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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찰스피니의 주옥같은 글들

기독교 세계

by Bliss Yeo 2011. 3. 1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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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피니의 회고록 중에서.

 

1821년의 어느 일요일 날 아침에 나는 내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단번에 결정짓기 위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나님과 평화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직장의 일이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아주 독하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그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를 산만케 하는 모든 일을 피하고 오직 내 영혼의 구원을 얻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가능한 한 최고로 엄격하고 철저하게 이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내게는 직장 일이 많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월요일이나 화요일에는 업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데에 바칠 수 있었다.

 

잘 몰랐지만 나는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가는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기도회에 아주 열심히 참석했고 아담스(Adams)에 있는 동안에 종교에 대해서 열성적이었다. 내가 아주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교인들은 나를 아주 열렬한 탐구자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내가 내 영혼의 구원의 문제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도할 때 단지 입 속에서 속삭이는 듯이 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누가 보지 못하도록 방문의 열쇠구멍을 막고서 기도했다. 그전에 나는 성경을 법전들과 함께 책상 위에 두었다. 나는 다른 책을 읽다가 발견되기는 했어도 성경을 읽다가 발견되는 부끄러움은 한번도 없었다.

 

영혼의 구원에 관한 진지한 관심을 나타낸 다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을 보이지 않는데 감추어 두었다. 성경을 읽는 중에 누가 들어오면 그 성경을 읽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법률서적을 성경 위에 던지곤 하였다. 전에는 아무하고도 이런 문제를 나눌 수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누구하고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목사님을 보는 것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을 목사님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나를 이해하고 나를 적절하게 지도해 주실 것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같은 이유 때문에 교회의 장로들이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도 꺼렸다. 나의 생각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 부끄러웠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나를 잘못되게 할까봐 두려웠다. 나는 오직 성경 속에 나 자신을 가두어 놓았다.

 

월요일과 화요일의 양일 간에 나에게서 죄에 대한 자책이 더욱 가중되었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지는 것 같았다.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기도도 되지 않았다. 숨소리보다도 더 크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장소만 있다면 기도로써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치심으로 인해 나는 그 문제에 관한 한 가능한 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내가 영혼의 구원의 문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화요일 밤에는 신경이 곤두서서 마치 곧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침이 되기까지 최대한으로 나 자신을 진정시켰다.

이른 아침에 나는 사무실로 나아갔다. 그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에 나에게 이러한 음성이 나의 내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 "너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네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노력하느냐?"

 

바로 이 순간에 복음의 구원에 관한 전체적인 문제가 나의 마음속에 놀라운 방식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때에 내 생애에 가장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재성과 충족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의 사역은 완성된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나를 추천하기 위해 나의 의를 가지거나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복음의 구원은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것은 충분하고도 완전한 것이었다. 내 편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나의 죄를 포기하는 것을 동의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구원은 나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구주로서 보여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전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내면의 음성이 나를 사로잡은 그곳에서 멈추었다. 얼마나 오랜 동안 그곳에서 서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명백한 계시가 내 마음에 주어진 후 "너는 그것을 지금 이 시간에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대답했다. "제가 그것을 수락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겠습니다."

 

날씨가 좋을 때면 나는 거의 매일 북쪽 위의 숲 속을 거닐었다. 그때는 10월이라 산책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그렇지만 나는 사무실로 가지 않고 숲 속으로 갔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내가 혼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기도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에 또 다시 나의 마음에 교만이 되살아났다. 내가 언덕 위를 걸어갈 때 누가 나를 보고 내가 기도하러 간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가 나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런 의심을 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고 또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될 때까지 담 밑으로 숨어 다녔다. 그때에 나는 한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엇갈려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빈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종의 방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그곳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끓고 기도하려 했다. 그때 내가 방향을 바꾸어 숲 속으로 가기 시작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나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겠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내려오지 않겠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걸어올라 가면서 나는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겠다"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막상 기도하려하자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남이 듣지 않는 곳에 가면 마음껏 기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곳에 와서 기도하려 하니 기도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 아무런 드릴 말씀이 없었다. 몇 마디 이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기도하는데 나뭇잎 흔들거리는 소리를 듣고서는 멈추어 누가 오는가하고 위를 쳐다보곤 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인가를 거듭했다.

 

마침내 나는 급속히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내 마음을 보았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기도할 수 없어,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죽어있어, 기도하려는 마음이 없어." 숲을 떠나기 전에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내 자신을 나무랬다. 애는 썼으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었다. 나의 내적 영혼은 완강하게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가려하지 않았다. 이미 때가 늦어서 하나님께서 포기하셨고 소망도 지나가 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약속했던 나의 성급함이 떠올랐다. 그 약속이 나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지만 나는 맹세를 깨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매우 의기소침해졌고 실망했다. 너무 기운이 없어 무릎을 끓고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접근해 오는 것 같아 눈을 떴다. 그 순간 나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나의 최대의 장애물은 자존심이라는 것이었다. 무릎을 끓고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볼까봐 두려워하는 나의 사악함에 대한 인식이 나를 크게 사로잡아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소리를 질렀다. 이 땅의 모든 사람과 지옥의 악마가 나를 둘러싼다 할지라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나 같은 타락한 죄인이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자백한 것을 부끄러워하다니!" 그 죄는 끔직하고 무한해 보였다.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잘못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에 한 성경 구절이 번개 불처럼 내 마음속을 스쳐갔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나는 즉각적으로 이 구절을 마음속에 붙잡았다. 전에는 성경을 지적으로 믿었다. 믿음은 지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탁이라는 진리를 결코 깨닫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마치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만큼 의식하고 있었다. 한번도 그 구절을 읽은 적이 없지만 그 말씀이 성경 구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들린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주님 저는 당신의 말씀에 매달립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전심으로 찾고 있다는 것과 당신께 기도하게 위해서 제가 여기 와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또한 당신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어 내가 맹세한 것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성령께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이라는 말씀을 강조하시는 것 같았다. 나의 마음을 무겁게 누른 그 시간에 대한 질문은 현재가 그 해답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주님께 속삭였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으며, 나를 찾으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했다.

