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가난한 사람

기독교 세계

by Bliss Yeo 2012. 12. 3. 16:40

본문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왕의 폭정을 가차없이 고발하고 나섰다는 것은 이미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이따금씩 욕을 먹지 않을 만큼 통치를 잘 한 왕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통치를 잘 한 대표적인 왕으로, 요시아를 꼽았다. 그 왕은 예레미야 22장 16절에서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기서 신원해 준다는 말은 억울한 마음을 풀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을 통치의 첫째 목표로 삼은 것 자체가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시아 왕은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의 권리를 변호해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통치를 잘 했느냐 못 했느냐의 첫째 기준이 영토를 얼마나 넓혔느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교를 얼마나 잘 했느냐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제2, 제3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기준은 가난한 사람을 얼마나 변호해 주었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훌륭한 통치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경제 정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지 정책에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궁핍한 자의 권익을 변호해 주고 그들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궁핍한 자를 옹호해 주는 것을 하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부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이런 저런 수단을 다 동원해 결국은 스스로의 권리를 되찾지만, 가난한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스스로를 변호할 길이 없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변호해 주는 분으로 빈번히 묘사되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극소수의 몇몇 왕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왕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백성 수탈 수단으로 오용했던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폭정에만 시달린 것이 아니었다. 부자들에게도 시달렸고 재판관들에게도 시달렸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소농민들은 흉년이 들면 과중한 세금을 내기 위해 부자에게 돈을 빌려 쓰는 일이 허다했다. 출애굽기 22장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부자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가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 "겉옷을 담보로 잡은 사람이 있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출애굽기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사람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도 이집트 땅에 몸 붙여 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부나 고아를 괴롭혀도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내게 괴로움을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 "내가 너희를 죽이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고 너희 자식은 고아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과부로 태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고아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괴롭히는 너희 가족이 바로 그런 처지를 당할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이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힘없고 가난한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돈이라는 곳에서 15km 쯤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엘리야가 가서 겪은 이야기는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엘리야가 한 과부에게 떡을 한 조각 달라 하자 여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집에 돌아가 남은 식량을 끓여 먹고 내 어린 것과 함께 죽기만 기다릴 작정입니다." 아사(餓死) 직전에 처해 있는 한 여인과 그 아들의 처절한 모습이다.
예언서뿐 아니라 시편 여러 곳에서도 우리는 시인들의 억울한 호소를 듣게 된다. 아름다운 것을 주로 쓰고 싶었을 시인들이 주제를 바꾸어 억울한 비명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 사회적 경제적 정황이 못내 안쓰럽다. 아모스 2장 7절은 가난한 자들을 짓밟던 당시의 사회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홁 먼지 속에 쳐 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곧 도와주기는커녕 상처를 더 깊게 했다는 것이다.
이사야 58장은 금식하는 사람들이 주께 항의하는 장면을 보도한다. 그들의 항의는 우리가 금식하는데도 주께서는 우리를 왜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냐는 것이다. 이 때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또한 굶주린 사람들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 또 불쌍한 사람들을 너의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자를 보았을 때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기서 '금식'은 단순히 굶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종교 행위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주변을 위해 이러한 사랑을 행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종교 행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곧 이웃 사랑 없는 금식, 찬양, 예배, 봉사 등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에 관심을 쏟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 때에는 주께서 "내가 여기 있다"하고 대답하시리라는 것이 이사야 58장 5절의 말씀이다. 옛날 예언자들의 기도에 속히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기도에는 그리 속히 응답하시지 아니한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언자들은 부르짖을 때 이웃 사랑을 병행하면서 부르짖었고, 우리는 이웃 사랑은 하지도 않은 채, 그저 부르짖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분명한 어조로 단언한다. 우리가 불쌍하고 궁핍한 사람을 먼저 돌보아야, 주께서도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약 예언자들의 정신은 예수에게로 그대로 이어진다. 본문에서 예수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고 선언했다. 또 주린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이고, 우는 자는 웃을 것이고, 너희를 멸시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너희를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너희 상이 큼이라고 말씀했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에게 복이 내려질 것을 예고한다. 가난한 사람, 주린 사람, 우는 사람, 욕먹고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불쌍한 사람들로 집약된다.
