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마가복음 15.39
서중석 교수
마가 15장 39절은 처형당한 예수를 지켜본 백부장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다. 이 구절보다 조금 앞선 37절에는 "예수가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다"고 보도되어 있다. 가족에게 오해받고,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거부당하고,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로 자처했던 열두 제자들에게도 부정되거나 배신당한 예수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까지도 버림을 받게 되었다. 예수는 어떠한 기적적인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마가는 이 처형의 순간을 목격한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하고 외친 것으로 묘사한다.
마가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네 번 나온다(1.1; 3.11; 5.7; 15.39). 처음 것은 마가 자신이, 둘째 것과 셋째 것은 귀신들이, 마지막 것은 백부장이 언급한다. 이밖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확한 표현은 아니나, 내용상 그것과 동등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네 번 더 나온다. 그것들은 예수의 수세(受洗)와 변모시에 하늘로부터 각각 한 번(1.11; 9.7), 예수의 묵시사상적 연설에 한 번(13.32), 대제사장의 질문 가운데 한 번(14.61) 사용된다. 이러한 마가의 사용법으로 미루어 본다면 예수의 동시대의 주변 인물들 중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은 백부장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마가는 예수의 주변 인물들 중 백부장만이 유일하게 예수의 신성을 인지한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백부장의 고백의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가 후에 자신의 복음서 전체를 압축하는 요약구로 사용할 정도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
마가는 왜 이토록 중요한 고백이 로마 백부장의 입을 통해 나온 것으로 보도했을까? 그 보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마가가 백부장의 고백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브랜든과 같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로마 정부와 기독교가 상호 우호적인 관계임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이 여전히 상호 적대적인 관계임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 백부장은 누구인가? 로마정부의 처형권을 위임받고 예수를 처형한 로마 병정들의 지휘관이다. 그 지휘관이 예수를 처형해 놓고 나서 처형된 예수를 쳐다보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하고 고백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그 처형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곧 마가는 예수 처형을 책임진 로마의 지휘관이 자신의 잘못을 자인한 것으로 독자들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이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 백부장의 외침은 로마 정부의 패배의 외침이 된다. 이러한 상징을 간접적으로 제공하려는 마가의 정교한 의도를 이 구절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면, 이 보도의 목적은 늘 가려지게 될 것이다. 백부장의 고백 장면에 대한 보도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실은 결코 처형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장면은 처형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 처형의 장본인을 통해서도 진실은 밝혀지고야 만다는 마가의 확신에 독자들을 엄숙하게 대면시켜 준다.
더 나아가, 마가는 백부장의 이 최고의 고백이, 예수의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무명의 이방인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며 자리다툼만을 일삼아 왔는데 비해, 이 예수를 전혀 믿지 않았던 한 이방인은 결정적인 순간, 예수의 신성을 인식하는 주역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 동안 주역을 담당했던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은 마가 14장이 끝나면서 예외없이 마가복음서에서 탈락하고 다시는 무대 위에 등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무명의 백부장이 그들을 대신해서 주역을 담당한다. 곧 마가는 이 장면을 통해 이미 마가복음서의 주역이 교체되었음을 밝혀 보여준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의 처형을 계기로 백부장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해자가 오히려 기독교적 고백을 주도할 뿐 아니라 기독교적 선교의 전위대가 된다. 이것은 또한 예수의 수난 없이는 복음의 진전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순교자 예수의 피는 복음 전파를 위한 씨앗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백부장의 고백이 십자가 처형이라는 처참한 광경을 '보고'난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백부장은 그토록 무기력하게 운명한 예수를 보고서도, 지나가던 자들처럼 그를 모욕하지(15.29) 않았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처럼 남을 구원하기 전에 네 자신이나 먼저 구원하라고 희롱하지도(15.31) 않았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처럼 욕하지도(15.32) 않았다. 그 치욕스럽게 처형된 예수의 모습 속에서 신적 모습을 찾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혹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의 처형시에 동반된 것으로 알려진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마태복음서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났다"(마 27.51 이하)고 보도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서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기적이 전혀 보도되지 않는다. 오직 백부장의 고백 직전에 소개된, 둘로 갈라진 성소 휘장(막 15.38)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예수의 처형과 동시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마가에 의해 소개되고 삽입된 편집절일뿐, 예수의 처형 장소에서 백부장이 눈으로 보거나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결국 마가가 전하는 백부장의 고백은 마태가 소개하는 종류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마태는 마가의 이 이야기를 지나치게 확장시켜 놓았다. 마태는 "백부장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마 27.54)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으로 소개함으로써 백부장의 고백의 의의를 현격히 감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마가의 백부장은 예수의 치욕 속에서 영광을 보고 있다.
