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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닮기: 거룩하신 하나님, 자궁의 하나님

명설교

by Bliss Yeo 2011. 1. 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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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닮기: 거룩하신 하나님, 자궁의 하나님

누가복음 6:36; 마태복음 5:48


한완상 교수(상지대 총장)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을 닮으려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 쳔들은 하나님 닮기(Imitatio Dei)에 열성을 다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성격과 본질에 대해 한가지 이미지나 해석만 있다면 문제는 단순할 것 입니다. 헌데 우리가 꼭 닮아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에 대해 믿는 사람들 의 생각이 한가지가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른 생각들, 다 른 이미지들이 가만히 있으면 또 괜찮은데, 다른 생각들끼리 치열하게 다투고, 분쟁하기 때 문에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1세기 유대사회 속에서 하나님 닮기를 역설하셨지요. 예수님의 하나님이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크게 달랐다는 데서 문제는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도 예 수님의 다른 신관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지배적 신관 과 아주 다른 신관을 선포하셨습니다. 어떻게 그 신관이 달랐으며, 그것이 새 천년을 앞두 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던져주는지 우리는 경건한 자세로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새 천년을 맞는 한국 크리스쳔들이 어떤 반성을 해야하고, 어 떤 삶을 새롭게 살아야 하고, 어떤 공동체를 이뤄나가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모 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하나님을 살펴봅시다.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6:36에서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비 의 하나님이시지요. 영어로는 merciful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5:38)은 또 이렇 게 표현했습니다.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서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지요. 영어로 perfec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과 완 벽하신 하나님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완벽한 존재에게는 가까이 가기 힘듭니다. 자 비하신 분과는 달리 완벽한 분은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라면 인간 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엄격하고 무섭기도 한 분으로 여겨지며 멀리하고 싶기도 합니다. 대체로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이 편집과정에서 그렇게 고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New English Bible, the Jerusalem Bible, 그리고 the Scholar's Version은 하나 님을 compassion의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이 영어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쉽지 않습니다. 측 은히 여기는 마음, 연민, 동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compassion은 고통과 불행을 함께 나누는 마음이며,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주고 그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연민이나 동정은 상하 관계에서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게 갖는 마음을 뜻합니다. compassion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낱말이 자비와 온전함보다 하 나님의 본질을 묘사함에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이 낱말을 체휼( 恤)이라고 번역하 고 싶습니다. 몸으로 창자로, 피 흘리듯 함께 아파한다는 뜻이지요, 그러기에 본문을 이렇 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들과 함께 체휼하시는 분이듯이 너희들도 너희 형제자매들과 체휼하라."
체휼(compassion)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세계에서는 엄마의 자궁을 뜻하는 명사의 복수형 이라고 합니다. 즉 체휼의 단수는 여자의 자궁이라는 뜻이지요. 엄마가 자기 자궁 속의 아 이와 함께 체휼하는 느낌 그것이 바로 compassion이지요. 남성의 경우, 같은 엄마 자궁에서 살다가 나온 형제들과 함께 느끼는 것이 체휼이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엄마가 자기 자궁 속의 아기 생명과 함께 체휼하는 구체적이고 깊은 사랑을 뜻합니 다. 결국 하늘에 게신 아버지는 여자의 자궁과 같은 분이라는 말이지요. 참으로 오묘하고 놀 라운 신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여성적 하나님을 부각시켰다는 것은 주가지로 놀랍습니다. 하나는 여 성의 생물학적 특권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민중신학과 민중사회학에서 민중의 인식론적 특권을 인정하듯,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여성의 생태적 특권, 즉 여성이기에 하나님을 더 본질적으로 잘 알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남권시대, 가부장적 권위주의시대에 사셨던 예수님이라 정말 놀랍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궁의 하나님은 예수님 당시의 규범 과 정면 충돌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같은 예수님의 하나님은 제일세기 유대인들의 하 나님과 심각하게 충돌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밝히기 앞서, 구약에서 이 낱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열왕기 상 3:26에는 솔로몬 왕의 재판장면이 나옵니다. 한 아기를 놓고 서로 진짜 엄마라고 우기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왕은 아기를 두 쪽 내도록 판결합니다. 이 때 진짜 엄마의 마음은 바로 체휼의 마음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불 븥는 것 같아서"로 되어 있습니 다. 정말 생모의 마음은 불붙는 것 같이 다급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원문은 그녀의 자궁으 로 느꼈다고 표현했습니다. King James Version은 그녀의 창자가 불붙는 것 같다고 했습니 다. 창세기 43:30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못된 형들과 만 났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토록 보고 싶던 동생 벤자민으로 인해 마음이 타는 듯 하므로 마구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가누지 못해 울 곳을 찾았습니다. 이 때 요셉의 자궁이 또 한 요동친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와 같이 자궁처럼 체휼하시는 하나님을 당신의 아빠(abba)로 불렀습니다. 저 멀리 계시고, 저 높은데 계시고, 목에 힘을 주시는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이 아니라, 가 까이 계시되 자궁 속에 있는 아기와 함께 체휼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의 아빠 하나님 이었습니다.
  
