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믿음의 색깔) : 1. 회개와 참회의 삶 진천백곡교회(09.2.23 저녁) 김명혁 목사 설교
시51:17,딤전1:15
오늘 저녁부터 앞으로 3일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믿음의 색깔들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무지개 색깔이 일곱 가지인데 저는 다섯 가지 믿음의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첫째 색깔은 회개와 참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한 설교도 회개하라는 설교였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7,38).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하고 가르친 것도 회개와 믿음의 도리였습니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0,21). 회개 없이는 천국도 없고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고 성령도 없다는 말씀들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첫 번째 색깔입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말하고 참회는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한 번 돌이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린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저들의 발자취를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회개와 참회를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회개와 참회의 시 다섯 개가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6편 32편 38편 51편 143편이 다윗의 회개와 참회의 시들입니다. 제가 매일 읽는 시편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처절하게 회개하며 참회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10,17).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다윗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시기까지 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귀한 종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표현하면서 자기 실패와 자기 멸시와 자기 비하의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진솔하게 사용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18,19,24).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아무 것도 아니로다”(고전3:5,7).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13).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15:8,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8,9).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처절한 참회의 고백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한 종으로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고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이 처절한 고백 때문에 성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도 같은 참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쓰임을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성 어거스틴이야말로 처절한 회개와 참회를 평생토록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개종한 후 11년 되던 해인 397년, 그가 43세 되던 해에 저술한 「참회록」은 어거스틴의 ‘지극히 낮아진’ ‘비관적인’ ‘참회의’ 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인데, 어거스틴의 전 생애의 내면생활의 변화 과정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묘사한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갓난아기 때 어머니의 젖을 게걸스럽게 빨던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비롯하여, 십대 소년으로 남의 집 배나무에서 배를 몽땅 털어 따서 돼지에게 던지며 좋아하던 장난꾸러기의 모습 그리고 정부와 동거하다가 그를 내버리는 육욕에 얽매여 있던 청장년 시절의 방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으며 마니교, 신플라토주의 등을 추구하다가 결국 롬13:13을 읽고 극적 회심을 경험한 회심 사건과 카시키아쿰에서 은거의 생활 등 자신의 내면생활을 솔직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참회록」 1권 초두에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지와 재와 같은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조롱할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긍휼을 바라보고 말씀 드리옵니다.”
그는「참회록」10권 2장에서 개종 후의 자기의 내면상을 아직도 갈등과 어두움에 싸인 불완전하고 무능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내 속에 있는 것을 어찌 당신에게 숨길 수 있나이까? 나는 내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므로 아직껏 탄식하고 있나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나 자신을 거부하고 당신을 택하옵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10권 28장에서 자기 내면의 병들고 추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망할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악한 슬픔이 나의 선한 기쁨과 싸우고 있는데 승리가 어느 편에 돌아갈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나는 망할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망할자이옵니다. 보시옵소서 나는 내 상처를 감추지 않습니다. 당신은 의사이시며, 나는 병든 사람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넘치도록 크신 자비에만 있습니다.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시옵소서. 분명히 당신은 내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은 음란을 삼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나의 옛 습관이 고착시켜 놓은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한 영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상이 내 속에 들어와 나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뿐 아니라 나의 동의를 얻어내고 그리고 실제 행동과 매우 유사한 행위를 유발하고 맙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그와 같은 때에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없으십니까?” 결국 어거스틴은 바울처럼 죄성으로 인한 심각한 고민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며 십자가로 달려갔습니다. “나의 죄악들과 불행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나는 공포 가운데서 빈들로 도망갈 생각을 했으나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금하셨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의 모든 근심을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은 나의 무능과 약함을 아십니다. 나를 가르치고 나를 고치시옵소서. 당신의 독생자가 그의 피로 나를 구속하셨는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사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나의 마음에 꼭 붙잡으며 나의 음식과 음료인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를 먹는 자는 충족하게 될 것이고 그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한 평생 하나님 나라와 아프리카 교회를 위해서 헌신 봉사하다가 430년 8월 열병으로 드러누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있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의 참회의 시편 네편을 써서 자기가 앓아 누워있는 방 벽에 붙여 놓게 했습니다. 그 시편들은 시편 6편과 32편과 38편과 51편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십 일 동안 날마다 그 참회의 시편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통회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히포의 모든 교회들과 특히 평화의 성당에 모여든 신자들이 그를 위한 사랑과 슬픔의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어거스틴은 430년 8월 28일 참회의 기도를 드리다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사모하던 천국으로 옮겨졌고 그가 그렇게도 추구하던 의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시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그날 히포에 소박하게 매장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회개와 참회의 사람이었습니다.
넷째,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도 철저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하므로 한국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는데 그 당시의 상항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태어나게 된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은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사건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처절한 회개와 참회를 하는 가운데서 탄생했습니다.
