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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 1:1-17)

명설교

by Bliss Yeo 2010. 12. 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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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 1:1-17)

우리 주님의 족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Ⅰ. 그 제목. 족보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 즉 그의 육신적인 조상에 대한 책[또는 사건이나 이야기. 히브리어 세폐르 "책"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기사, 이야기"의 뜻이 있음], 또는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족보의 제목은 Bi,bloj Gene,sewj-발생 기원의 책이다. 구약은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구약은 그 영광이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신약은 이 점에서 그 영광이 더욱 뛰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신약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의 "발생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이며(미 5:2), 누구도 그 발생기원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이곳에 언급된 것도 바로 이 발생기원인 것이다.

Ⅱ. 주요한 목적. 이 족보는 끝없이 또는 불필요하게 나열한 족보는 아니다. 또한 위인들의 족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허영적인 것도 아니다. Stemmata, quid faciunt? - 옛 족보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 족보는 어떤 제목(또는 명칭)을 입증하거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증거로 제시된 족보와 같은 것이다. 그 목적은 우리 주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셔서 메시야가 나시게 될 그 나라와 족속의 자손이 되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 당시 메시야에 연관된 약속을 받을 위인들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졌으며, 메시야의 통치에 대한 약속이 다윗과 그 후손에게 주어졌다." 또한 "지상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려는 자들은 "지상의 모든 족속들을 다스릴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 충성된 백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것이었다(창 12:3; 22:18; 삼하 7:12; 시 89:3; 132:11). 따라서 예수님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실은 족보 사무소(herald's offices)의 믿을 만한 기록에 의해 입증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족보를 보존하는 일에 매우 정확하였으며, 여기에는 메시야가 그 조상들의 후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섭리가 있었다. 또한 그가 오신 이후로 유대 나라는 흩어졌고 혼란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론의 자손이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왕의 직능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 포기되거나 우리 주 예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먼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칭호로 언급되었고 또한 그렇게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한 자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15:22; 20:31; 21:15). 따라서 이 복음서의 저자가 입증하려는 것은 그가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그 "어깨에 정사를 메신"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것과, 또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마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에 신실하시며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1. 비록 그 성취가 오래 지연되더라도 꼭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큰 축복이 될 한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약속이 바로 그 당시의 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42대, 약 2천년이란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오래 전에 앞으로 되어질 일을 예고하시기도 하시며, 그렇게 오랜 후에 이미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도 하신다. 약속된 은혜들의 지연이 우리의 인내를 연단 시키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2. 비록 사람들이 그 약속을 단념하더라도 꼭 이루게 하신다. 아버지의 집의 영광이었던 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태어날 때는 멸시받는 백성이었고, 이 즈음에는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었던 때였으며 다윗의 집이 몰락되어 버린 때였다. 그리스도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시기는 그 성취가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보일 때임을 유의하자.

Ⅲ. 특별한 계통. 이 족보는 역대기 초두에 기록된 족보에 따라(기록된 데까지만)아브라함의 직계(直系)로 내려온 계통을 다루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그것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족보에서 우리는 몇 가지 독특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1. 형제를 가졌던 그리스도의 조상들 가운데 대체로 그는 동생의 계통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나 야곱, 유다, 다윗 나단, 레사등이 모두 동생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지상의 왕들의 탁월성처럼 그 조상들의 장자 신분에서 유래되지 않고 그의 섭리의 방식을 따라 "낮은 자를 높이시고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 것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2. 야곱의 아들들 중에, 실로가 오셨던 유다 외에는 "그의 형제들," 즉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언급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서자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장자인 에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교회에서 내쫓김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야곱의 모든 아들들은 교회 안으로 받아 들여졌고 비록 그리스도의 조상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족장들이 되었으며(행 7:8), 따라서 이 족보에 언급되고 있다. "흩어진 열 두 지파들"에 대한 이러한 격려는 그들 역시 유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유다의 쌍둥이 아들인 베레스와 세라는, 베레스만이 그리스도의 조상이지만 유다의 형제들이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둘 다 함께 언급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베레스와 세라의 출생이 어떤 비유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세라는 먼저 난자로서 그의 손을 맨 처음에 내밀었으나 그것을 도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베레스가 장자권을 가지게 되었다. 유대교는 세라와 같이 맨 처음으로 장자 상속권에 이르렀으나 불신앙으로 손을 도로 집어넣음으로써, 이방 교회가 베레스와 같이 먼저 나와 장자권을 소유해 버렸다. 이리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으나 그 후에 세라가 난 것처럼-"온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롬 11:25, 26).