그때 하나님은 나에게 다른 많은 약속들을 주셨다. 주님은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귀한 약속의 말씀들을 주셨다. 그 약속들이 얼마나 귀하고 신실했는지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그 말씀들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진리로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확언으로 받아들였다. 그 말씀들이 나의 지성보다는 심성에 부딪혀오는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의 자발적인 이해의 능력 안에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물에 빠진 사람이 붙잡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붙잡고 나의 것으로 삼았다.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오랫동안 약속들을 나의 것으로 삼았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의 기도로 마음이 충만해져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길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내가 회심했는지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었고 다만 " 내가 회심했으면 복음을 전하리라"고 말한 것을 숲 속을 거닐면서 회상했다.

내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고 평안했다. 나는 혼자서 "이게 왠일일까? 내가 성령을 근심케 해서 떠나보냈음이 분명해. 나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모두 잃어버렸어. 내 영혼에 대한 염려라고는 전혀 없잖아. 성령님이 나를 떠나가신 것이 분명해"라고 중얼거렸다. "내 평생에서 이렇게 영혼의 구원에 관하여 무관심했던 적이 없었는데."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겠다고 말씀드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내가 했던 많은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성령께서 나를 떠나시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붙잡는 것은 신성모독은 아닐지라도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단정했다. 내가 흥분해서 성령을 근심케 했으며 아마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 같다고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조용히 마을로 걸어내려 왔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완벽할 정도로 평온했다, 너무 고요해서 만물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숲으로 들어간 간 때는 아침 식사 직후였는데, 마을로 돌아 왔을 때는 벌써 점심때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이 흘렀는지를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마치 숲에 잠깐 들어갔다 온 것 같았다.

이런 마음의 평정은 어찌된 이유인가? 나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되살리려고 애를 썼다. 나를 누루고 있던 죄짐 아래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죄에 대한 감각이 즉 나의 현재의 죄와 죄책에 대한 감각이 내 의식에서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나 같은 죄인이 죄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다니?"라고 중얼거렸다.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 염려하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는 마음이 너무 고요하고 평안해서 내가 성령을 슬프게 해서 그분이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닌가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한 염려가 전혀 생겨나지 않았다. 내 마음의 평안은 너무도 컸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을 감미롭게 했고 심오한 영적 평안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커다란 신비였다

 

식욕이 나지 않아 점심을 먹지 못했다. 그래서 사무실로 가서 모씨와 같이 식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나는 첼로를 집어들고는 늘 하던 대로 찬송가를 몇 곡 연주하며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자마자 울음이 북받쳐 올랐다. 온통 마음이 눈물로 가득 차서 감정이 북받치지 않고는 노래할 수가 없었다. 놀라서 눈물을 그치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눈물을 그치려고 애쓴 뒤 나는 노래를 멈추고 악기를 걸어두었다.

점심식사 시간이 지난 뒤 우리의 책과 사무실 비품을 다른 사무실로 옮겼다. 그 일을 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오후 내내 아무런 말도 서로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심오한 평정이 있었다. 나의 생각과 감정 속에는 대단히 감미로운 평안이 있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지는 것 같았고 어떤 것도 나를 짜증나게 하거나 괴롭게 하지 못했다.

 

저녁이 되기 전 나는 사무실에 혼자 있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다시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지 신앙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내 영혼에 대한 염려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도를 계속하려고 애썼다.

저녁쯤에 책과 비품들을 다 정리했는데 그 날 나는 혼자 있으려는 생각으로 화로에 불을 지폈다. 어둠이 깔리자 모씨는 모든 정돈이 끝난 것을 보고 작별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를 문까지 바래다주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내 마음은 마치 눈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감정이 일어나서 "나의 온 영혼을 하나님께 쏟아 놓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찼다. 내 영혼의 감정이 북받쳐 올라 나는 기도하기 위해 사무실 뒷방으로 달려갔다.

그 방에는 불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곳은 내게 아주 익숙한 것 같아 보였다. 그곳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을 때 나는 마치 주 예수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 같았다. 마치 살아있는 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분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자신의 발 앞에 거꾸러뜨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 같았다. 주님이 내 앞에 서 계신 것이 현실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엎드리어 내 영혼을 쏟아 부었다. 어린애처럼 소리내어 울었고 흐느끼는 음성으로 죄를 자백했다. 그렇지만 내가 주님께 감동을 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갖지 못했다.

이런 상태가 상당히 오랜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윽고 내 마음이 차분해져서 뒷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커다란 나무 위에 붙여두었던 불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내가 불가의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나는 놀라운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전혀 예측하지 않은 것이고 그런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을 때 성령께서 나의 몸과 영혼을 꿰뚫고 지나가시는 것처럼 나에게 임했다. 그것은 마치 전류가 내게 통하는 것 같이 임했다. 그것은 참으로 사랑의 파도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숨결과도 같았다. 거대한 날개처럼 나를 부채질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내 마음에 스며들어온 그 놀라운 사랑을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나는 있는 그대로 울부짖었던 것이다. 이 물결이 몰려오고 또 몰려왔기에 나는 드디어 나는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물결이 계속 내게 밀려오면 나는 죽을 것 같습니다 주여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었다.