다섯째,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 이기풍 목사님도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평생토록 계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딸 이사례 권사님은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회고하면서 아버지 이기풍 목사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고난과 인내”를 사모하시던 분이라고 간증을 했는데 그 간증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나는 제주도에서 지나던 어린 시절에 현재 제주도 성내교회의 목사관에서 자라났습니다. 이때에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평생 제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유치원 시절에 아버지가 새벽기도회에 가셔서 식사 때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을 때 아버지를 모시러 심부름을 가끔 다녔습니다. 하루는 교회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의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강대상을 부여잡으신 채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라고 큰 소리로 울면서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나는 문간 옆에 있는 신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버지가 울고 계시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순교하시는 날까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라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성내교회에 유물로 남아있는 강대상을 볼 때 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밖으로 나타나는 대단한 사역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지극히 낮추는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살았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섯째,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도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평생 계속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설교는 회개를 통한 중생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의 시간은 추상같은 권위로 죄를 책망하는 시간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삶이었기 때문에 이성봉 목사님은 항상 죄를 무섭게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에게는 대중들을 아부하는 설교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철저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목사님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려는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평생토록 스스로 크고 작은 일들을 회개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회개를 통해서만 죄인이 중생하고 구원 얻어 천국 간다고 강조했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 개인이나 국가나 사회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회개는 또한 숨은 부끄러움 곧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니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또한 사람과 해결 지어야 한다.” 이성봉 목사님은 “회개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는 주님의 명령이요 소원인데, 회개란 지,정,의,행의 전폭적인 변화라고 폭 넓게 설명했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주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니, 복음의 대지가 회개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그것은 지. 정. 의. 행으로 나타낼 수 있다. 회개는 지적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다. 회개는 정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회개는 의지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회개는 행위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철두철미하게 회개하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 중의 하나는 제가 중학생 때 대구에 있었는데 3년 동안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깊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생 때와 대학생 때는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에 다녔는데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께서 전해주신 회개와 참회의 메시지는 오늘의 저를 만드는 거름과 씨앗과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회개하면서 그리고 참회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회개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첫째 색깔은 회개와 참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철저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시고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믿음의 색깔) : 2. 자기 부정과 항복의 삶 진천백곡교회(09.2.24 새벽)
마26:39,요21:15
어제 저녁부터 3일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믿음의 색깔들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무지개 색깔이 일곱 가지인데 저는 다섯 가지 믿음의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의 첫째 색깔은 회개와 참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색깔은 자기 부정과 항복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부정과 항복을 뜻합니다. 자기 권위와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은 믿음의 길로 들어서기가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로마 군인 백부장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백부장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그를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당당하던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와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의 모습에는 당당한 권위도 체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겸손과 하인에 대한 동정과 사랑만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이 말씀에 대한 백부장의 반응은 겸손과 항복이었습니다. “주여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백부장은 자기의 권위와 체면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서 하나의 종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자기 부정과 항복을 한 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겸손과 항복의 모습을 보시고 하신 말씀은 대단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믿음의 색깔은 자기 부정과 항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후에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스스로 자기 부정과 항복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길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39-41). 사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믿음의 길임을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주장과 자기 권위가 강하던 베드로가 자기를 부정하고 항복하며 참된 믿음의 길로 걸어가게 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월간 프리칭」이라는 잡지 3월호에 기고한 글이 하나 있는 데 그 글의 제목이 “베드로의 항복과 변화”입니다. 그 글의 내용을 여기 거의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서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에게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우리 마음 속에 새겨 보겠습니다. 저는 이 일곱 마디 말씀을 “해변 칠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베드로의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의 항복과 변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일곱 마디 말씀은 실패와 좌절에 빠져 있던 베드로는 물론 우리들의 식어버린 믿음과 사랑과 소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불 붙게 해 주시는 은혜의 말씀들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신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실패와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고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주님에 대한 열심히 특심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해 통곡하며 뉘우치기는 했었지만 다시금 주님을 등지고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만나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했었지만 주님을 등지고 옛 날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극심한 좌절과 허탈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베드로의 처지를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생각과 자기 힘으로 고기를 잡으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고 해석했습니다. 베드로는 또한 주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힘으로 복음 전도 사역을 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여섯 제자들은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의 지시를 받아서 하여야 하는데 베드로는 자기 생각과 자기 힘으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실패와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공허함과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사역을 하다가 실패와 좌절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 처할 때 신앙 양심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이 강할 때 주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일하다가 실패와 좌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며 성령을 의지하면서 온유와 겸손을 품고 일하라고 분부하셨는데 우리가 신학 지식과 비판적 방법만으로 일하다가 실패와 좌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무화가 나무가 잎만 무성한 것처럼 일은 많이 벌려 놓았는데 열매가 하나도 없는 공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실패와 좌절에 빠진 베드로에게 또 다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일곱 번째로 나타나신 사건이었고 베드로에게는 네 번째로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역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고 또 다시 나타나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임했다고 했습니다. 