그런데 예수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이나 그와 유사한 말씀만 한 것은 아니다. 본문 누가 6장 24절은 "그러나"로 이어진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부요한 자는 화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미 위안을 한껏 받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지금 배부른 자와 지금 웃는 자도 화가 있을 것인데, 그들은 주리게 되고 울게 되리라는 것이다. 칭찬 받는 자도 화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과거에 '거짓 선지자들'도 칭찬을 받았었다는 것이다. 부요한 것과 배부른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쉽게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그 칭찬은 과거 '거짓 선지자들'이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가짜 칭찬인 경우가 허다하다.
부자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은 그의 고상한 인격 때문이 아니라, 그의 '부'때문이다. 그런데 부자 자신은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인간 됨됨이 때문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가 파산을 해서 그를 칭찬하던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면 그들을 배신자들이라고 화를 낸다.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욕을 한다. 그러나 부자를, 오직 그가 가진 재산 때문에 칭찬했던 사람이 칭찬을 중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그를 '재산'이 있기 때문에 칭찬했으므로 그가 재산을 상실하면 그를 더이상 칭찬할 이유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에 있었거나 단체장으로 있다가 은퇴한 사람도 자기 아래에 있던 사람들의 태도가 자신이 은퇴하자마자 돌변했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그 동안 칭찬했던 것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직위와 그 직위가 줄 수 있는 혜택 때문이었음을 망각하기가 쉽다. 그들이 돌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이나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그러한 부나 직위를 소유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듣는 칭찬들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인격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명료히 직시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은퇴 후의 변화에 대해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고 부요한 사람은 화가 있다고 그 둘을 분명한 어조로 구분해 놓았다. 예수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그의 공생애 취임 연설의 일부에서도 드러난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는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뚜렷하게 밝혀 놓았다. 그런데 그를 믿겠다고 따라 나선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떠한가?



10여 년이 넘게 기근이 든 아프리카 스물 네개 나라의 4억 인구 가운데 2억에 가까운 인구가 삶에 필요한 최저 수준의 영양도 섭취하지 못하고 있고, 그 중 이천만 명은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 있다는 것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그중 르완다, 가나, 모잠비크, 이디오피아, 잠비아 등 일곱 개 국가가 피해가 극심하고 매일 수천 명씩 먹을 것이 없어서 꼬박꼬박 죽어가는데도 그것은 그저 그렇고 그런 일로 감각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80원이면 한 명의 어린이가 세 끼를 먹을 수 있다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가장 많이 있다는 한국의 수많은 교회들이 이렇다 할 기여를 했다는 소식은 거의 듣지 못했다. 교계 신문들을 보면, 자기 교회 자랑과 더불어 바자회, 창립기념행사, 성가곡의 밤, 대규모의 성전 봉축 등의 대형 행사 광고가 떠들썩하게 나와 있지만, 기아로 허덕이는 아프리카에 조금이라도 기부했다는 기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가 어렵다. 세계 50대 대규모 교회들 명단 중 한국 교회가 20여 개 이상 끼어 있다는데, 왜 이런 일들에는 그다지도 인색한가?
한 교회의 전체 예산에서 불행한 자들을 위한 사회사업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가 한 교회의 건강 정도를 측정하는 분명한 기준이 된다. 전체 예산의 20% 책정은 대부분의 교회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하고 있다. 10%도 어림없다. 5%도 너무 힘에 겨워한다. 한 사회복지학과의 여론 조사는 대부분의 교회가 1% 미만만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때나 되야 고아원과 양로원에다 먹다 남은 부스러기를 조금 던져주고 크게 생색을 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때라도 한 번 해야 그 동안 안했던 것에 대한 심리적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 사회학자가 1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고, 구원이 높은 가치임을 믿는다고 밝힌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갖는 사회적 동정심의 정도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의 동정심보다 훨씬 더 약하다는 것이 밝혀져 주목을 끈 적이 있다. 또 록키히(Roakeach)라는 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오래 전에 암살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에 대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보다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깊은 동정과 애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곧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 보다 더 차갑고, 더 무관심하고, 더 인색하다는 이런 조사 결과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이제는 싫지만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지경이 되었다.
