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그리스도인의 자격과 책임. 율법의 신약적 설명과 완전한 사랑 마태복음5장

놀라운 이야기

by Bliss Yeo 2009. 11. 23. 19:00

본문

 

 

 

 

마5장-7장까지는 산상수훈이라 불리우는 유명한 설교로, 그리스도인의 높은 도덕을 가르친다.

주님은 이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셨는데(마4:17-),

여기서 어떠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며 천국에 들어가는 자에게는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

모세에 의해 전해진 율법과 천국의 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등을 말하고,

6장-7장에서는 천국민의 실제생활은 어떠해야 할 까를 가르쳐 주시고 있다.

시대적으로는, 천국 즉 하나에 속한 왕국이란, 주재림 후 지상에 출현하는 왕국에 대해서인데,

영적으로는, 지금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있는 것으로(눅17:20-21; 롬14:17-),

오늘날에 있어서의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의미로는 천국의 시민이다(빌3:20- ).

먼저  5장 1-12절까지는 아홉가지 복의 가르치심으로, 천국의 시민의 품성을 말하고,

참된 행복은, 물질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품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겸손하여, 죄를 슬퍼하고 온유하여,의를 사모하며, 동정하고, 순결,평화(화목)를 사랑하는 자,

그렇지만 정의를 위해, 또는 주를 위해 박해를 즐겨 받는 자, 즉 이러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복된 사람이다.

1-16절에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소금과 빛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

소금은 결백하며, 사물을 깨끗하게 하고, 부패를 막으며, 또 맛나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신자는, 사회의 부패를 막고, 은혜를 가미하는 감화력을 가질 것이다(골4:6).

소금의 특색이라든가, 가치가 그 맛에 있듯이, 신자의 특색이라든가, 가치는 그 신앙과 덕에 있다.

이것을 잃은 형식적인 신앙은,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한다.

빛은 암흑을 비취고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신데(요8:12-)그를 받아들이고, 믿은 신자도, 주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케 하는 빛이다(엡5:8-).

빛은 빛나며 광채를 발하는 것이 그 본성이다.

산위에 있는 성이 숨길 수 없듯이, 신자는 반드시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이므로,

언행으로써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비취어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신앙의 발표를 두려워하여, 말 아래 빛을 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17절 이하 본장 전체는 천국 시민의 율법을 보여준다.

율법이나 선지자란 구약의 총칭인데, 그리스도는 예언의 성취일 뿐 아니라, 율법의 성취이기도 하다.

율법 중의 여러 가지 의식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므로, 그 성취인데,

더욱 또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고, 율법의 요구하는 의를 스스로 행하며,

또 그를믿는 자가 율법의 의를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심으로써(롬8:3-4) 이 의미에 있어서도 율법의 성취이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은 외부의 행위를 요구하는데, 신약의 빛은 내심의 성결을 요구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의 의문에 구애되어, 의식을 엄수하며, 외부의 청결을 보존하기를 힘쓰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보다 더 마음이 성결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20-).

사람은 겉(외모)을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사람은 행위가 바르기를 원하나, 하나님은 보다도 마음의 성결하기를 요구하신다.

아무리, 소위 종교적인 생애를 보내고, 바른 행위를 하여,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대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반성하여, 마음에 꺼리끼는 데가 있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21절 이하는 20절의 주요한 뜻을 확대하여, 하나하나 율법에 비추어 설명한 것으로,

죄는 외부 행위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마음 속에 그 의지가 있으면 처벌되어야 할 것을 말한다.

살인의 근원은 노에서, 간음의 뿌리는 음욕에서, 거짓 맹세의 뿌리는, 불성실에서 생긴다.

모두 그 근본부터 성결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38-)는, 본래 죄에 상당한 형벌을 하라는 , 사법상의 율법인 것을(신19:21-),

당시의 유대인이 이를 남용 곡해하여, 보복의 구실을 삼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고 하셨다. 적극적 태도로서 대항하고, 또 보복하는 것을 , 경계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적의 조롱이라든가, 포학을 맞음에 , 포학으로써 하지 않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여 다투거나, 그 때문에 자기의 영혼을 해치며,

사람을 격분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참고, 포학을 받으며, 희생을 지불하기를 조금도 마다 않는 것이다(39-41).

더 나아가 원수도 사랑한다.

당시의 유대인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역용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다(43-).

그러나 주님은 적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44-).

그 사람의 악한 행위는 기뻐하지 않으나,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시고, 그 사람때문에 친절을 다하며, 기도한다.

비겁이라든가, 오만함에서 악인을 대적하지 않고, 참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견디어 내며, 그 사람 때문에 이익을 도모한다.

이는, 인간 고유의 인정애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약은 내심의 성결을 요구하는데, 그 적극적 반면은 완전한 사랑이다.

악에 대항하지 않을 뿐더라, 나아가 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짐으로써 비로소 되는 것이다(롬5: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과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는 것은,

지혜라든가 능력의 완전성이 아니라, 이 사랑의 완전성을 요구하신 것이다.

마음이 성결해져, 사랑에 반하는 죄의 성질이 제거된다면, 그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요일4:1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