세겜에 내려가서 살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또 다시 나타나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께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이었습니다. 책망이나 훈계를 하시는 대신 동정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얘들아” 이 말은 엄마나 아빠가 아이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말씀은 “너희에게 지금 아무것도 없지?” 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지금 고기도 없고, 믿음도 없고, 순종도 없고, 평안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지금 고기도 없고, 믿음도 없고, 순종도 없고, 평안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패도 아시고 좌절도 아십니다. 우리들의 특심한 열심도 아시고 자만도 고집도 아시고 지친 것도 아시고 탈진한 것도 아시고 공허함도 아시고 궁핍함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지금 너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아무개 목사야, 아무개 전도사야, 아무개 장로야,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은 솔직하고 간단했습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자기들의 실패와 공허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회개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솔직하고 투명하게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꾸미며 위선을 떱니다. “뭐 별로 좌절하지도 않고, 뭐 별로 허탈하지도 않고, 뭐 괜찮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 앞에 거짓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항상 취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금 솔직해졌습니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두 손 들고 항복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잡이 방법을 새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잡이에 있어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미 3년 전에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고기잡이와 전도 사역을 하여야 할 것을 배운 일이 있었습니다. 깊은 데로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전도할 때에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이미 3년 전에 배운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다시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고기잡이 방법을 새롭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가 해석한 대로 주님께서는 복음 전도의 방법을 다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오른 편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왼 편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3년 전에는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했었고 지금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했습니다. 주님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령님만 의지하고 주님이 분부하시는 대로 십자가의 복음을 단순하고 담대하게 증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분부와 지시에 순종을 했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자기들의 경험과 주장을 포기하고 두 손 들고 항복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다시금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고 주님의 권위 앞에 다시금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세 번째 말씀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실패와 좌절과 피곤함과 배고픔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따끈따끈하게 구운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주시면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먹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먹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음식을 먹여 주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자기의 살과 피까지 먹여 주셨습니다. 요6:53,54,56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을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먹어야 합니다. 고기잡이를 크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 목회 사역과 선교사역을 크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 먹어야 하고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은 지금 어린아이들이 되어서 주님께서 가져다가 주시는 떡과 생선을 그대로 순순히 받아 먹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와서 나를 먹으라” 사실 저는 요사이 매일매일 다음과 같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저에게 주님의 피를 부어주셔서 주님의 피를 마시게 하시옵소서! 주님, 지금 저에게 주님의 살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살을 먹게 하시옵소서! 주님, 지금 저에게 주님의 생명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생명을 받아 먹고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 지금 저에게 주님의 눈물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눈물을 받아 먹고 주님처럼 울게 하시옵소서!” 베드로는 어린 아이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주는 음식을 순순히 받아 먹는 착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 말씀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가장 하시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인들이 피차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자기 나 사랑해?" 우리 주님께서 왜 여러분들과 저를 연인처럼 보시면서 우리들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어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여튼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어하셨습니다. 아니 베드로의 가슴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불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또는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명예를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보다는 내 사업과 내 왕국을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한 순수하던 처음 사랑이 금이 가고 깨어지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도 금이 가고 있었고 깨어져 있었습니다. 주님을 배신했기 때문이고 주님을 등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또는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와 같은 주님의 간절한 사랑의 호소에 베드로의 깨어진 사랑이 싸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가슴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헬라어와 영어를 읽어보면 “주님께서”가 주어로 먼저 나옵니다. 전에는 “내가, 내가” 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께서, 주님께서”로 순서가 바뀌어졌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항복하는 순간이었고 자만의 습관과 기질이 변화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 사용한 “사랑한다”는 단어는 “아가파오”라는 단어가 아니라 “필로”라는 단어였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사랑하느냐?”라는 단어는 “아가파스”라는 단어였는데 베드로가 사용한 단어는 “필로”라는 단어였습니다. “아가파스 메” 즉 “네가 100%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아주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필로 쎄” 즉 “나는 60%로 필로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이전과 같은 충동적인 자신만만의 사랑 고백이 아니라 겸손과 진실의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아가파스 메” “네가 나를 100%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필로 쎄”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 60%의 필로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세 번째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의 처지에 내려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필레이스 메? 그러면 네가 나를 60%로 필로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니?” 베드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뉘우치는 눈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허물 많은 베드로 제가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60%의 사랑인 필로의 사랑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필로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필로 쎄.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낮아짐과 겸손과 눈물의 사랑의 고백을 기뻐 받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만하던 기질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번째 말씀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으로 나타내라고 분부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분부했습니다. 주님께서 지으시고 주님께서 목숨을 버려 피 값으로 사신 양이기 때문에 "내" 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양들을 너무 귀하게 여기시고 즐거워하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여기 "어린 양"은 나이 어린 어린이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크고 힘있는 어른 양들만 먹이지 말고 지극히 작고 힘없는 어린 양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영혼의 양식뿐 아니라 육의 양식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미국 생활 후반기부터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언젠 가부터 대접을 받는 일보다 남을 대접하는 일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나 제자들을 만나면 전에는 50불이나 100불, IMF 이후에는 10불이나 20불을 주곤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먹을 것이나 조그만 선물을 주곤 하는데 너무나 좋아합니다. 북한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조선족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육신의 음식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먹이고 주님의 살과 피와 생명으로 먹여야 합니다. 어떤 의미로 어른들을 먹이기 전에 먼저 어린 아이들을 먹이라고 분부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양들을 먹이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인생과 사역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하나님의 양 무리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치라"고 분부하기도 했습니다.