백부장이 "이 사람은"하고 언급했을 때, 그 말은 인간 예수를 전제한 것이다. 이미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러한 인간적인 한계를 노출시켰다. 예수는 자신의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었다"(6.5). 겟세마네에서는 그 쓴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 달라고 탄원했다(14.36). 물론 백부장은 이러한 장면들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더 처절한 예수의 한계를 목격했다. 무엇보다도 백부장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15.34)하고 절규한 것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운명한 것(15.37)을 보았다. 그밖에도 박대와 조롱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적절한 그 어떤 반응도 없이 무기력하게 감내만 하고 있는 예수의 '한계'를 보았다. 마가에 따르면 그러한 목격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그 인간적인 예수의 한계 속에서 신성을 감지해 냈다는 것이다.
마태는 마가가 구성한 이러한 예수의 인간성과 신성의 분명한 대조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마태는 마가의 "이 사람은"(houtos ho anthropos)을 "이는"(houtos)이라는 단순 지시 대명사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는 마가의 "이 사람"은 그대로 남겨두었으나, 마가의 "하나님의 아들"을 "의로운"(dikaios)으로 수정함으로써 백부장이 예수의 신성을 감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눅 23.47 참조). 그러나 마가는 백부장이 예수의 수난과 비참, 낮음과 천함 속에 깃들인 영광을 명확하게 포착한 것으로 제시한다.
예수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운명하는 것을 보고서도, 백부장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를 비웃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침을 뱉지도 않았고, 욕하지도 않았다. 남을 구원하기 전에 너 자신이나 먼저 구원하라고 조롱하지도 않았다. 그 치욕스럽게 처형된 예수의 모습 속에서 신적 모습을 찾아냈다는 데에 백부장의 위대함이 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려하게 꾸민 사람에게서 훌륭한 면을 발견하기란 너무도 쉽다. 그러나 행색이 초라한 사람에게서 훌륭한 면을 발견하기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익숙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격언이 하나 있다. "거지들을 무시하지 말라.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의 천사들을 거지들로 변장시켜 그들을 통해 너희의 믿음을 시찰하신다." 이 격언을 우리의 정황에 옮겨 재구성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가난한 교인들을 무시하지 말라.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의 천사들을 가난한 교인들로 변장시켜 그들을 통해 크리스천들의 믿음을 시찰하신다."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차림으로 변장한 왕에게서 비범한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너무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일생을 살았던 예수에게서 신적 기원을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비참한 모습으로 처형된 그 속에서 신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수난을 피하려고만 한다. 고통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려 한다. 성서의 고난사나 한국민족의 수난사에서 어떤 의미를 찾곤 했던 감격적인 시각들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삶의 목적이, 쾌적함이나 안락함이나 편리함에 대한 추구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설득시키려는, 매스컴을 비롯한 수많은 홍보 매체들이 쏟아내는 매력적인 정보의 유혹에 우리 대부분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보조를 맞추려는 듯, 십자가의 수난을 망각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애타게 갈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부활절 대연합 새벽 예배'라는 행사는 매년 거창하게 기획되고 선전되고 그리고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대연합 고난절 예배'라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도 못했다. 한국 기독교의 관심도와 강조점이 여전히 고난이 아니라 영광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발췌해서 연주하는 경우에도 예수의 영광을 강조하는 44번 [할렐루야]는 늘상 선택되지만, 예수의 고난을 강조하는 23번 [주는 멸시 당하셨네]는 탈락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것도 고난에 눈을 감으려는 무의식적인 현상이 폭로되는 단적인 예이다. 신약성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영광을 위한 불가피한 예비 단계로 명확하게 설정해 주고 있다. 수난 없이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차단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백부장이 예수의 처참한 수난 장면을 보고 그 비참 속에서 영광을 발견해냈다는 마가의 보도는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충격을 준다.
마가가 이렇게 백부장의 외침을 예수의 수난 이야기 중 절정에 위치시킨 것은 무기력하게 핍박을 감내만 하고 있는 마가공동체 멤버들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처형당한 예수의 수난에 좌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백부장처럼 수난 속에 깃든 영광을 포착하라는 것이다. 마가는 수난을 영광을 위한 피할 수 없는 예비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공동체 멤버들에게 수난의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사상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13.13,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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