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사명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념을 남겨주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 즉 교회'를 주셨다. 다시 말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그의 구원을 완성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실 그 때까지 교회'에 그의 사명의 계속적 실행을 위탁하신 것이다.16) 그러므로 교회의 위탁된 사명은 항상 그 시대의 문화와 삶의 관련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대에 위탁된 교회의 사명은 어디에서 그 원형을 찾을 것인가? 우리는 그 원형을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수행한 사명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는데, 예를 들면 다드(C.H.Dodd)와 스마트(J.Smart)는 케리그마(Kerygma:말씀의 선포)와 디다케(didake:교육)로 보았고, 쿨만(O.Cullmann)과 언더힐(Underhill)은 카리스마(karisma:기도, 찬양, 예언)와 유카리스트(eucharist:신앙고백, 축복기도, 세례, 성례전)로 보았으며, 콕스(H.Cox)는 케리그마(kerygma)와 디아코니아(diakonia:세상을 섬기는 봉사)와 코이노니아(koinonia:성도의 교제)의 세 가지로 보았다.17) 여기에서는 콕스(H.Cox)의 분류에 따라 우리시대에 위탁된 교회의 사명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a. 선포적 사명
말씀의 선포를 의미하는 케리그마(kerigma)는 케뤼세인(keryssein)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전령관이 자기에게 위탁된 메세지를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다는 뜻이다.18) 신약성서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은 선포의 내용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통하기도 한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교회를 불러내신 것은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하고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첫째 의무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19) 교역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전 교회는 이러한 선포적 사명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크래머(H.Craemer)는 교회는 선교다'라는 명제 아래 교회는 마땅히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며 결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이를 교회의 기본 존재 법칙으로 내세우고 있다.20)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또한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공동체로서 그 선포적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b. 봉사적 사명(Diakoniac Duty)
세상을 섬기는 봉사를 의미하는 디아코니아(diakonia)는 본래 누구나 굴종을 연상하게 마련인 식사시중 행위를 뜻한다.21) 왜냐하면 식사 때만큼 주인과 종의 구별이 뚜렷이 드러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관심사는 단순히 식사중이나 부양과 생계를 돌보는 자선행위에 그치지 않았으며, 그의 근본 관심사는 남을 위한 존재'에 있었다. 인자의 온것은 섬기려는 것 (마20:28)이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봉사 그 자체는 그리스도의 큰 사명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의 봉사 또한 참으로 큰 사명인 것이다. 세상을 섬길 때 교회는 예수께서 위탁하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봉사적 사명은 흩어지는 교회 로서 다양한 사회봉사22)를 실천할 때 이루어지는데, 이를 통하여 교회는 인간이 세상 가운데서 상실한 자아를 회복하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랑의 공동체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건설하는 것이다.
c. 코이노니아적 사명(Koinoniac Duty)
일찌기 교회의 모임에서는 사도들의 교훈과 기도에 병행하여 코이노니아의 행위가 있었다(행2:42에는 교제'라고 표현됨). 코이노니아는 본래 물건을 함께 쓴다는 말이었으나(행2:44, 4:32), 후에는 봉사의 교제(고후8:4) 혹은 신앙에 의해서 고취된 그리스도인의 자선행위를 의미하기도 했다(히13:16).23) 특히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성도의 교제로 시작된 교회를 잘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들은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기를 좋아했고 힘써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내 것이라는 소유개념이 초월되어 있었으며, 서로 신분을 따지거나 자기 소유를 밝히지 아니하고 교제하였다. 그들이야말로 복음 안에서 인간적인 조건을 넘어선 세계시민이었던 것이다. 아울러서 이 코이노니아는 초대교회의 성만찬에서 가장 성스럽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요, 그 열매로서 참여자 자신들 사이의 영혼과 마음의 교제를 이루는 것으로서,24) 나아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엄격하게 볼 때 교회는 밈음의 코이노니아이지 조직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건물이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므로 교제하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며,25) 더 나아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연장 혹은 모방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코이노니아를 유지시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 할 수 있다.26) 신약성서는 이러한 코이노니아의 종적인 관계와 횡적인 관계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은바 그 무엇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며 또한 그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이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를 나누고, 그것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이 또다시 서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신앙의 바른 증거는 참된 사랑의 생활에서 나타나며, 먼저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에 이른 사람은 자연히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연장되어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27)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가장 깊이 그리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코이노니아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실질적인 관계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의 장으로서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나님과 일치하고 또한 인간들 사이에서 코이노니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역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코이노니아의 회복이며, 이는 교회의 근본적인 의미를 깨닫게 하고 교회의 목적을 더욱 뚜렷이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로서, 그리고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그 원동력을 코이노니아의 증진에서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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