4. 네 여자의 이름. 이 족보에는 단지 네 여자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 두 여자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방 여자"들이었다. 즉 라합은 가나안 태생의 기생이었고, 롯은 모압 여자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차별이 없으며 나그네나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안에서 "성도의 시민권"을 가지도록 환영되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밖의 두 여자, 즉 다말과 밧세바는 간음한 여자들이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사람들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이 되신 것이 특별히 족보에 언급되어 있고 조금도 가리워지지 않았다는, 우리 주 예수님에게 부가된 겸손의 표식이었다.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체의 모양"(롬 8:3)을 입으셨으며 아무리 큰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회개할 때에는 그와 더불어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주의할 것은 조상들의 추문 때문에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이며, 가장 위대한 사람이나 우리 주님 자신도 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사실이 기록된 것은, 다윗의 범죄는 그가 회개하였으므로 그에게 주어진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여인을 통해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휘트비).

5. 비록 여러 왕들의 이름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윗 왕" 이외에는 왕으로 불리워 표시되지는 않았다(6절). 왜냐하면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또한 그에게 메시야 왕국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메시야는 그의 조상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라고 말해지는 것이다(눅 1:32).

6. 유다왕들의 족보에서 요람과 웃시야의 사이에는(8절) 세 왕, 즉 아하시아,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요람이 이 웃시야를 낳고"란 말은 히브리어의 용어 법에 따라 웃시야가 요람의 직계 후손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실례는 히스기야에게 대한 예언, 즉 "왕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리라"는 예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그들은 몇 세대가 빠지게 되었다. 이 세 왕이 빠진 것은 실수나 건망증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이 복음서 기자가 참조했던 그 당시에 권위 있다고 인정받았던 족보책에 이 세 왕의 이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이를 주장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조상의 대수를 14대씩 세 번으로 줄이는 것이 마태의 의도였는데, 두 번째 14대(다윗에서부터 바벨론 이거까지)의 경우에는 불가불 세 사람을 뺄 수밖에 없었는데 아합의 우상 숭배를 다윗의 집에 끌어 들여 그 낙인이 그 가문에 찍히게 되고 그 죄악에 대한 형벌이 "3, 4대까지 미치게"된 아달리야의 직계 자손인 이 세 왕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세 왕 중, 둘은 배교자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그의 노하심을 나타내신다. 이 세 왕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7.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언급된 왕들의 계승에 있어서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에 유의한다. 예를 들면(7, 8절) 사악한 르호보암이 사악한 아비야를 낳았으나 사악한 아비야는 선한 아사를 낳았으며, 선한 아사는 선한 여호사밧을 낳았으나 선한 여호사밧은 사악한 요람을 낳았다. 은혜는 혈통을 따라 이어지지 않으며 또한 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신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대로 주시기도 하시고 보류하시기도 하신다.

8. 바벨론으로의 이거는 이 족보에서 두드러진 시기로 언급되어 있다(11, 12절).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중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는 달리 망해 없어져 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백성들의 시내가 죽음의 바다를 통해 순수하게 계속적으로 흘렀던 사실에 대한 이유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는" 그들로부터 "오실"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사 65:8, 9) 복 중의 복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유대인들이 회복되고 황폐한 성소가 "주님을 위해" 은혜로 비췸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그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단 9:17).