 

성령세례가 나의 마음을 통과해서 흐르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성가대원으로 있던 한 청년이 -나는 당시에 그 교회의 지휘자로 있었다- 나를 만나러 늦은 시간에 왔었다. 내가 큰소리로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게 말했다 "피니씨 어디가 좋지 않습니까?"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나는 애써 대답했다. "아니 단지 너무 행복해서 죽겠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는 몇 분 뒤에 교회의 장로 한 분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장로의 상점이 바로 우리 사무실 건너편에 있었다. 이 장로는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었는데, 나를 경계하는 듯이 보였다. 일찍이 나는 그가 웃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가 들어왔을 때 나는 청년이 그 장로를 데리러 갔을 때와 마찬가지의 상태로 있었다. 그가 나의 느낌이 어떤지를 물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했다. 내 말을 듣는 동안 그는 아무런 말이 없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마음의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웃음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웃에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나와 아주 친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목사님은 자주 그 청년과 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했고 그로 하여금 나를 통해서 나쁜 물이 들지 않을까를 그에게 경계시켰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목사님은 내가 신앙에 있어서 진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깊이 사귀면 회심하지 못할 것이라고 귀뜸해 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회심한 뒤에 이 청년도 회심했다. 그 청년은 자신이 여러 번 게일 목사님과 이야기했지만 그의 설교보다도 내가 말해주는 이야기에서 더 깊은 영향을 입었다고 언젠가 털어놓았다. 사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을 이 청년에게 많이 이야기 해주었다.

 

내가 체험한 그 느낌을 그 장로와 성가대원이 그 젊은이에게 말로 설명하고 있을 때에 바로 이 청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처음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나중에 그가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반쯤 무릎을 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는 고뇌에 찬 마음으로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오"라고 외쳤다. 장로와 그 교인은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기도할 때에 나도 그를 위해서 혼자서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곧 돌아갔고 나는 홀로 있게 되었다.

그러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 장로는 그런 식으로 웃었을까? 내가 망상에 빠졌거나 미쳤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생각은 나의 마음의 일말의 우울함을 가져다 주었다. 나 같은 죄인이 그 젊은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나 있는지 회의가 있었다. 먹구름이 나를 뒤덮는 것 같았다. 의지할 수 있는 안식처가 아무데도 없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에 갈등은 없었으나 내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내가 받은 성령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혹이 나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이내 잠이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넘쳐흘러 나는 다시 잠이 깨었다. 너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다시 잠이 들었는데 똑같은 방식으로 잠이 깨고 말았다. 잠이 깼을 때에는 다시 그런 의심의 유혹이 밀려왔다. 그때에는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식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잠들기만 하면 마음속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다시 깨곤 했다. 밤늦게까지 이런 식으로 되풀이하다가 드디어 약간 깊은 잠이 들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밝은 햇살이 환하게 방을 비쳤다. 이 햇살이 준 그 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 받았던 똑같은 성령의 세례가 즉시 내게 임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무릎을 끓고 기쁨으로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자 성령의 세례에 압도되어 잠시 하나님께 내 영혼을 쏟아 놓았다. 이날 아침의 세례는 부드러운 책망을 수반하고 있었다. 성령께서 지금도 의심하느냐? 의심하느냐?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울부짖었다. "아닙니다. 주님,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문제를 너무나도 말끔하게 해결해 주셨고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마음을 사로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 교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은 적이 없었다. 전에는 그 교리가 복음의 근본이 된다는 알지 못했었다. 사실상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다. 이제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숲 속에서 믿게 되었던 그 순간에 모든 정죄 의식이 내 마음에서 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죄의식이나 정죄 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나의 죄의식은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내 죄는 소멸된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필요로 했던 계시였던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 수 있는 한 나는 죄를 짓지 않은 상태로 있게 되었다. 내가 항상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 대신에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서 넘쳐흘렀다. 나의 잔이 축복과 사랑으로 넘쳐흘렀다. 내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죄를 짓고 있다는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죄의 감정을 다시는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이때의 칭의의 경험을 당시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찰스 피니(A.D. 1792-1875)는 19세기 미국 대부흥을 가져온 그릇이다.

그는 부흥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고, 죄인들에게는 과거를 뉘우치는 것임을 보았다. 퇴보한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주의하여 기울이도록 일깨우고 교정하였다. 믿는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되고 확대되는 것과 그들의 생활 안에서의 영광스러운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굴복시킨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1792년 8월 29일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군의 와렌이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소설가의 소설을 애독하셨던 아버지는 소설 속의 인물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찰스 그랜더슨이라고 지으셨습니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믿음은 별로 독실한 편이 못되었습니다.

나는 성장하면서 우리 집에서 기도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도 내 나이 29세 때 법률에 나오는 모세오경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사서 읽게 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문학 분야에 뛰어났고, 고전어를 연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지도해 주던 선생님의 권고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들을 포기했습니다. 훗날 학교를 같이 설립하자는 그 선생님의 제안도 어머님의 병환으로 인해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길들이 막혀진 것 같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들어선 그 법률가의 길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나는 내가 죄인임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냉담한 척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느덧 간절히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날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서, 이제 죄를 끊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린 후로는, 별로 선하지 못한 의뢰인들의 법적 탈출구나 만들어 주는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변호사 일을 계속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없었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세상적인 즐거움과 재미에는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반면 이 세상의 어떤 수고도, 죽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음을 알리근 그 일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또 한 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송 의뢰를 맡은 변호인으로서, 그분의 탄원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는데 나의 일생을 드리기로 말입니다.