  유니언 신학교의 여성신학자 Trible 교수는 예레미야 31:20절의 후반부를 흥미롭게 다음 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셨습니다. 우리성서는 이 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 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영어의 RSV는 "My heart yearns for him"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런데 Trible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궁은 그를 위하여 떨고 있 으며, 나는 진실로 그에게 엄마의 체휼을 보여줄 것이다."(Therefore my womb trembles for him. I Will truly show my motherly-compassion upon him)
바로 이 같은 자궁의 떨림은 하나님 당신의 떨림이요, 바로 예수님 자신의 떨림입니다. 이 떨림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진동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의 하나님 像은 제1세기 유 대사회의 지배적인 규범과 정면 충돌하게 됩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자 Borg는 이 점을 참으로 설득 력 있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하나님과 유대 종교지도층의 하나님과의 상충을 살펴봅시다. 예수의 하나 님은 자궁의 하나님이신데, 유대 종교 엘리트의 하나님은 거룩 거룩의 하나님이시요, 성결 의 신이었습니다. 이 같은 성경의 하나님, 정결의 하나님은 한낱 추상적 수식어가 아니었습 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 정치, 문화의 최종·최고 규범의 핵심이었습니다. 당시 거룩규 범(holiness code)은 이른바 정결 체제(purity system)를 지탱해주고 정당화 시켜주는 규범 이었습니다. 사회 정치 문화 체제가 모두 정결 체계를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정경 지도(purity map)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정결지도의 중심점이 요, 원점이지요. 이 원점에서 멀어질수록 순도(純度)는 점점 떨어지게 됩니다. 즉 불순요소 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 지도에 따르면 가장 순수한 인간과 지위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 세인 등입니다. 가장 불순한 인간은 이방인, 세리, 목동, 죄인, 병자, 신체 장애자, 여성들 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말할 것도 없이 불순한 잡종인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순결과 불순결 간 의 차이와 장벽은 분명했고, 높았고, 엄격했습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이 같은 정결 체계의 세계를 묵과했을까요? 모르는 척 했을까요? 아니면 순종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에는 바로 이 같은 기존 정결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과 공격의 삶이었습니 다. 가장 주목할 예수님의 선전 포고는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순수하고 정결하고 완 벽하여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을 것이 아니라 자궁의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역설하 신 주님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신관의 전환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식 발산전환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코페루니쿠스보다 더 앞서서 더 철저한 전환을 예수 님께서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이 같은 예수의 도전의 얘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거룩 거 룩의 하나님〉을 믿어 왔기에 예수님의 이 같은 도전을 도전으로 받아드리지 못했을 뿐이지 요. 몇 가지 보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 11:42절을 보면 거룩의 하나님을 믿었던 종교지도자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정성을 쏟으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렸습 니다. 당시, 십일조 바치지 않는 자는 제사장들이 즉각 불순하고 불온한 인물로 낙인찍었습 니다. 주님은 이 같은 낙인에 대해 정면 도전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사제계급과 성전 운영 에 절대 필요한 자금이었습니다.
  누가 11: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의 위선을 꾸짖습니다. 그들은 평토장한 무 덤같다고 했습니다. 무덤을 만지는 것은 불결하고 불순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눈 에 띄도록 표시를 해두는데, 바리세인들은 무덤의 표시를 없애버린다고 꾸짖었습니다. 즉 순 결과 거룩을 그토록 강조했던 바리세인들이야말로 실제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순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위선자들이라고 예수님은 꾸짖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러워지는 것은 외부적인 정결 규범을 위반했기 때문인데, 주님은 이것을 뒤집 었습니다. 사람을 불순케 하는 것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마가 7:15-16). 그런데 정말 놀라운 예수님의 비판은 착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종교지도자 곧 가장 정결하고 거룩한 사람들과 가장 불순한 사마리아인을 직 접 비교합니다. 억울하게 상처받은 사람을 보고 정결하고 거룩한 인간들은 바로 그 정결 규 범에 따라 가장 불결한 시체같이 된 피해자를 한 푼의 양심의 가책 없이 피해갔습니다. 그 런데 가장 불순한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여행계획을 취소해가면서까지, 그 불결한 시체 같은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서 체휼(compassion)을 합니다. 심지어 after service까지 철저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질의자였던 율법학자의 그 거룩한 가면 을 벗기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궁을 느끼게 해줍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은 자궁의 사 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 비유에서 〈순결했던〉율법학자는 T.K.O된 셈이 지요.