여섯 번째 말씀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미래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마음대로 왕래하고 자기 마음대로 활동했었지만 앞으로는 어떤 분에게 붙잡혀서 움직이고 활동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기 중심적 삶이 항복을 하고 이제부터는 누군가에게 붙잡혀 살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십자가와 고난을 피해 다녔지만 앞으로는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영광과 연결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 자신이 걸으신 그 길을 베드로가 따라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의 운명이 완전히 바꾸어지게 될 것을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주신 특별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이 받을 수 있는 특별한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만 순교의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항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베드로의 운명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일곱 번째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맨 처음으로 되돌아온 느낌입니다. 우리는 처음 믿을 때도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주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하고 난 다음에도 역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초심을 잃으면 안됩니다. 스스로 다 됐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날마다 항복하며 계속해서 주님 만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천국 문에 이를 때까지 주님만을 계속해서 바라보고(시선을 집중), 주님만을 계속해서 생각하고(생각을 집중), 주님만을 계속해서 섬기고, 주님께만 계속해서 순종하고, 주님만을 계속해서 닮는 것을 말합니다. 좌왕우왕 하던 베드로의 삶과 사역이 천방지축의 베드로의 삶과 사역과 기질이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일곱 마디 말씀을 들으면서 베드로는 새롭게 항복하고 새롭게 변화되고 새롭게 헌신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고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바라보며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항복과 변화의 은혜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에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의 죽음을 죽기까지 거듭해서 항복과 변화의 은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의 양 무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가노라.” 그 순간에도 베드로는 다시 회개와 항복과 변화의 은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 주장과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게 될 위험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런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믿음은 항상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그러므로 각처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저는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항복하는 자세로 기도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 찬송은 탕자가 손들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눅15장 말씀을 기초로 지은 찬송가입니다. 탕자는 두 손 들고 항복하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두 손 들고 항복하면서 돌아오는 탕자를 아버지는 큰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3,24). 우리들에게도 베드로에게 주셨던 회개와 항복과 변화의 은혜를 날마다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믿음의 색깔) : 3. 용서와 사랑의 삶 진천백곡교회(09.2.24 저녁)
엡4:32, 요13:34
어제 저녁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믿음의 색깔들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무지개 색깔이 일곱 가지인데 저는 다섯 가지 믿음의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첫째 색깔은 회개와 참회이고 두 번째 색깔을 자기 부정과 항복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믿음의 세 번째 색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의 여러 가지 색깔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세 번째 색깔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제가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 용서와 사랑보다 더 귀하고 더 보배롭고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받기를 거부했던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무섭게 책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든 죄인들과 모든 세리들과 모든 창기들과 모든 병자들과 모든 이방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도 용서하시며 사랑하셨고 애굽 사람들도 용서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도 용서하시며 사랑하셨고 아람 사람 문둥병자 나아만도 용서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진리만의 종교도 아니고 비판만의 종교도 아니고 심판만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향해서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사실 십자가는 가장 비극적인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나타난 곳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서 하늘과 땅이 만났고 동과 서가 만났습니다. 저는 십자가 복음의 특성을 두 마디로 또는 세 마디로 요약해서 말씀 드리곤 합니다. 십자가에는 용서와 사랑과 화해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용서가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화해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을 가장 분명하고 진하게 나타내 보인 믿음의 선배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사람이 성 프랜시스였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1182년 이태리 앗시스에서 태어났는데 한 평생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았습니다. 버림과 청빈의 삶을 살았던 성 프랜시스의 삶은 결국 용서와 사랑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동정하고 품으면서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문둥병자 수용소를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며 그들을 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산적 같은 흉악한 자들에게도,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아니 이단들에게도 미쳤고 사나운 이리에게도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아니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미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에게 찾아온 사람은 그가 친구이든, 원수이든, 살인자이든, 강도이든 반드시 형제로서 맞아 들여야 합니다.” 어느 날 문둥병자 수용소에 성질이 사납고 포악한 환자 한 사람이 그를 간호해주는 형제들에게 대들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더러운 위선자들아, 나는 저주 받은 문둥이다. 예수의 사랑도 너희들의 사랑도 다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몸에 흐르고 있는 고름을 손 바닥으로 훑어서 형제들에게 뿌리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을 본 프랜시스는 그에게 다가가서 욕을 퍼 붓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계속해서 욕을 퍼 붓는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고름투성이의 몸뚱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어라.” 프랜시스는 아무 말하지 않고 깨끗한 물에다 향초를 넣어 불에 따듯하게 데운 다음, 그 물로 문둥병자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차근차근 씻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프랜시스의 손이 닿는 데마다 그의 피부에서 더러운 고름이 걷히고 상처들이 깨끗하게 아물어졌고 동시에 그의 영혼도 깨끗하게 씻어지면서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고 울면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용서와 사랑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용서와 사랑은 모든 포악함과 더러움과 미움을 녹여버리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는 많은 치유와 이적이 나타났지만 그는 한번도 이적을 그의 전도의 방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적을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와 사랑만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프랜시스의 용서와 사랑은 모든 사람들은 물론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의 용서와 사랑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미움과 고통을 용해시켜 도리어 그것들을 생명의 자양분으로 뒤바꿔버리곤 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설교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사람과 피조물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품는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둘째,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또 한 사람이 손양원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년 전에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와 사랑의 삶을 묘사한 창작극 "용서를 넘어선 사랑"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매주 한 번씩 세 번을 연이어 관람하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회 공연에는 부산에 살고 있는 손동희 권사님을 서울로 오라고 해서 함께 관람하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압니다. 오늘의 얽히고 설킨 남남 문제와 남북 문제를 해결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의 삶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의 부스러기를 우리 몸과 마음과 생각에 조금이라도 담고 그것을 나타내 보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다가 총살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2 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습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안재선은 살아났습니다. 안재선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를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아 부산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1950년 10월 13일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1천 여명 애양원 식구들 중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의 정신과 삶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용서와 사랑의 원자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용서와 사랑의 원자탄 앞에 녹아지지 않을 분노와 증오와 저주와 분열과 갈등과 대결의 세력은 없을 것입니다.