 

나는 내가 맡은 그리스도의 소송에서 이기고자 하였고, 설교의 내용에 그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눈에는 그리스도의 소송에는 능력있는 대변인이 참으로 드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호소하는 것처럼 어떤 변호사가 자기 소송 의뢰인의 무죄를 변호한다면, 단 한 건도 승소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묵상할 때면,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제목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나아가 설교로써 넘치도록 쏟아놓곤 했습니다. 그러한 나의 설교는, 설교 내용이나 감상하며 설교자에게 칭찬이나 던져 주던 나태한 회중들에게 강력한 찔림이 되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통해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거나, 격렬한 반대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죄인들의 완악한 마음들이 부서져서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술집이 기도회 장소로, 호텔이 부흥의 장소로 돌변하고, 도시 전체가 회개의 물결에 휩싸이며, 지속적인 기도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끝까지 반대하던 자들 중에는 졸도로 죽거나, 침대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목사도 있었습니다.

강력한 복음 전파와 풍성한 기도에 힘입어 부흥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앤월프로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의 손에 교회 열쇠가 넘어가 있었습니다. 상황이 험악했지만,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숲속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기도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는 힘차고 능력있는 설교를 할 수도 없었고, 나의 언변이나 지혜로는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설교를 통해 드디어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쏟아져 내리는 우박과 같은 강렬한 사랑을 쏟아부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임 장소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에반즈 밀즈, 앤월프, 가버너, 유티카, 로마... 가는 곳마다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주님께 돌아오는 부흥이 있었으며, 그 부흥 뒤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그를 통한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흥이 일어나자 무시 무시한 반대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나와 내쉬 감독(나의 기도의 동역자)의 화상을 만들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예배 모임중에 소란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음모와 거짓말과 거짓 보고가 난무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모두 악당이라고 부른다", "능력에 찬 부흥회라고 떠들지만 결과는 별로 없거나 전무하다", "젊은 개종자들을 분별없이 이용한다", "어중이 떠중이에게 연설을 하게 하며 난잡한 모임 속에서 기도들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난에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습니다. 또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반대 세력을 진압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오직 신뢰로써 나를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한 곳만을 바라보며 전진해 나갈 뿐이었습니다. 나는 부흥을 위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반대에 대해서도 오직 그분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반대자들의 공격을 뒤엎으셨고, 주요 도시들에 있는 교회 문들이 내 앞에 열리도록 나의 이름을 하나님의 일터로 널리 퍼지게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을 시작한 지 15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에게 교수직의 제의가 들어왔는데, 나는 젊은 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목적으로 그 제의를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의 설립자가 파산해버려 학교는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나 역시 그해 겨울 동안 나의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었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나는 여행용 가방을 팔아서 그것으로 한 마리 암소를 사야만 했습니다.

 

가방을 팔던 그 날, 나는 하나님께 기도로 이 사실을 아뢰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날아온 한 통의 편지에 200불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을 보내준 형제는 그 뒤로도 몇해 동안 매년 600불씩 나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학교의 부채도 만 이천 권이나 팔렸던 나의 저서 <피니의 부흥 강의>에 감명받은 영국인들에 의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수직을 수락한 뒤에도 나의 사역을 강의실에만 한정시키길 원치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는 매해 겨울에 부흥회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나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과의 맹세를 충실히 지켜왔으며, 부흥의 물결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부흥사로서, 목사로서, 저술가로서, 교수로서 나를 쓰셔서 많은 영혼들을 그분께로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수많은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이나 지도 교수나 다른 목사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로지 성경을 나의 교본으로, 성령님을 나의 교사로, 기도를 나의 힘으로 삼았고, 따라서 그분의 사역의 놀라운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세기의 3/4에 달하는 나의 생애가 다하기까지 그분의 일은 계속되었으며, 주님의 일하심으로 50만 명의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왔습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이끌어 준 것은 나의 지혜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나의 무지와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심만을 간절히 구했고,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나를 친히 이끌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모든 사역의 열매들을 그분의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다시 인생의 기회들이 주어진다해도, 나는 40여 년이 넘도록 이 부흥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이 일에 다시 쓰이고자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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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피니의 부흥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이 구절은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살던 하박국 선지자가 자기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내다 보고 한 말이다. 머지않아 자기 나라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는 하박국 선지자의 심적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번민 속에서 하박국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하박국의 이말은 마치 이런 것과 같았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파멸되지는 않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두려움의 날들 중에 주의 심판을 목격하고 우리들 가운데 참된 믿음이 되살아나게 하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옵소서.”

참된 기독교는 사람의 일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다. 참된 기독교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물론 우리는 큰 죄인이요 순종하길 몹시 꺼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감화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시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감화하실 필요가 없으시다면-하나님게 순종하려는 바람이 본래부터 우리에게 있다면-“여호와여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필요도 전혀 없다.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전적으로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참된 기독교의 부흥”이란 영적 침체 또는 영적 타락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 동안 역사 속에서 참된 기독교의 부흥이 있게 된 것은 거의 전부 신앙 부흥 운동을 통해서였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순종의 길로 인도하시기에 앞서 그들 가운데 큰 능력이 나나나는 각성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의 흥분성(excitability)을 이용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나태해 있다. 많은 일들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게 되며, 또한 그런 일들이 복음의 영향력을 방해하므로, 흥분의 파도가 아주 높아져서 영적 장애물들을 전부 휩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흥분을 불러 일으키셔야 한다. 영적 나태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우선 철저하게 각성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그들은 순종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억누룰 수 있을 것이다.