9.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고"로 되어 있다(11절), 여기의 여고냐는 요시야의 장자였던 여호야김을 말한다. 그러나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고"(11절)에서의 여고냐는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여호야김의 아들을 말하며 거기에서 스알디엘을 낳았다(휘트비). 또한 "이 사람(여고냐)이 무자하리라"(렘 22:30)고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이 말은 "그 후손 중 아무도 번성치 못하리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스알디엘이 브다야를 낳았으며 브다야는 스룹바벨을 낳은 것이다(대상 3:19).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손자는 종종 아들이라고 불리워졌으며 따라서 브다야는 그의 아버지의 생존시에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0. 이 족보는 주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가 아닌, "마리아의 남편 요셉"(16절)에게 이어져 내려온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족보를 따질 때는 언제나 남자 편으로 따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도 요셉과는 같은 지파, 같은 족속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모친 편으로나 그의 가상적 부친인 요셉 편으로나 함께 다윗 가문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가 육적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요섭에게서 유래된 것은 메시야의 왕국이 다윗에게서 이어온 자연적인 후손에 기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11. 이러한 모든 계통(족보)들이 만나는 중심은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16절)이다. 이 분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갈망하고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였으며, 족장들이 자손을 바랄 때 거룩한 족보에 속하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바라보던 분이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는 이러한 족장들처럼 어둡고 흐린 상태에서 그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나 왕들이 유리(역주:이 주석을 쓸 당시의 유리는 오늘날의 것과 같이 완전 투명체는 아니었음)를 통하여 희미하게 보았던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육신적으로 그리스도와 가까운 자들보다 더 영광스러운 관계를 그리스도와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12:50).

"예수"는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불리운다.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단 9:25), 때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시 2:2)라고 불리워진다. 이러한 특성에 비추어 그는 "네가 그리스도이냐?", 즉 네가 기름 부음 받은 자냐?는 질문을 받으셨다. 다윗은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고(삼상 16:13), 아론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으며(레 8:12), 엘리사(왕상 19:16)와 이사야(사 61:1)는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되었고 자격이 부여되었으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 즉 "그의 동료들보다 뛰어나게 즐거움의 기름으로 바르신 자"로 불리우는 것이다. 기름을 붓는다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으로부터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이는 그들로 역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17절에는 이 모든 족보의 전체적인 요약이 되어있는데 전 족보가 14대씩 세 번으로 특징 있게 묶여져 있다. 첫번째 14대에는 다윗의 가문이 새로 돋아나는, 마치 아침과 같은 느낌을 주며 두번째 14대에는 정오의 대낮같이 찬란하게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세번째 14대에서는 점점 쇠퇴하고 몰락하여 가난한 목수의 가문으로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에 그리스도는 그것에서부터 환하게 비쳐나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마태복음 1:18-25)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는 경외되어야 하며, 따지며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평범한 사람을 만드시는 "성령의 방법"이나 "여자의 태 속에서 어떻게 뼈들이 형성되는가를 알지 못"(전 11:5)하거늘 하물며 동정녀 마리아의 태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형성되셨는가를 알 수 있겠는가! 다윗이 어떻게 그 자신이 "은밀하게 지음을 받았으며,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는가"에 대해 탄복하였을 때(시 139:13-16)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부수된 몇 가지 사실이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여기에서는 보다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Ⅰ. 마리아와 요셉과 정혼함. 우리 주님의 모친인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는데, 완전히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약속한 관계에 있었다. 결혼 의사는 de futuro-미래를 중요시했던 것이라는 말로 엄숙히 선언되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그 약속이 맺어졌다. 신명기 20장7절을 보면 여자와 약혼은 했지만 데려오지 못한 남자의 예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나셨으나 약혼한 처녀에게서 나셨다.

1. 이 사실은 먼저 결혼을 존중히 여겨야할 것을 보여 주며, "결혼을 금하고" 독신을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는 마귀들의 교훈에 대항하여 결혼을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정혼한 마리아보다 더 고귀한 은혜를 받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

2. 동정녀 마리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 수치가 장차 드려날 것이었다. 그녀의 임신은 결혼에 의해 마땅히 가리워져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정당한 것이 되어야만 했다. 어떤 고대인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창녀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질문보다는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질문 받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고 하였다.

3. 동정녀 마리아는 그녀가 젊었을 때 그녀를 인도해 주고 고독과 여행의 동반자가 되며 근심을 함께 나누고 그녀를 도와주는 어떤 사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은 그 당시 홀아비였으며, "예수의 형제들"(13:55)은 요셉의 전처에게서 난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의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추측이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그녀는 "현숙한 여자"였다. 이와 같이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아야"하며, 또한 결혼에서 위로를 얻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면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결혼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또한 이 사실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결혼이란 성급히 할 것이 아니라 신중히 잘 생각해서 해야 하며, 결혼 전에 약혼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나중에 후회할 시간을 "찾는" 것보다는 미리 신중히 고려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좋다.