셋째,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또 한 사람이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1939년에는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복지 시설인 '보린원'을 만들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 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1946년 11월 베다니전도교회는 영락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영락교회는 피난민들과 실향민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새로운 삶의 출발지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회창립 1주년을 맞은 1946년 12월 1일 주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민중들을 인도하고 돌보는 사회 봉사임을 밝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50년 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전에서는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피난민을 구호하고 국군을 위문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기독교구국회' 운동을 벌이며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밥 피얼스 목사와 함께 기도회를 개최하고 피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피얼스 박사로 하여금 미국에 돌아가서 월드 비젼을 창시하여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피난민들을 돕게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이창로 장로는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의 특징중의 하나는 '긍휼'의 목회자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의 사람, 사랑의 사람, 봉사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래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프랜시스요 슈바이쳐요 테레사로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한 포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모슬렘이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나 증오나 저주는 자리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에 대한 미움도 증오도 저주도 없었습니다. 데모도 시위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권운동에도 있지 않고 사회정의에도 있지 않고 심오한 신학에도 있지 않고 감동적인 설교에도 있지 않고 고상한 윤리에도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고 약해 보이는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사의 말도 아니고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도 아니고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사랑의 부스러기를 우리 몸과 마음에 담고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부탁하시고 또 부탁하신 것은 스승 되시는 예수님 자신처럼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날마다 남을 용서하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제자들이 용서의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드신 다음에는 새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사도 바울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또 권면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3,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보배롭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 죄인들이 용서와 사랑을 가슴과 삶에 지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를 계속해서 바라볼 때 십자가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조금씩 받아서 몸과 마음에 지닐 때 우리는 용서와 사랑의 흔적을 조금씩 조금씩 지닐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마음에 부어주셨을 때 비로서 사랑의 노예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에도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셔서 우리들도 용서와 사랑의 흔적을 지니고 나타내며 살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믿음의 색깔) : 4. 떠남과 버림의 삶 진천백곡교회(09.2.25 새벽)
창12:1, 마4:22
월요일 저녁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믿음의 색깔들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무지개 색깔이 일곱 가지인데 저는 다섯 가지 믿음의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첫째 색깔은 회개와 참회이고, 두 번째 색깔은 자기 부정과 항복이고, 세 번째 색깔은 용서와 사랑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새벽에는 믿음의 네 번째 색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의 네 번째 색깔은 떠남과 버림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집착입니다. 자기 가문, 자기 지역, 자기 민족, 자기 나라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적 본성입니다. 그래서 떠나고 버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유와 지위를 버리는 버림의 훈련도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 마자 부모와 고향의 품을 떠나는 던짐과 버림과 떠남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40세부터는 바로와 공주와 제 2의 고향 애굽을 떠나는 던짐과 버림과 떠남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80세부터 120세에 이르기까지는 동족과 심지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던짐과 버림과 떠남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신34:4). 모세는 세 번의 던짐과 버림과 떠남의 훈련을 받으므로 결국 그의 몸과 영혼이 건짐을 받아 하늘 집으로 올라가는 영광에 참예하게 되었고 결국 인류 구원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의 생활 중에서 범죄한 이스라엘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려는 처절한 자기 버림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32:32).
사실 인류의 구원과 화평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사셨고 떠남과 버림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삶을 사셨고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섬기러 오신 주님 우리 위해 죽으셨네 종 되신 왕 우리 하나님…” (From heaven you came helpless babe. Entered our world your glory veiled.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give your life that we might live. This is our God the servant king…).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14).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20,22).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에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산 분들 중의 한 사람이 성 프랜시스였습니다.