흥분된 느낌이 영적인 것은 아니다. 그 자체는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를 방해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흥분되어 있는 욕망, 욕구, 감정들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의지는 어떤 의미에서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구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각성시켜서 죄의식과 위기의식을 갖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감정과 욕구에 맞서는 흥분을 일으키셔야만 한다. 반대-감정이 강력하게 생길 때 세상적 욕망의 세력은 무너지게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순종하기에 자유로운 의지 상태에 있게 된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회고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온 대각성의 시기라는 특별한 시기를 통해서 그들 가운데 신앙을 유지시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부흥을 체험한 뒤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이 되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또 한차례의 각성 운동을 일으키시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또다시 성령을 부어 주시는 사건들을 일으키시기 전까지 그들의 신앙은 계속 퇴보했다. 방해가 새로이 시작됐을 때 신앙은 타락했고, 그 백성은 다시금 사치, 우상, 교만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같은 면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는 안정성이 매우 적다. 만일 영적 감정들이 일깨워지고, 또 일깨워진 그 흥분 상태를 유지하면서 세상적인 감정들에 맞서고, 그래서 영적 흥분으로 가득하게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영적 지식이 매우 빈곤하고 또 영적 원칙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면에서 각성하지 않는 한 마땅히 행할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하는 일을 조금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부흥의 일은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아마도 천년 왕국이 올 때까지 계속 그럴 것이며- 참된 기독교는 주로 이런 영적 각성 운동들을 통해서 도모 될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주기적인 영적 각성 운동들 없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건실하게 행하게 하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또 자주 노력해 왔는가! 많은 건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적 흥분을 일으키는 일 없이 점진적으로 세속적인 사람들을 모아들이면서 한결같이 전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이론적으로는 훌륭해 보일지라도, 현실은 그 이론의 무익함을 입증한다. 교회가 깨어 있기에 충분한 지식과 불변의 원칙들을 소유하고 있다면 느리지만 평탄한 행로를 서서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의 빛을 받는 일은 매우 적고 또한 방해 세력은 심히 큰 상황에 놓여 있다면 무슨 특별한 각성 없이는 꾸준히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천년 왕국 기간에는 아마도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흥분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밝은 계시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게 될 것이고, 순종을 방해하는 세력들은 제거될 것이며, 온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몸에 배인 꾸준한 순종의 행보를 걸을 것이다. 온 교회는 굳게 서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품을 것이요, 또한 그 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야할 것이다. 어린 자녀들은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행하도록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흥의 열기가 식을 때도 교회의 경건을 빼앗아 가는 세속적인 것, 유행, 탐욕 등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교회가 이런 흥분을 필요로 하지 않고 꾸준하게 순종의 길로 향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기에 적절치 못할 수 있다. 기독교가 세상에서 항상 영향력을 널리 끼쳐야 한다면, 이 흥분만으론 그렇게 될 수 없다. 즉 이와 같은 주기적인 흥분은 극복되어야 한다.

또 천년 왕국에서는 이처럼 잠에서 깨어나고 잠에 빠지는 일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많은 시간을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즉 이따금씩 깨어나 눈을 비비고, 펄쩍펄쩍 뛰며, 잠시동안 고함을 치다가 다시 잠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목사들도 교회를 향해서 도전해 오는 세상 세력의 물결에 저항하기 위해서 자신들 주위에 모래 주머니로 방어벽을 쌓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계에서 각성 운동 없이 기독교를 더 발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의 커다란 정치적 불안을 비롯한 그 밖의 불안들은 영혼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게 하는 기독교의 대적들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러한 사태들은 영적 충격 요법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이 기독교의 원칙들을 수용하고 더 이상 반 기독교적인 흥분들이 없을 때까지, 충격을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충격, 즉 영적 각성을 통하지 않고 참된 기독교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헛수고일 따름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참되다.

게다가 개종하지 않은 나라에서 참기독교는 부흥 운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선교사들은 교육이나 그 밖의 다른 주의 깊고 점진적인 개선들을 통해서 기독교를 보급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평소대로 움직이는 한, 참 기독교는 이런 방법으로 보급되지 않을 것이다. 잠재적 도덕 능력들을 일깨우며 홍수처럼 밀려드는 죄의 세력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각성 운동들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일해 오셨다. 하나님은 한 가지 이유에서 우리를 자극하기로 작정하신다. 그 한 가지 이유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길 꺼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감동을 받기 전까지는 좀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신앙적”이 되면, 친구들이 자기를 비웃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우상들을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정된 생활에 이르기까지 또는 어떤 탐욕적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회개를 연기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제하지 못할 정도로 자극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거짓 신들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으며, 또는 자신들의 야망에 찬 계획들을 결코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우리가 이 장에서 논의하게 될 것들의 서론에 해당할 뿐이다. 이제 나는 다음 세 가지 부분을 살필 것이다.

1. 참된 기독교 부흥이 아닌 것.

2. 참된 기독교 부흥인 것.

3. 부흥을 가져다 주는 요인들.

