 주도한 이가 토마스 찰머스 (Thomas Chalmers, 1780-1847)였다. 뉴콜리지는 애초에 신학교 (a theological seminary) 라기 보다는 보다 확장된 대학의 기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847년경에는 5명의 신학담당 교수와 3명의 예술학 (Arts) 담당 교수가 지명되어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결국 1929년 뉴콜리지가 에딘러버 대학과 다시 합쳐지기 전까지 프리처치의 목회자를 생산하고 신학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여 왔다. 반면, 기존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내에서 국왕의 수장권을 인정한 이들은 에딘버러 대학 내의 신학부를 통해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을 지속하여 나갔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국가와 교회에 대한 종속관계 논란이 거의 사라지고 분파를 초월한 모든 스코틀랜드 교회와 목회자가 교회의 독립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1874년에 분열의 한 원인이었던 평신도 목사임명권이 폐지되고, 각 교회에 목사를 선출할 권리가 주어짐에 따라 1929년에 이르러 뉴콜리지와 에딘버러 대학 신학부는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현재의 뉴콜리지는 두 가지 기능을 지금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교단 신학을 담당하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구로서, 다른 하나는 대학 내의 신학부로서의 기능이 그것이다. 그래서, 뉴콜리지의 교장은 대학의 인사권과는 별개로 여전히 스코틀랜드 총회에 의해 지명되고 있으며, 나머지 교수와 직원은 대학과 총회가 공유하는 형태로 가고 있다. 단, 건물의 관리와 소유권은 1960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대학으로 넘어갔다.

 

4. 뉴콜리지의 학문과 현재

 

뉴콜리지에 들어서면 해리포터 라는 영화에서 봄직한 장중하면서도 화려한 3면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3면을 마주하고 있는 마당 왼쪽엔 존 녹스의 동상이 개혁가의 기개를 보여 주고 있으며, 정면은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가 열린 어셈블리 홀 (Assembly Hall)로 들어가는 정문이 보인다. 오른편이 학교 본관이며, 그 곳에 강의실과 연구실 및 행정실 등이 위치하고 있다. 왼편은 신학도서관으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뉴콜리지 도서관이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전 세계 신학 저널을 비롯한 백만 권에 가까운 신학 서적들로만 가득 들어차 있으며, 이는 영국에서 단일 신학교 도서관으로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곳 도서관 열람실에서는 자신들의 연구실을 벗어난 교수와 학생들이 마치 경쟁적으로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외 다른 분야의 서적들은 에딘버러 대학 중앙 도서관이나 에딘버러 국립도서관을 이용하며, 이들 모두 도보로 10 분 거리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콜리지의 성서신학은 그 출발서부터 영국 내에서도 옥스포드, 캠브리지 대학과 함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영국 조직신학의 거장 맥킨토시 (Hugh Ross Mackintosh, 1870-1936), 존 베일리 (John Baillie, 1886-1960), 히브리 종말사상과 신약학의 권위자 윌리암 맨슨 (William Manson, 1882-1958), 20세기 장로교 신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토랜스 (T. F. Torrance, 1913-), 매킨타이어 (John McIntyre, 1916-2005) 등 걸출한 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의 신학적 업적은 특히, 장로교 개혁 신학의 연구를 주도함으로써 미국의 장로교 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영미 신학의 연결고리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 또한, 대륙으로부터 고등비평이 에딘버러를 통해 전해짐과 아울러 쉴라이어마허 (Schleiermacher), 리츨 (Ritschl) 헤르만 (Herrmann) 등의 독일 신학 등도 뉴콜리지의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영국에 전해졌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뉴콜리지를 이끌었던 매킨타이어 교수의 지도력 (1956-1986 재직)으로 학문의 자유와 연구의 다양화를 위해 학제나 교과목, 교수 충원 등 모든 면에 걸쳐 장로교 신학에만 국한하지 않는 에큐메니칼 (Ecumenical) 신학교로 그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1970년대 초에 종교 연구학 (Religious Studies) 이 개시되었고, 학제간 (Inter-disciplinary) 연구를 통해 타문화권 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종교학의 받아들임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종교 다원주의화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현장 목회자들과 보수적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종교학이 뉴콜리지 내에서 행해지는 것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았으며, 현재도 그 갈등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학 연구는 실제 1980년대 중반에 설립된 뉴콜리지 내에 비서구권 기독교 연구센터 (a Centre for the Study of Christianity in the Non-Western World)를 통한 선교사 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타문화에 대한 이해나 선(先)지식이 없이 이루어 진 영국의 제국주의적 선교를 반성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그 문화에 맞는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선교적 노력들이 바로 이 종교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결실을 맺어 왔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어찌 보면 에딘버러 대학이나 뉴콜리지 모두 초반 출발점의 이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1984년 설립된 신학과 공공문제 센터 (The Centre for Theology and Public Issues)는 신학이 그저 상아탑 내의 학문이 아닌 사회를 이끌고 개혁하며,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케 하는 뉴콜리지 내의 중심이 되어왔다. 더구나, 공공신학 (Public Theology, 사회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를 윤리적, 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분야)은 영국 최고의 정치신학자 (Political Theologians)로 인정받는 던칸 포레스터 (Duncan Forrester), 올리버 오도노반 (Oliver ODonovan), 마이클 노쓰콧 (Michael Northcott) 등으로 구성되어 영국 대학 내에서도 최고의 인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뉴콜리지는 450 여 명의 학생과 27 명의 교수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학부생이 약 300 여 명이며 나머지가 150 여 명이 석. 박사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이다. 이 중 현재 15 명의 한국 학생들이 석사와 박사과정에서 수학하고 있으며 특히, 지난 2005년에는 뉴콜리지 내에 있는 한국 학생들이 모여 에딘버러 대학 뉴콜리지 한인학생회 (Edinburgh New College Korean Association, ENKA)를 결성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올 해, 2007 년에는 뉴콜리지를 졸업한 분들이 모여 한인 동문회 (초대회장 최성일교수)를 한국에서 결성함으로써 에딘버러 대학 뉴콜리지 출신들에 의한 한국 신학의 발전과 역할에 보다 충실한 역할을 기대하게 되었다.

 

5. 글을 마치며

 

뉴콜리지에서 공부하는 많은 다양한 이들이 다양한 생각들을 하겠지만, 신학도에게 던져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러 왔다기 보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알고자 하는 근본적인 물음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의 근간을 세우는 노력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혁과 저항, 그리고 때때로 전통과 자존심이 지나칠 정도로 엄습해 오는 뉴콜리지의 장엄함은 과연 이런 물음에 답을 던져 줄 수 있을까 반문해 보기도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역시 결론은 규모나 재정, 건물 자체에 대한 기대보다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결코 놓지 않아온 뉴콜리지 구성원들의 정신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주는 힌트가 아닐까 여겨진다. 처음부터 유명하거나 훌륭한 대학은 없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정신이 위대한 사람과 뛰어난 학문적 성과가 훌륭한 대학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앙에 대한 열정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 모인 곳, 학문에 대한 열정을 신앙 속에서 지켜 나간 사람들이 사는 곳, 그것이 바로 에딘버러 대학 뉴콜리지의 대표적 모습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대학과 신학교들이 있지만, 나타났다 없어지는 그런 대학이 되기보다 바로 신앙과 학문의 그 열정을 가치있게 함께 승화시켜 가고자 하는 그 인간의 노력 속에서 신학교의 존재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글, 사진 손창완 (에딘버러 New College 윤리학 박사과정)

출처 : 에딘버러대신학부한인학생회 ENKA
글쓴이 : 리치몬드 원글보기
메모 :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