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함의 축복 (마5:7)
그림을 그리는 두사람이 마주 앉아서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며 서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 토론에서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미술적으로 표현해 보자.” 고 했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은빛을 발하며 잔잔하게 뻗어있는 맑은 호수가 마음의 평안을 상징한다고 그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것과 대조되는 엉뚱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천둥같은 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였습니다. 그 폭포 옆에 자작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자작나무 위에 둥우리를 짓고 로빈새 한 마리가 물보라에 흠뻑 젖은 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화가는 이 새의 모습이 바로 마음의 평안을 나타낸 것이라고 그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상처를 준 사우리는 이 두 화가의 평안을 나타내는 그림 중에 어느 것이 성경적인 평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은 당연히 후자의 그림을 지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신앙이 주는 참된 평화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평안을 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인생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 대해서는 관용적입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는 인색한 것이 또한 본능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잘못했을 때 이해해 주지 않으면 속좁은 사람이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누군가가 잘못하면 아이들이 던지는 돌장난에도 개구리는 목숨이 불안해 지는 것이라고람을 원망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들은 기쁨으로 하지만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기쁨으로 투자하기를 두려워 합니다. 인생의 깊은 평안을 누구나가 소유 할 수 있는 생활이라면 결코 하나님은 공평한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인생에 대한 축복을 가르쳐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 담겨진 비밀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긍휼한 삶에 감춰진 비밀!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가장 풍요하게 살아가는 특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긍휼을 이해함으로 그 이유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긍휼을 강조 하셨을까요?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했을까요?
Ⅰ.성경이 말하는 “긍휼” 일반적인 헬라어로서의 ‘엘레오스’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당하는 부당한 고통으로 인하여 야기된 자비심과 더불어 두려움도 내포하고 있는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긍휼은 정의를 수행하는 중요한 성품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다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본문에 쓰여진 이 표현은 좀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긍휼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긍휼의 올바른 의미는 “마땅히 저주 받을 자를 용서하는 행위” 라는 뜻인 것입니다. 긍휼은 단순한 감상적인 동정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평안을 잃어 버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긍휼을 상실한 삶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긍휼의 도덕성과 인생을 깊이 있게 관계 시키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관계를 이제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Ⅱ.“긍휼” 과 “인생”의 관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는 이 표현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밀도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완숙한 표현은 “사랑” 입니다. 그리고 이 긍휼에 대적하는 범죄는 “원망” 인 것입니다. 평안은 원망과 분노 속에서 살 수 없는 정서인 것입니다. 평안은 용서와 사랑속에서 자라나는 정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은 단순한 도덕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도전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너는 긍휼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죄의 저주에 놓여 인생의 평안을 상실한 너의 실체를 알고 있느냐? 라는 질문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이 요구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 사랑에까지 자라고자 하는 그리움과 기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매여 사는 한 주님의 참된 긍휼의 비밀은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용서가 없었다면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절망의 인생이었다’ 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이 “긍휼”의 특권을 나누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잃어버린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과 상처를 당합니다. 그리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도 타인에게 상처와 어려움을 주는 인생으로 동참하기 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용서의 가치와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그렇게 억울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감상적인 편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투자하는 이기심을 조금은 나눔을 통하여 구체적인 긍휼로 베풀어 보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체험을 줄 것입니다. 체험은 현실적이며 증거적입니다. 다시말해 행동하는 신앙에만 존재하는 특권이라는 말입니다. 머리와 가슴으로 애태우는 신앙이 아닌 행동하며 결단하며 표현하는 신앙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모인 우리가 변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모임에서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의 잘못 때문인 것이며 우리의 가슴이 차가와진다면 그것은 나의 가슴에 긍휼을 잃어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누군가를 원망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되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루 하루가 소중한 날입니다. 이제 주님이 주시는 이 긍휼함의 축복을 우리는 서로가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더이상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옆 사람의 손을 잡아 봅시다. 그리고 바로 내가 손잡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긍휼을 나누어야 될 동반자라는 사실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손을 잡으시고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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