참된 기독교 부흥은 이적이 아니다.

1. 이적이란 항상 하나님의 간섭, 곧 하나님에 의한 자연법칙의 일시적 정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흥이란 이적이 아니다. 사물의 법칙들과 사람들의 마음의 정상적인 기능은 여전히 작용한다. 부흥은 그러한 것들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2. “이적”의 두 번째 정의, 곧 자연의 세력보다 위에 있는 어떤 것이란 의미에서 부흥은 이적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 안에는 자연의 일반적인 세력들을 초월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부흥은 오로지 자연의 세력의 올바른 행사 안에 존재할 뿐, 그 밖의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때, 사람들은 이전에는 할 수 없던 면들에서 열심히 노력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이전에 갖고 있었던 능력들을 다른 방면에 쏟을 뿐이다. 즉 그것들을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3. 부흥은 어떤 의미에서든 이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부흥이란, 도구들과 방편들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다른 어떤 결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방도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데서 논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한 가지 결과이다. 이적이 부흥에 앞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도들은 참으로 자신들의 메시지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리고 그 메시지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적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이적이 부흥은 아니었다. 이적과 그것에 뒤따라온 부흥은 완전히 별개였다. 사도 시대의 부흥들은 이적과 연관이 있었지만, 부흥 자체가 이적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신 방도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도록 주신 방도들은 당연히 부흥을 낳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지정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도구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부흥을 가져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뿌려진 씨앗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하나님은 부흥을 일으키실 때, 씨앗으로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까지 직접적인 영향력과 섭리를 행사하시는 것같이 일을 행하신다. 씨앗이 열매를 내는 것은 자연의 어떤 법칙들에 의해서일까? 그것은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활동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에 비유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은 씨를 뿌리는 일에, 그리고 말씀 전파의 결과들은 그 씨가 싹을 내고 자라는 것에 비유한다. 여기서 결과들은 반드시 원인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열매를 정해진 방도들을 사용해서 얻게 되는 것처럼 부흥도 당연히 정해진 방도들을 사용한 결과로 얻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인과 법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 방도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은 아니더라도 방도들이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열매가 제 원인에서 비롯되듯이 부흥은 당연히 그리고 확실히 어떤 계기를 통해 생기는 것이다.

기독교를 발전시키는 일은 인과 법칙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신앙, 즉 방도와 그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하는 신앙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 방도들 가운데 효과를 낳게 하는 요소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교리는 없다. 또한 이보다 더 모순되는 것도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그 교리를 농부들에게 가르친다고 가정해 보자. 설교자는 농부들에게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만 그들에게 열매 맺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한다. 마치 자기들이 열매들을 맺게 할 것처럼 밭을 일구고 심고 또한 애써서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권을 가지고 간섭하시며, 또한 농부들의 힘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사역을 필요로 한다.

그 설교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도구들, 지식, 수단들과 그 결과 사이에 신뢰할 만한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 농부들이 그런 교리를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결과들이, 진정한 기독교를 발전시키는 일은 아주 신비스럽게도 수단과 목표사이의 자연적인 연관성이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고 교회를 가르치는 데서 나타난다.

그런 가르침으로 인해 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길 기다리며 꿈꾸고 있는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무수한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 이 교리야말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해서 마귀가 가장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되어 왔다. 그러나 실은 수단들과 결과 사이의 연관성은 농부가 씨를 뿌릴 때만큼이나, 영적인 문제에서도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한 가지 사실을 유의하고 명심해야 한다. 즉 가장 필수적인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은 삶의 필수적인 것들을 아주 확실하게 가져다 준다.

사치품들을 얻기가 좀더 어렵고,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는 수단들도 좀더 복잡하며 그 수단들을 사용한 결과도 덜 확실하다. 또한 아주 해로운 것들-술 같은 것들-은 종종 지독히 혐오스러운 일종의 악마적인 마술을 부리거나 자연을 괴롭혀야 얻어진다.

이 원리는 도덕적 다스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복들은 무한히 중요한 것이므로, 그것들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단순히 이론에서뿐 아니라 실제에서도 발견한다.

부흥이란 무엇인가

부흥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처음 사랑의 회복이요, 그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죄인들의 자각과 회개가 나타나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의 부흥은 타락한 교회를 일깨우고, 소생시키며, 또한 교화시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확실하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부흥이란 교회가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1. 부흥은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타락했는데도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깊이 살피는 일이 없이는 그 상태에서 깨어날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나아갈 수도 없다. 죄의 원천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참된 부흥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죄를 자각하게 되는데, 어느 때는 종종 너무 큰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낙망에 빠지고 만다.

감정이 항상 그런 정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부흥에는 항상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있기 마련이다.

2.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일이다. 부흥이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새 출발하는 것 외에 다른 무슨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새로이 믿게 된 죄인들처럼,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회개의 첫발을 내디딘다. 마음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히 회개하며 죄를 다 버린다.

3.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새롭게 되는 일이다. 그들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죄인 된 상태를 보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 있고, 성경의 진리들은 한갓 꿈 같은 이야기로 보인다. 그들은 성경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믿음으로 는 가장 중요한 영원의 실재들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각성을 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점화시켜 현실을 밝히 보게 한다.

그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슬퍼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에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도록 설득하기로 작정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사랑하게 된다. 영혼에 대한 부드럽고 강렬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온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길 열망하며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 걱정한다. 친구들, 친척들은 물론 원수들에 대해서까지 걱정하게 된다. 그들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라고 재촉하며, 또한 믿음의 팔로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의 영혼을 끝없이 불타오르는 지옥불에서 구원하시길 뜨거운 기도와 눈물로 구한다.