Ⅱ. 마리아가 약속된 씨를 잉태함. "그들이 동거하기 전에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이것은 실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다. 결혼이 약혼한 후 오랫동안 지연되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에 약혼을 했었지만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잉태된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잉태한 것을 요셉이 알아차린 것은 아마도 마리아가 그녀의 사촌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달 간"(눅 1:56) 머물러 있다가 돌아온 후였을 것이다. 또한 마리아도 구태여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마음속에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나타낼 것이며, 또한 그것이 그가 소유하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잉태한 이 사실이 마리아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리아 자신은 그녀의 잉태가 하나님에게서 비롯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일 것인가? 그녀는 "창녀 취급을 받게"될 지도 몰랐다.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매우 높아진 후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부풀어 오르지 않도록 겸손하게 할 어떤 것, 즉 "육체의 가시"나 "뼈 속의 칼"과 같은 비난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와의 딸들 중에서 동정녀 마리아처럼 높아진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높아짐은 가장 치욕적인 누명을 쓰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안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이 사실로 인하여 괴로워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무죄함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은 계속적으로 평온하고 조용하였으며, 그녀의 모든 주장을 "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겼다. 유의할 것은 선한 양심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자기들의 이름을 깨끗하게 보존하려는 일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으며, 자기들의 고결성과 명예가 대낮의 눈부신 태양처럼 밝혀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Ⅲ. 요셉의 곤경과 문제 해결을 위한 근심. 우리는 요셉에게 당면한 문제, 곧 그의 약혼자가 이와 같이 엄청난 죄의 혐의를 받는 지경에 이르자 얼마나 괴로워했고 실망했었는가를 능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마리아가 정말 이런 여자일까?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기대를 걸었는데 속다니 정말 알 수 없단 말이야!"라고 실망하며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요셉은 착하게 믿었던 마리아가 그런 나쁜 죄를 지었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는 변명되기에는 너무나 악화되었고 사실을 부인 못할 정도로 명백하였다. 이 경우야말로 그의 가슴속에 죽음처럼 도사린 사나이의 무서운 질투심과 한편으로 그가 마리아에게 쏟았던 애정이 갈등으로 치닫던 결정적인 순간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그는 극단적인 해결을 피하려고 했다. 그는 마리아를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려고"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약혼한 처녀"가 행음하면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있다(신 22:23, 24). 그러나 요셉은 그녀를 벌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리아가 범죄 했다 할지라도 아직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그 자신도 역시 그 사실을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여진 요셉의 마음은 이와 비슷한 경우로서 구약에서 "그녀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라고 성급하게 재촉한 유다의 마음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요셉이 이 경우에 한 것처럼 "이 일들을 차분히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우리의 비난이나 판단에서 좀 더 신중을 기한다면 그만큼의 자비와 절제가 더 있게 될 것이다. 그녀를 형벌하는 것을 여기에서는 "그녀를 드러내지 않고"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형벌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in terrorem - 모든 사람이 듣고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경멸하는 자를 벌하고 단순한 자를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엄격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요셉의 온유함을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것이 그에 대한 칭찬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그녀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착한"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으며, 그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은"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했다. 약혼한 처녀가 들판에서 욕을 당했을 때 율법은 그녀가 "소리를 질렀을"것으로 인정하여(신 22:26) 벌하지 않았다. 요셉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리아를 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 사태를 궁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그 이름을 더럽힐 만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칭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유의할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혐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우리는 부드럽게 대하며 처음에는 나쁘게 보이더라도 후에는 더 좋은 것으로 증명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좋게 이해하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Summum jus summainjuria - 율법의 엄격함은 (때로) 최고의 불의가 된다. 우리는 율법의 엄격함을 조절하는 양심의 법정을 "평등의 법정"이라고 부른다. 잘못이 드러난 사람들일지라도 "잠깐 사이에 실수"한 경우가 있으며 따라서 "온유의 정신"을 가지고 대함으로써 본래의 상태로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협은 비록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절제되어야만 한다.