프랜시스는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아버지도 모두 버린 채 한 평생 가난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살 때 가난과 약함의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프랜시스는 가난과 고통과 죽음까지도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고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는 평화의 사도로 살았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성 프랜시스의 버림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예찬하면서 100년에 한 번씩 프랜시스와 같은 사람이 태어났다면 분노와 증오와 갈등과 대결과 전쟁으로 얼룩진 지구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박사와 교수 되는 것을 포기하고 프린스턴에서 신학교 3년 과정만 공부하고 귀국하여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사는 신의주로 돌아와서 목회하게 된 것도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휘 목사님이 “불편하게 삽시다”를 교회의 표어로 정한 것도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산 분들 중의 또 한 사람이 한경직 목사님이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젊은 시절부터 한 평생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떠남과 버림과 약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학문도 명예도 안일도 부귀도 모두 버리고 떠나 가난하고 소박하게 바보처럼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재산도 통장도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한 포용과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민족주의도 국가주의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성서적 애국심"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성서적 애국심이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혹 우리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애국심이 잘못되어서 변태적으로 발전되게 되면 독재주의가 생기는 것이고 배타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떠남과 버림과 약함의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셋째,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산 분들 중의 또 한 사람이 장기려 박사님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고향과 아내와 자녀들을 북에 두고 남한에 와서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소유가 아닌 버림과 나눔과 베풂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주인이나 소유주로 간주하지 않았고 종이나 청지기로 간주하며 평생을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수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습니다. 1975년 정년 퇴임 후 집 한 채 없이 고신 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 준 24평 남짓한 남루한 사택에서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었습니다. “밀톤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와 물질의 노예가 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말과 삶인지 모릅니다. 그는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물질만능주의와 사회적 부정부패를 개혁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스스로 검소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주의로 부패한 우리의 사회를 보다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남북의 통일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사랑의 통일론을 주창했는데 그 당시 거의 절대화하던 정치 경제 이데오로기를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대담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이나 이데오로기도 한낱 쓰레기 일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떠남과 버림과 약함의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믿음의 색깔 중의 하나는 떠남과 버림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본능과는 정 반대가 되는 색깔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는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 그대로 머무르려는 것이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탐욕입니다. 세상이 너무 좋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사셨고 제자들을 향해서 떠나라고 명하시고 버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29,30). 결국 제자들은 모두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살았고 사도 바울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좋아하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8). 한경직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모두 떠남과 버림의 삶을 살았고 가난과 약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경제성장 경제성장에 미친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바보들 같은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고 사도 바울의 삶의 모습이었으며 성 프랜시스를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너무 귀한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 여섯 명만 우리나라에 계시다면 우리 나라와 국민들의 모습은 아주 달라 질 것입니다. 모두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배푸셔서 우리들도 세상의 부귀 영화를 버리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대신 가난하고 약하고 병들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품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믿음의 색깔) : 5. 드림과 제물되는 삶 진천백곡교회(09.2.25 저녁)
롬12:1,행7:59,60,10:2
월요일 저녁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믿음의 색깔들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무지개 색깔이 일곱 가지인데 저는 다섯 가지 믿음의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첫째 색깔은 회개와 참회이고, 두 번째 색깔을 자기 부정과 항복이고, 세 번째 색깔은 용서와 사랑이고, 네 번째 색깔은 떠남과 버림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믿음의 다섯 번째 색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의 다섯 번째 색깔은 드림과 제물 됨입니다.
신앙 생활의 마지막 목표는 드림과 제물 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여기 드리라는 말과 제사라는 말과 예배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원의 목적은 드림과 제물 됨 즉 예배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입니다. 전도도 선교도 구제도 다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토록 계속될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생명까지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제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드리시되 마지막에는 자기의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봉사와 전도의 사명을 다한 후 마지막에는 자기의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평생 전도와 봉사와 목회와 선교의 사명을 다한 후 마지막에는 자기의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제사이고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기뻐 받으시며 그 제물 위에 축복의 손길을 펴시곤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사와 제물로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돌 단을 쌓고 송아지를 잡고 물을 부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 기뻐하시면서 엘리야의 제사와 제물을 받으시고 불로 그리고 큰 비로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과 영혼을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제사와 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자기의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제사와 제물을 기뻐 받으시고 사울을 비롯한 수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안디옥을 비롯한 수 많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그에게 천사와 베드로를 보내셔서 가이사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한 소년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사랑의 예물로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기뻐 받으시고 5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시는 놀라운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자기의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제사와 제물을 기뻐 받으시고 로마 제국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드림과 제물이 있는 곳에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시곤 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가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 와서 순교의 피를 뿌리며 순교와 선교의 제사를 드린 일입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조선의 기독교는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1866년이 없었다면 1885 언더우드와 아펜실라의 인천 상륙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00여 년 전의 조선은 흑암과 사망이 깃들고 있던 미신과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영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삶의 수준도 매우 어둡고 비참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1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에 온 여섯 명 선교사들의 중의 한 사람인 윌리암 블래어 선교사는 그가 도착한 부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도시에는 오수 처리 시설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오물들이 천천히 흘러서 초록 색깔의 도랑을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러운 흰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더러운 띠로 매고 있었다. 아이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에서 놀고 있었고 늙은 여인네들은 가죽처럼 탄 쭈그러진 얼굴을 지니고 우리들을 보려고 집으로부터 서둘러 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겉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전쟁으로 황폐했을 뿐 아니라 정치가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수 세기 동안 왕들과 지방 관리들은 모두 부패해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건장한 한국 사람들이 국가적인 불행을 슬퍼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나라가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게 되었다.” (The Korean Pentecost, pp. 16,24-25).
100여 년 전의 조선의 상황이 이랬다면 140여 년 전의 상황은 더욱 더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43년 전인 1866년 9월 5일 흑암과 사망의 땅이었던 조선에 와서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고 성경책을 던져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대동강 변에 와서 성경책을 던져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조선 관군에 의해 칼에 찔려 순교를 당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목사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조선 땅에 구원의 복음을 전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조선에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까?