4. 부흥은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는 세상과 죄의 세력을 깨뜨린다. 그들은 새로운 이상을 갖게 되며, 하늘 나라를 미리 맛보며 하나님과 연합을 바라는 새로운 욕구를 갖게 된다. 세상의 매력이 이젠 효력을 잃게 되며, 죄의 권세는 정복된다.

5. 교회들이 이런 식으로 각성을 하고 개혁을 하게 될 때, 뉘우쳐, 회개, 개혁의 과정을 통해 죄인들의 구원이 뒤따르게 된다. 죄인들의 굳은 마음이 무너지고 변화한다. 극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매춘부들, 알코올 중독자들, 회의론자들이 각성하여 회개한다. 사회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람들이 부드러워지고, 거듭나며, 거룩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된다.

부흥을 발전시키는 요인들

회개에는 네가지 요인들이 작용하는데, 능동적인 행위자 셋과 수동적인 도구 하나가 있다. 행위자는 하나님, 설교자, 죄인이며, 도구는 진리이다. 참회개에는 최소한 두 행위자-하나님 죄인-가 항상 관련되어 있다.

1. 행위자로서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와 성령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와 질서 있는 다스림을 통해서 일상 생활의 사건들을 죄인들의 마음이 진리를 접할 수 있게 되는 쪽으로 조성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눈으로 진리를 보거나 귀로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장소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이따금 만사를 부흥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도록 만드신다. 기후, 건강, 그리고 그 밖의 다른 환경들이 더해져서 진리가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파되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이따금 목회자를 적절한 시간에 보내시는 것이나, 어떤 특정한 진리를 그것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있는 그 시간에 강조하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신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직접 접근하시며 또한 각 죄인의 인생 내력과 상태를 아주 잘 아시므로, 신자 개개인에게 꼭 적합한 진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급소를 찌르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에 생생함과 권세와 능력을 더하시므로, 죄인은 위축되어 반역의 무기들을 던져 버리며 주께로 돌이킨다.

하나님의 감화력 아래에서 진리는 불처럼 길을 낸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나타내심으로써 자랑하던 자들은 위에서 산이 눌러내리는 듯한 중압감을 느끼게 만드신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의향이 있다면, 그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은 설교와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순종할 의향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분명하게 밝히시며, 또한 그들의 영혼에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주는 강렬한 불빛을 집중적으로 비추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된다.

2. 종종 다른 사람이 능동적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다른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도구에 해당하는 것은 진리이고 그 일에서 설교자는 도덕적 행위자이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능동적으로 행한다. 남자든 여자든 단지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3. 죄인 자신도 부흥회에서 한 도덕적 행위자에 해당된다. 회개는 행위 없이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회개란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삶들이 그 죄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의 말, 태도, 눈물, 행동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믿는 아내를 둔 믿지 않는 남자를 생각해 보라. 부드러워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 아내의 표정, 친절함, 진지함, 동정심등은 남편에게 계속적인 설교가 된다. 그러한 것이 그를 질책하고 그의 귓전에 설교가 하루종일 끊이지 않으므로 그는 마음을 돌이키게 된다.

우리 모두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죄인들은 종종 눈빛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마음 상태를 읽는다. 그의 눈빛이 염려, 또는 약삭빠름으로 가득차 있다면 죄인들은 그것을 읽고, 또 그리스도인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종종 죄를 깨닫게 된다.

한번은 내가 기계 시설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한 모직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부흥회에 참석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상당히 경건해져 있었다. 그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아보았고, 또 한 여자 직공은 나를 보자 동료에게 농담을 소곤소곤하며 비웃었다. 나는 슬픈 기색으로 그 여자를 주목해 보았다. 그 순간 그 여자는 하던 일을 갑자기 멈췄고, 직조용 실은 끊어 졌다.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몇번이고 노력을 거듭했다. 잠시 후, 그녀는 주저앉았고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녀는 죄를 깊이 뉘우쳤고, 그 감정은 불길 번지듯이 그 공장 전체에 번졌다.

몇 시간 안되어 거의 모든 직공들이 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고, 공장 소유주들은 그 사실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들은 불신자들이었지만 조업을 중단시키고 기도 모임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공장을 계속 가동하는 것보다 이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며칠 안 되어 공장 소유주들과 거의 모든 직공들이 회개하고 믿게 되었다.

나의 눈빛, 경건하고 진지한 표정, 그리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서, 농담을 하며 비웃던 그 젊은 여직공은 마음속에 커다란 자책을 받았고, 마침내는 죄를 깊이 깨닫고 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뒤이어 일어난 전체의 부흥은 이 작은 사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나는 죄를 크게 깨닫고 있는 한 여자를 알았다. 어느 날 나는 그 여자의 근심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몹시 슬펐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오후에 몇몇 미온적인 신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노라고 대답했다. 물론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할 뿐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과 오후 시간을 보낸 것이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하찮은 사람들이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죄에 대한 자각들을 잃고 말았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한 영혼을 멸망케 한다. 그녀의 결심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았다.