2. 요셉은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피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그는 "가만히 끊으려고", 즉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그런 태도에 이혼장을 줌으로써 이 일을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묻어 버리려고 작정하였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 즉 엄격한 율법 준수자였으므로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끊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녀를 생각하여 이 일을 가능한 비밀히 행하려고 결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해야할 것은 범죄한 사람에 대한 필연적인 책망을 조용히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말은 조용한 가운데서 들리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다투시거나 소리내지" 않으셨다. 기독교적인 사람이나 사려분별은 "허다한 죄를 가리며"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다만 그들과 교제를 끊을 뿐이다.

Ⅳ. 요셉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말미암아 이 곤경을 면함(20,21절). "그가 이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은혜로 그에게 행할 것을 지시하시고 그를 안심케 하였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려는 자들은 모름지기 그들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생각해야"하며 그들 스스로가 심사숙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당황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일을 자신이 궁리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친히 조언하신 것이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르침을 주시려고 하시는 시기는 그들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망설일 때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하는 허다한 처지에서 그 영혼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주의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천사는 아마도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가져다 준 바로 그 천사, 가브리엘인 것 같다. 이제 천사들에 의한 하늘과의 교통, 즉 족장들이 경험하였으나 오랫동안 두절되었던 하늘과의 교통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가 세상에 오시게 될" 때 천사들은 그의 활동에 수종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곤경 가운데서 구출해내기 위하여 얼마나 천사들의 사역을 사용하실 것인가는 우리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일에 대해 확실한 것은 천사들은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사역하는 영들"이라는 것이다.

이 천사는 요셉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종종 말씀하신 방식과 같이 "꿈 속에서" 요셉에게 나타났다. 우리가 매우 조용하고 침착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깨달아 알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하나님의 영은 조용한 물 위에 운행하신다. 이 꿈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헛된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꿈에서,

1. 요셉은 그가 예정했던 결혼을 그대로 진행할 것을 "지시"받았다. 천사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로 하여금 다윗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아는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와 그와의 관계에 대한 이 놀라운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했다. 때때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때 그들은 그 명예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가난한 목수에게 그의 고귀한 출신가문을 생각케 할 필요가 있었다. 즉 "요셉아, 네 자신을 생각해 보라. 너는 메시야가 오실 다윗 혈통의 자손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참된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두려워 말라.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다. 너의 출생, 너의 중생(重生)의 고귀성을 잊지 말라"고.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는 말도 위와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요셉은 마리아가 음행하여 임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녀를 데려오면" 그 자신이 죄책이나 비난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무서워했던 것이다. 아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또한 사실이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마리아는 요셉에게 자신이 잉태한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며, 또한 요셉도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내 주의 모친"이라고 한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눅 1:43).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셉은 자기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게 된 마리아와 감히 결혼하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이 무엇에서 일어났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는 이 한 마디의 말에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의심이 풀어져서 만족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은혜라는 사실이다.

2. 여기에서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아내가 현재 잉태하고 있다는 "거룩한 사실"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잉태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불결함에 동참하는 위험에서 벗어났으며 그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최고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셉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들었다.

(1)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자연의 능력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를 창조하신 성령께서는 이제 세계의 구주를 창조하셨으며 약속된 대로 "한 몸을 예비하신" 것이다(히 10:5). 그러므로 성경은 그가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신 둘째 아담"이라고 말한다(고전 15:4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모친의 본체를 나누어 가지심으로서 "태의 열매"(눅 1:42)라고 불리우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성품을 가지시기는 하셨지만 인성(人性)의 부패와 타락을 피할 뿐만 아니라 죄악 중에 잉태되고 조성되지 않으시기 위하여 일반적인 "출생방식"과는 다르게 잉태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는 알렉산더왕의 어머니처럼 신적인 능력에 의해 앵태되었다고 허황되게 주장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우리 주님의 모친 이외는 그렇게 잉태된 사람이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이름은 참으로 다른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묘"하다.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가 자신에게 행해진 영광을 널리 선전했다는 말을 읽어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는 이 사실을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셨던 것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영광은 겸손한 자를 위해 보존되어 있다.