첫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란 청년의 선교적 헌신으로 조선에 대한 복음 전파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교적인 헌신과 순교적 죽음은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스 라야더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웨일스, 아이랜드 네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웨일스는 영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우리 나라에 비교하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웨일스 사람들은 종교성이 풍부하고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민요 가운데는 ‘즐거운 나의 집’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웨일스에 영적으로 큰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1866년 평양 대동강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바로 웨일스 출신의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대 부흥이 1904년 웨일스에서 일어난 부흥의 영향으로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로이드 존스 박사도 바로 웨일스 출신이었습니다. 제가 2000년 7월 16일 저녁 영국 케직 사경회에 모인 4천 여명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들을 지적하며 웨일스에 대한 한국교회의 감사를 전했을 때 거기 모였던 웨일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뜨거운 박수로 화답을 했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사무엘처럼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 가운데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토마스 목사로부터 선교적 비전과 헌신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들은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어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가르쳤고 런던 선교회에 선교 헌금을 보내곤 했습니다.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모험을 좋아했고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고 그리고 선교에 대한 비전을 키워갔습니다. 토마스는 17살 때 아버지가 시무하던 하노버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할 정도로 신앙이 성숙했습니다. 노방 전도도 했고 지역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도 했습니다. 18살 때인 1857년에는 런던 대학교의 뉴 칼레지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에 진력한 결과 2년 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신학부 과정에서는 최고의 장학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토마스는 한 때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에 가서 선교하다가 잠시 돌아온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토마스가 20세 되던 해인 1859년 10월 런던 선교회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여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벅찬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 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날 토마스와 몇몇 젊은이들은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중국 선교에 대한 소망을 불태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청년 토마스가 선교의 부름에 헌신하게 된 데는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 아버지의 감화와 격려, 스승들의 지도와 가르침 그리고 록하드 선교사의 감화와 도전 등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과 기도와 말씀의 부모였습니다.
1863년은 토마스에게 있어서는 가장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가 24세 되던 해였습니다. 바로 그 해 중요한 일 6가지가 일어났습니다. 그 해 5월 캐로라인 고드프리라는 아름다운 신앙의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해 5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허입이 되었습니다. 그 해 6월 런던 뉴 칼레지 신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 해 6월 4일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해 7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행 풀메이스호에 승선했습니다. 풀메이스호에 승선하여 중국으로 향하는 사람들 중에는 토마스 부부를 포함한 네 쌍의 영국인 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4개월 반의 긴 항해 끝에 그 해 12월에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선교 사역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하고 조랑말 타는 연습을 하고 아침을 먹은 후 8시부터 12시까지 상하이 방언을 배우고 그 후 잠시 걷기도 하고 대화도 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베이징 방언을 배우고 저녁 식사 후 7시부터 10시까지는 선교 모임을 가지고 그리고 책을 읽고 매주 목요일 밤에는 중국어로 설교를 했습니다.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지낸 상하이에서의 첫 3개월은 꿈과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쁨의 기대는 행복으로 부풀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부부가 당한 비극적인 불행을 통해 조선에 대한 복음 전파의 사역이 진행되었습니다.
복음 전파의 길은 그 시초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환난의 길이였고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그 길을 걸었고 그 뒤를 이은 수 많은 선교사들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아마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에는 반드시 고난과 환난과 순교의 죽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부부가 가는 복음 전파의 길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캐롤라인은 입덧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상하이의 환경은 캐롤라인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의 선임 선교사인 뮤어헤드와의 불화로 인해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주님, 저희들에게 이곳 중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건강에 좋은 곳을 찾아보기 위해서 1864년 3월,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 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캐롤라인은 홀로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미국 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캐롤라인은 유산 후 죽어가면서도 남편에게 마지막 위로와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아기가 유산되었으나 자신은 괜찮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청천 병력 같은 소식이 담긴 아내의 편지를 받아 들고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캐롤라인을 소리쳐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심한 하혈과 감염으로 죽어간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는 통곡을 하며 쓸어졌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선교에 대한 꿈도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런던 선교회에 보낸 핀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는 소천하기 전에 잠시 의식이 회복되어 ‘주님은 나에게 고귀한 분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느낀 상실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슴은 터질듯 합니다. 제 사랑하는 아내는 받을 수 있는 고난은 모두 받았습니다.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습니다. 슬픔이 또 다시 복바쳐 오릅니다. 저는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하여 제 마음을 걷잡기가 어렵습니다. 어찌하였든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1864년 4월 5일 당신의 신실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시신을 상하이 외국인 묘지에 묻고 비싼 값을 치루면서 정성스럽게 만든 묘비를 세웠습니다. 그 당시 중국에는 200여명의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50여명이 각종 질병이나 폭행 등 다른 이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철수하지 않고 선교지에 묻히기를 바라면서 선교 사역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아내의 아버지가 딸이 선교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몇 달 후인 11월 11일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까지 접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삼중적 슬픔과 불행과 비극에 쌓였습니다.