  예수님께서 정결 체계에 도전하셨던 사건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체계에 따라 불순한 존재로 살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만 몇 가지 더 지적해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파격성, 파격적 복음 활동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 니다. 당시 여성은 사회적으로 불결한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 다만, 월경현상과 출산행위 자체가 피를 흘리는 일이기에 불순한 것으로 낙인찍힌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불순(impure)한 존재로 차별 받았던 여성에 대해 정말 파격적인 대 응을 하셨습니다. 즉 자궁의 체휼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혈루증에 걸려 고생했던 여인에게 주님의 존재는 열려있었습니다. 사회가 그 더 러운 피 흘림으로 인해 그녀에게 철저하게 등을 돌려 그녀의 고통을 가중시켰을 때, 주님은 그녀의 병(disease)만 아니라 그 고통전체(illness)를 치유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아니 허락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존재자체가 그 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치유토록 해주었습니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을 생각해봅시다. 그 여인은 남자만의 공간에 침입했기에 불온한 짓을 했지요. 머리를 풀음으로써 여성이 해서는 안될 짓을 했지요(여성은 머리를 단 정하게 하고 항상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했습니다), 게다가 자기 머리칼로 남자의 더러운 발 을 공개적으로 씻었지요. 이 모든 일거수 일투족은 당시 실정법을 어긴 일종의 범죄행위였 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이 여인의 행적이 길이길이 기억되리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녀의 서 러움을 받아 함께 체휼하신 것이지요.
수가성 우물가 여인은 가장 불순한 존재였습니다. 삼중불순자(三重不純者)〈여성, 사마리 아인, 바람둥이〉였습니다. 게다가 신앙의 종파까지 달랐습니다. 헌데 이 여인을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샘물로 초청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수로 보니게여자(Syro phoenician)의 열린 믿음을 확인하시고 오히려 크게 배우신 일이 있었습니다(마가 7:24-30). 이 이방여인을 개로 비유해보았는데도, 이 여인은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개도 주인의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고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과 겸손 을 보시고 그녀의 자궁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여기시어 귀신이 그녀의 딸에게서 떠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교정은 놀라운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자기 교정은 자궁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 상황에서 무엇이 오늘의 정결 체계로 작동하고 있는지 차분히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과연 예수님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하나 님인가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으로 항상 〈거룩·거룩〉의 하나님 만을 닮으려고 애쓴 것이 아닌지 자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룩 거룩의 하나님과 정결과 순수의 하나님은 차별의 하나님이요, 닫힌 하나님이기 쉽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의 하나님이 시요, 분열과 증오와 심판주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멀리 계시며, 무서우신 하니님이기도 합 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자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정다운 보초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엄마가 자기 자궁 속에 있는 아기의 아픔을 함께 느끼듯 우리와 감께 아파하시는 체휼의 하 나님이십니다. 바로 자궁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궁처럼 되시듯 너희도 자궁이 되어라 하셨을 때 눈을 찡긋했을 것이라고 상상한 Borg박사의 상상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요. 자궁은 여성 의 것이요, 여성의 표상인데 남성인 아버지가 여성의 자궁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흥미롭고, 뜻깊고 오묘한 역설적 표현입니까? 예수님의 언어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깨닫게 하는 메타포어(metaphorical)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예수를 닮읍시다. 바로 자궁처럼 체휼하시면서 살아가셨던 예수님, 지금도 그렇 게 살아 계신 예수님을 닮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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