(2) 그녀가 "세상의 구주"를 낳을 것이라는 사실이다(21절).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는 말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암시되어 있다.

① 낳을 아들에게 주어질 "이름을 예수, 즉 구원자라고 하라"는 이름에서 암시되어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으며 헬라어와 어미를 맞추기 위해 고쳐졌을 뿐이다. 여호수아는 70인역에서 "예수"(행 7:45; 히 4:8)로 불리워진다. 구약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는데 그들은 둘 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전형이었다. 그 중 하나는 최초의 가나안 정복시에 이스라엘의 대장이었던 여호수아이며, 또 다른 사람은 바벨론 포로 후 두 번째 귀환 때에 대제사장이었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이다(슥 6:11, 12).

그리스도는 우리의 여호수아로서, 우리 "구원의 대장"과 "우리 신앙 고백의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그는 우리의 구세주, 즉 그는 모세를 대신하여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친히 우리를 위해 주시는" 여호수아이시다. 여호수아는 "호세아"라고도 불리웠지만 모세는 그 이름에 여호와의 첫 음절을 덧붙여 "여호수아"라고 하였다(민 13:16). 이것은 이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질 메시야가 "여호와'가 되실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있으며, 그에게서만 구원이 있는 것이다.

②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이유에 암시되어 있다. 즉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구절에서 "자기 백성"이란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그는 자기 백성에게 왔으나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 또한 "그들 자신"에 의해 그에게 드린 모든 자들을 말한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왕이시며 옛 이스라엘의 사사들처럼 그들을 위해 "구원을 베푸신다".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되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며,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허물 된 죄에서 구원하시며 또한 "그의 은혜의 성령"으로 죄의 지배에서 구원하신다.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그들을 진노와 저주, 그리고 현재와 이후의 모든 비참에서 구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들의 죄 가운데서"(in)가 아니라 "죄로부터"(from)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그들을 구속하시되 "죄"를 짓는데 자유함(a libetty to sin)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함(a liberty from sins)을 위하여, 또한 "모든 불법에서 구속"(딛 2:14)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사람 가운데서"(계 14:4) 구속함을 받아 "죄인들과는 구별되신" 그 자신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떠나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그의 백성으로" 맡기는 자들은 구주와 그가 "이루신" 큰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롬 11:26).

Ⅴ.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 말씀이 성취됨. 유대인 출신인 이 복음서 기자는 유대인들에게 이 복음을 기록하면서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더욱 빈번히 이 점을 관찰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약의 예언들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 예수가 바로 "오실 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며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는 이 예수가 바로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한" 그 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이루어진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약속하셨던 표적, 즉 "보라, 처녀가 잉태하리니"(사 7:14)였다. 이곳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산혜립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라고 권면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유대 백성 중 다윗의 집에서 나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도록 지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유대 민족이나 다윗의 집이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남겨둔 이러한 영광과 축복이 있는 한 그 누구도 버림을 받아 멸망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역 교회를 위하여 베푸신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큰 구원의 모형과 상징에 불과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이루신다고 한다면 더 적은 일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이곳에 인용된 예언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 말은 주의와 찬탄을 요구하는 말이다. 이 말로 예언이 시작된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현현되신" 사실이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하신 경건의 비밀임을 이 예언이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주어진 표적은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처녀가 잉태할 것이며" 그녀로 말미암아 메시야가 "육신으로" 현현되실 것이었다. 히브리어의 "알마"란 말은 엄밀한 의미로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오니"라고 고백한 것과 같은 "동정녀"를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표적으로 주어진 이 말씀이 의도되었던 것과 같이 기이한 표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메시야가 "여인의 후손"이 될 것이라는 말씀에서 메시야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암시되었다. 그는 비록 여인의 후손이 되시기는 했지만 남자의 후손이 되신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것은 그의 탄생이 "초자연적"이고 전혀 특수한 것이 되어야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흠 없고" 순결하며 어떠한 죄의 오점도 없으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여왕이나 왕비"에게서 태어나시지 않으신 것은 그가 외적인 영광이나 화려함으로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것은 우리들에게 영적인 순결과 모든 감각적인 향락에 대해 죽어야 할 것을 가르치며 또한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 "정숙한 처녀"로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과 육욕으로부터 "자신들을 깨끗하게 보존"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이 표적에 의해 입증된 진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임마누엘"이 되실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불리워지리라"는 말은 그가 "우리의 의(義)이신 주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신비스러운 이름이면서도 매우 귀중한 이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더불어 "화목케"하시고, 평화를 누리시며, 그 자신과 더불어 언약과 교제를 맺으신다. 유대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서" 모형과 그림자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는 - 그것은 아름다운 "쇄귀나"(말씀)였다 -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과 일치를 위하여 두 성품(神性과 人性)이 중보자의 한 인격 안에 결합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조처인가!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과 사람 양편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완전하신 중재자, 즉 중개자(仲介者)가 되셨으며, 그러므로 그는 두 양성(兩性)에 함께 참여하실 수 있다. 보라, 여기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오묘한 신비와 가장 풍성한 자비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연"이란 빛(역주:직각)에 비추어 하나님이 "우리 위에 초월"해 계심을 알 수 있으며, "율법"이란 빛에 비추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빛에 비추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과 (더우기) 우리의 관심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이 되심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구속자는 자기의 사랑을 위탁하였다. 우리는 "임마누엘"이라는 그리스도의 명칭과 복음적 교회에 주어진 "여호와 샴마"(겔 48:35)-즉 "주님은 거기에 계신다"라는 명칭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가 "예수"라고 불리워진 것은 그가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워질 것이라는 예언이 그 계획과 의도에 있어서 성취되었다고 말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만일 그가 "임마누엘"-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 아니셨더라면, "예수"-즉 "구세주"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합일"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계획하셨던 것인바,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한 것은 우리의 큰 행복이며,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신 것은 우리의 큰 의무이다.