불교는 세상의 부를 멀리하고 부로부터의 단절을 중시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일익을 담당하고 부를 성취하는데 단단히 한 몫을 해왔다. 자본주의의 시작과 발전에 기독교가 미친 영향이 막대했다는 것은 막스 베버가 이미 오래 전에 지적해 놓은 바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성취하지 못한, 아니 성취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성취하지 않은 그 부를 성취했다고 자랑한다. 기독교가 부를 성취했다는 것 자체가 가장 비기독교적 인데도 이 사실을 모르고 마구 좋아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이유는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라고, 예수 잘 믿으면 부의 복을 잔뜩 받는다고 마구 떠들어대는 변질된 교회들도 적지 않다. 결국, 기독교는 예수의 가난한 마음을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신 예수의 뜨거운 가슴을 이제 잊어버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저 한결같이 더 가지려는 욕심으로 출렁댄다. 무엇이든지 내 손에 넣어야 잠이 온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 것도 내 손 안에 넣어보려는 욕심의 표현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세상적인 것은 이것저것 다 가져 보았는데, 예수라는 품목은 아직 못 가져 보았으니, 그 품목을 추가해 보려는 욕심 때문에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한 후에 라야 주어지는 그 값진 천국을, 할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겠다는 크리스천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하신 말씀, 또는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을 아예 실천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누렸던 부귀 영화가 무조건 저 세상에서도 자동적으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크리스천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가 들어간다. 가난한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들어간다는 말인가? 예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이미 말했다. 낙타와 바늘 구멍. 이 상징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예수의 이러한 언급은, 부자는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말로까지 고쳐 읽을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천국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더 나아가 본문은 가난한 자들을 위로해 주고 부요한 자들의 횡포와 자만을 종식시키기 위해, 가난한 자들의 다가올 축복과 부요한 자들의 두려운 종말을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1세기 크리스천들에게, '가난'은 하나의 존재방식이었고 운명이었다. 이곳 저곳 순례하는 초기 크리스천들에게는 '일용할 양식' 외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마가 교회에서는 거기다가 지팡이와 신발과 한 벌의 옷만이 더 허락되었다. 군더더기의 장식품들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마태 교회와 누가 교회에서는 그나마 지팡이까지 금지시켰다. 마가 시대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지팡이조차 마태와 누가 시대에 와서는 액세서리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추사의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座). 조그만 창이 밝아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오래 앉아 있게 한다는 말이다. 조촐하지만 이 얼마나 넉넉하고 푸근한 심정인가? 요즈음 인심 사나운 도시의 빈틈없이 짜여진 분주한 움직임들 때문에 아늑하고 푸근했던 마음이 자꾸 사라져만 가는 것같아 안타깝다.
가난한 마음은 부에 대한 극단적인 전면 거부의 뜻보다는 그 사용의 방향이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게 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애당초 우리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감사'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나온다. 모든 부는 하나님께서 당분간 맡겨 주신 것이다. 다만 그 운영을 우리의 자유에 맡기신 것이다. 나의 기쁨으로만 사용될 수도 있으나, 너의 기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예수를 닮으려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손에 전혀 움켜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예수가 된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달래가는 연습을 이제부터라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삶의 의미는 내 속에다 잔뜩 쑤셔 채워 넣는 데서는 발견될 수 없다. 삶의 의미는 내 속에 있는 것을 자꾸 꺼내어, 내어 주는 데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늘 더 가난해지려는 심정의 훈련과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브리공동체  (0) 2012.12.04
천주교와 기독교가 다른 36가지 이유  (0) 2012.12.03
영혼을 향한 부부의 전도...  (0) 2012.12.03
복음적 의무  (0) 2012.12.03
경건?  (0) 2012.12.03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