저는 25세의 토마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렇게도 기다리던 태아를 잃고 그렇게도 의지하던 장인까지 잃는 삼중적 슬픔과 불행을 당한 일이 결코 무의미한 일도 아니었고 결코 우연한 일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삼중적인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불행은 앞으로 그가 조선에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준비 과정이었고 훈련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제가 자주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제가 아버지의 순교를 경험했고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고 어머니와의 슬픈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그의 상관인 뮤어헤드 선교사와의 선교관의 차이와 불화로 인해 그리고 자기 건강의 악화로 인해 1864년 12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통역관의 일자리를 찾아 즈푸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토마스 선교사의 성급한 면도 있었으나 뮤어헤드 선교사의 부당한 대우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가 즈푸 세관의 통역관이 된 데는 중국 사람들과 중국어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토마스 선교사가 편지에 밝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즈푸로 떠난 것이 그의 성급하고 경솔한 실수였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곳에서 조선 사람들을 만났고 그래서 결국 조선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급한 실수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신다는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토마스는 슬픔 중에서도 즈푸에서의 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도 벌었고 주일이면 중국인 교회에서 설교도 했고 영국인 교회에서도 봉사를 했습니다. 토마스는 매우 이상적인 선교사도 영웅적인 선교사도 아니었습니다. 매우 인간적인 매우 허물이 많은 그러나 매우 진솔한 사람이었습니다. 즈푸로 온지 한 달 만에 뮤어헤드 선임 선교사와 화해를 했고 런던 선교회에 자기의 경솔함을 뉘우치는 사과의 편지도 써서 보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하여 이사회에 용서를 빕니다. 저를 다시 받아주실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급하거나 불순한 동기로 사임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성급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지나치게 경솔하고 독단적이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보다는 허물과 실수가 많은 그러나 진솔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물과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를 간단하게 마무리 하겠습니다. 어떻게 조선에 복음 전파가 완성되었습니까?
셋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로 조선에 복음 전파의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즈푸를 방문한 조선 천주교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고 참수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불 붙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죽음과 서로 통하고 슬픔은 슬픔과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천주교인의 슬픈 소식이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을 울리고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복음을 전해야겠어! " 토마스 선교사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스코트란드 성서공회에 속한 윌리암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토마스, 계속하여 세관에서 통역하는 일만 할 생각이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 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사표를 내려던 참입니다. 저는 그 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 선교사의 모습은 조선에 복음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 대신 조선으로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통역관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런던 선교회에 재 임용을 받은 후 제 1차로 조선 서해안을 잠시 방문하고 돌아온 후 그 이듬해인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에 승선하여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이 배는 미국 배로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왔던 배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배가 닫는 곳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툰 조선 말을 하면서 성경책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십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성경책입니다." 이때 나누어 준 중국어 성경이 500여 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제너럴셔먼호가 북상하여 평양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조선 군과의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하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습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 선교사는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조선 군은 경계를 하면서도 아주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토마스 목사는 선장에게 "이러면 안됩니다. 어서 저 사람을 보내주시오." "당신은 상관마시오. 내가 선장이요." "정말 조선과 교역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두고 보시오 저들은 곧 내 말을 듣고 통상을 요구해 올 것이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빨리 저 사람을 보내고 저들에게 잘못을 사과하시오" 그러나 미국인 선장은 토마스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대포로 공격을 하던 제너럴셔먼호의 선장은 조선 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모래에 좌초되었습니다.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순간에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 믿으시오!"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을 군사들에게 던졌습니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조용한 틈에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습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제너럴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습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제너럴셔먼호는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의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습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토마스 선교사는 한 손에 백기를 들고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습니다.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강물에 뛰어내렸습니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 베이려고 누군가 칼을 쳐 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평양 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모두 참수토록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동강 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되었습니다. 선장과 중국인들이 먼저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다음 영국 야소교 목사 토마스" 하자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칼을 잡은 박춘권 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춘권은 토마스 목사가 가슴에서 꺼낸 성경책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선교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박춘권은 칼을 빼어 토마스 선교를 찔렀습니다. 1866년 9월 3일 27세의 젊은 나이로 웨일스 출신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인천항에 상륙하기 19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찔러 죽였던 박춘권은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던진 성경책으로 어느 여관집 주인이 방안을 온통 성경으로 도배를 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토마스 목사가 전해준 성경책을 읽은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과 함께 예수를 믿어 장로가 되었고, 황명대는 제너럴셔먼호가 불탈 때 "예수, 예수, 예수" 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에 떨어져서 죽은 한 알의 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조선에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다고요?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평양 대동강에 와서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순교의 제물이 된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서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이 조선 땅에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제물이 된 토마스 목사에게 그리고 선교지에서 외롭게 죽어간 그의 아내 캐롤라인 사모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를 조선 땅에 보낸 그의 부모님과 웨일스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신 말씀 몇 마디를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기뻐 받으시며 그 제물 위에 축복의 손길을 펴시곤 합니다. 저는 수년 전부터 다음과 같은 새해의 기도제목을 정하고 그렇게 기도를 해 오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지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는 제물 될 자격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실 만한 제물로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제물로 드릴 수 있게 하시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북한 땅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한 제물이 필요하시다면 저를 제물로 받으실 수는 없으십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드림과 제물 됨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드림과 제물 됨의 삶을 살고 제물 됨의 죽음을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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