Ⅵ.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24절). "잠에서 깨어난 후" 요셉은 꿈에서 받은 감동으로 말미암아 "천사가 그에게 명한 대로", 비록 그것이 이전에 지녔던 감정과 의도에 위배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행하여 "아내를 데려왔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재빠르게, 지체함이 없이, 기쁘게, 사소한 논쟁도 없이 행하였으며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에 불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이와 같은 특별한 지시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의심스러운 경우에 여러 가지 방법, 즉 섭리의 암시나 양심의 갈등, 신실한 친구의 충고 등을 통하여 그의 의도를 전달하신다. 이러한 모든 방법들을 통해, 그러나 기록된 말씀(성경)의 일반적인 규칙을 적용하면서 우리 삶의 모든 단계, 특히 이 요셉의 경우와 같은 삶의 위대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Ⅶ.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25절). "마리아는 맏아들을 낳았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상황이 누가복음 2장 1절 이하에 충분히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결코 유산(流産)되지 않고 때가 차면 반드시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잉태된 것은 종종 유산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혼 속에 "형성"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루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은혜로 "잉태"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영광 중에 태어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더 살펴보아야 하겠다.

1. 요셉는 그의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린 후에도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된 이 거룩한 아기를 배고 있는 동안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즉 "그가 아기를 낳기까지 그와 동침치 아니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모친이 영원한 동정녀이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제몰(Jerome)은 이 사실을 부인하는 헬비디우스(Helvidius)에게 심히 분노하였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휘트비(Whitby) 박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려고 한다. 즉 "그녀가 맏아들을 낳기까지 요셉이 그녀와 동침치 않았다"는 말씀은 동침치 말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후에는 율법에 따라(출 21:10)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2. 그리스도는 "맏아들"이었다. 성경의 어법에 의한다면 그의 모친이 그 후 다른 아이들을 낳지 않았어도 그렇게 불리울 수가 있다. 그리스도가 그녀의 "맏아들"이라고 불리우신 사실에는 신비가 없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피조물 중 처음 난 자", 즉 만물의 상속자이시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것"은 그가 만유 위에 뛰어나시기 위함이다.

3. 요셉은 그에게 주어진 지시에 따라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신 사실에서 암시된 것과 같이 그를 구세주로 "임명"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그가 구주로 임명받으신 사실과 부합하도록 우리는 그를 "우리의 구주 예수"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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