요약

1. 교회는 부흥이 하나의 이적, 곧 자신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능력의 개입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교회는 천둥, 우박, 지진을 일으키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듯이 부흥을 일으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최근에 와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해 놓으신 도구들을 사용해서 부흥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잉글랜드 사람들도 부흥이 마치 소나기가 오듯이 임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땐 한 마을, 또 다른 땐 또 다른 마을에 소나기가 오듯이, 그래서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비가 다른 지역에 내리고 있는 동안 자기들 마을에 비를 오게 할 수 없듯이 그러한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흥이 15년에 한 번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신 사람은 모두 회개할 것이고, 그 다음에 모든 사람들은 또 한 차례의 부흥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5년에 한 번 정도 부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5년에 한 번 부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어떤 목사가 자기 교회에서 부흥회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다음해 이웃 도시에 부흥회가 있었고, 그 목사는 그곳으로 설교를 하러 갔다. 그는 전심으로 그 일에 몰두하면서 그곳에서 몇날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주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토요일에 집으로 왔는데 그는 고뇌에 빠졌다. 자기 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생각했다. 즉 자기 교인들 가운데 여전히 회개치 않은 사람과 또 해마다 그냥 죽어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했다.

그는 5년 동안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가장들이 지옥에 갈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 수를 계산해 보기까지 했고 그 다음날의 설교에 그것을 포함시켰다. 그는 끔찍한 장면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그는 내가 이해한 것처럼 이 예상되는 부흥을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교인들에게 마음을 쏟아부었다. 그 설교는 40명이나 되는 가장들을 일깨웠고, 또한 강력한 부흥이 뒤따랐다.

우리는 부흥이 5년에 한번 이상 자주 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 또 이 실례를 통해서 부흥이 기적이라는 인식, 즉 부흥은 우리가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는 이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뒤집어 놓으셨는지 보게 된다.

2.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잘못된 사상들이 부흥에 장애가 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실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변덕스럽게 명령하시는 것-특히 성령을 주시는 일-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부흥을 일으키는 데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주권을 그와 같이 행사하신다고 보여 주는 곳은 없다. 오히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영역에서, 자연에서든 은혜에서든 수단과 결과를 연결해 놓으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시는 자연 사건이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시되 마치 한번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아도 저절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처럼 창조해 놓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주가 저절로 작동하도록 해 놓으시고 우주에서 물러나지 않으셨다. 그렇게 보는 견해는 무신론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감독자이시며 관리자이시다. 그런데도 모든 자연 사건은 이해 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해서 발생한다. 하나님은 수단 없이 행하시는 주권을 가지고, 사건들을 섭리하지도 은혜를 주지도 않으신다. 또한 자연 은총보다 특별 은총에 더 많은 주권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부흥을 일으키려는 어떤 직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서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은 부흥을 당신의 힘으로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 주의하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하는 대로 일을 하는 편이 낫다.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시는 때에 부흥을 가져다 주시도록 기다려라.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여러분이 나서서 단지 부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부흥을 일으켜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

이런 가르침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이유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사탄의 역사가 효과를 내도록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3. 여러분은 부흥 운동 없이도 참된 기독교 부흥이 아주 잘 도모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신앙 각성을 일으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본다. 흥분을 자아내는 각성 운동 가운데 이따금 부작용이 따른다는 이유에서, 그들은 감정을 돋구는 일체의 집회는 없애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것은 있을 수 없다. 그 방법을 남용할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규모의 영적 각성 운동들(어떤 흥분의 열기를 수반한)에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감정을 돋구는 것 자체를 일절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좋은 것들은 언제나 남용하기 쉬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큼지막한 악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연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에서 다스리는 가운데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들을 미리 내다 보셨을 지라도, 그러한 악들이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는 이익들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통치는 궁극적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낳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악들을 조금이라도 수반하는 일이 없이 참된 기독교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악들은 부흥이 가져다 주는 유익과 비교할 때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이다. 교회는 부흥을 없애려는 소원을 잠시라도 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심사와는 온통 거리가 먼 것들만 쏟아내는 그런 소원을 교회가 잠시라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소원은 선교와 관련해서는 죽음이요, 또한 죽음과 함께 세상에 저주를 가져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나는 부흥에 대한 강의들을 이 주제에 대한 나의 어떤 이론을 나타내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단순히 몇 가지 조언을 하고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그리고 논할 거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해온 것은 아니다. 부흥에 대해서 논쟁을 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결국에 가서 여러분 모두 “우리는 이제 부흥에 대해서 이해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나의 계획은 아니다. 다만 나는 한 가지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부흥을 공부하길 바라는가? 당신은 부흥을 일으키는 데 당신이 해야 할 의무를 깨닫는다면 언제든지 당신이 들은 것을 행하고 실시할 의향이 있는가?

당신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주는 교훈을 따르며, 또한 그 교훈들을 마음에서부터 실천에 옮기겠는가? 그 교훈들을 가족들, 친지들, 이웃 사람들, 도시 전체에 전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부흥에 대해서 배우는 데 시간은 보내지만, 부흥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는가?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당신이 부흥에 대해서 어떤 것을 배우는 것만큼 빨리-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또 노력해서 당신이 여기 있는 죄인들 가운데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그 사실을 알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정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당신이 이를 행할 것인지 지금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죄인들에게 복음에 순종할 것인지 즉석에서 결정할 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 숙고할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할 수 없는 것은 죄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권한다. 여러분 모두가 지금 당장 하나님과의 엄숙한 약속에 화합하여 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배우는대로 빠르게 실천에 옮길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와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할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길 기도할 것을 권한다.

- 마지막 외침 中 -

출처 : House of Deliverance and Healing (축사와 치유의 집)
글쓴이 : ApostlePa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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