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과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불신자는 십자가를 보아도 특별한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보면, 자기 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이며, 능력인지 모릅니다. 도데체 그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자기 죄를 진정으로 깨닫게 만들 수 있을까요?
십자가 뿐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누구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충만한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6) 하고 설교를 했을 때, 유대인들이 마음에 갑자기 통렬한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할꼬"(:37) 하면서 울부짖으며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17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주일에 촛불 옆에서 원고지를 들고 설교문을 읽기만 했는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통회했다고 했습니다. 그 제목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잡힌 죄인들'이었습니다. 1600년, 1700년대 그날의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빛되신 주님 앞에 솔직히 나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죄를 그 밤에 해결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미국 시카고 헤몬드에 젝 카일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곳은 블루 칼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입니다. 사람들이 윤리적 개념이 부족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목사님 강대상 앞에 방탄 유리를 설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젝 카일 목사님은 매주일 설교 때마다 날카롭게 인간의 죄를 지적합니다. 어느날 이 설교를 듣기 싫어하던 한 청년이 권총을 발사해 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가고 목사님은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가서 "목사님 이제는 죄를 그만 말씀하시지요?" 권면을 했더니 젝 카일 목사님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강대상 앞에 방탄 보호막을 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다시 한번 설교를 마치고 나오다가 권총으로 저격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젝 카일 목사님은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잭 카일 목사님이 강단에서 죄를 지적하자 그것을 통하여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교회는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120대의 버스가 운행을 할만큼 성장하는 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현지에 가서 그 교회를 둘러 본 목사님들은 이런 지역에 이렇게 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택가도 아닌 철도 주변에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올 때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죄를 죄라고 가르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그 길로 들어와서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새 능력을 입게 하고 주님을 위하여 뛰게 할 때에 그토록 엄청난 교회는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인도 조동욱선교사님의 편지에는 끔찍한 순교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지난 99년 1월 23일 인도 오리싸(Orissa)주 마나하푸르(Manahapur) 마을에서 금년 58세이신 스테인스 그래함 (Steins Graham) 선교사님이 24세에 호주에서 인도로 와서 34년동안 돌보던 나병환자 공동체에 9살된 디모데(Thimothy)와 7살된 필립(Philip) 두 아들을 특별히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 그래함 선교사님은 두 아들이 아버지의 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지기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인 형제들을 살피다가 돌아갈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근처에서는 그들이 묵을 만한 곳이 없어서 날이 밝을 때까지 타고 간 찝차에서 새우 잠이라도 자기로 작정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던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이 자정을 넘긴 새벽, 찝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휘발유를 붓고는 동시에 불을 붙였습니다. 선교사님과 두 아들은 그 찝차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도당들은 몽둥이로 때리고 그들을 다시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환호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도망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두 아들은 서로 껴안고 불꽃 속에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야 했습니다.
그 힌두교도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도 죄인입니다" 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가 어느 정도 죄인인지, 어떤 죄인인지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일까요?
상담학자 크리스 톨만 박사는 "사람들이 왜 불행하게 사는가?"에 대하여 연구하다가 사람들이 거짓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인 줄로 믿고 살면, 죄책감 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나의 불행은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래"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해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쉽고, 덜 고통스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야"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쉽게만 하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죄책감도 없습니다. "결국 이익이 많이 남는 것이 좋은 것이지" 이런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언제나 자기 이익을 먼저 계산하며 삽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전혀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 진리가 십자가에서 폭로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가 너무나 많지만,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고 지냅니다.
지난 99. 3. 8. 월. 경찰서에서 제게 출석 요구서가 날라왔습니다. 펼쳐서 보니, 차 사진과 함께, [3월 4일 오전 9시 42분 57초, 강서구 대저1동 700번지에서 제한속도 60km인 도로에서 74km로 달렸기에 속도위반으로 적발되었으니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하는 내용의 통지문이었습니다. 그날 교도소에 수감된 교우를 면회가던 길이었습니다. 그 통지서를 받고 하루종일 기분이 나빴습니다. 억울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겨우 74km 인데! 그러나 점점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모든 일이 이처럼 다 사진에 찍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두려웠던 것은 그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 나에게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 없다!] 이 얼마나 전율할 일인가? 나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짓고도 이렇게 무감각하게 넘어간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만일 하나님 앞에 가서야 깨닫게 된 죄가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리고 제 안에 죄를 깨닫고도 죄를 합리화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61km였어도 범칙은 범칙인 것을. "죄 보다 더 무서운 것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교했던 내 안에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눈 마음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기 전에는 자기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동화책에서도, 교과서에서도, 만화나 영화 등에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본래 착한 아이, 나쁜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눈에는 다 착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한편 아무리 착해 보여도, 욕심부리고, 고집부리고, 혈기 내고, 편가르는 것 보면 다 나쁜 아이입니다. 본래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과자를 만나면 가까이 하기가 괜히 겁부터 나지만, 사실, 정도 나름이지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교통사고 나서 싸울 때 보십시오. 교인들끼리 윷놀이 하는 것 보십시오. 정치하는 것 보십시오. 본래 좋은 나라, 나쁜 나라 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는 무조건 좋은 나라, 일본과 북한은 무조건 나쁜 나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각종 전쟁의 실상을 찾아 보면, 다 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지적인 나라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했고,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던 영국과 미국이 얼마나 인종차별을 했는 지 모릅니다. 다 똑같습니다. 상대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면서 눈이 뜨인 사람은 누구도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가지고 남의 욕심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거짓을 품은 채 남의 거짓을 참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도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인 사람을 정죄합니다.
하영이 출생 당시, 못생긴 아이, 교인들이 어떻게 할 말을 찾지 못함, "귀엽네" 어느날, 자기 어릴 대 사진을 들고와서 이렇게 못생긴 아이가 누구에요 "너야" 그 다음부터 누구 잘 생겼다 못 생겼다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 어떻게 이렇게 밖에 못하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야기는 곧 우리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질문> 눅 5:8에세 베드로가 왜 그런 고백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눅 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어부였던 베드로는 엄청난 고기를 잡고서,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순간, 영적 눈이 뜨여, 자신을 보는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라, 그의 세 친구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죄를 회개하라고 했을 때, 자신은 아무리 돌아 보아도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뵙는 순간 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죄가 깨달아 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던 사람들이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다 돌을 내려놓고 가 버렸습니다.
송진경자매, 한 방의 자매와 필통, "제가 요나였습니다. 필통하나 잃어 버린 것은 그렇게 아까와 하면서, 룸메이트는 그렇게 싫어하느냐?"
창신대 김형준교수님은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나중에 예수를 믿고 장로님까지 되셨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 "아버지, 그때 왜 어머니를 때리셨어요?"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는 한참 만에 대답하셨습니다. "네 할머니가 조선 명태와 여자는 때릴수록 부드러워진다고 하셨단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 말을 정말 믿었단다"
어느 남자가 아내의 생일이 가까워서 아내에게 어떤 선물이 필요한지 물었답니다. 아내가 다른 선물은 필요없으니 2시간만 달라고 했습니다. 생일에 아내와 마주 앉았습니다. "여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당신은 맞아! 맞아! 그렇지! 그 말만 해 주세요" 그리고는 아내가 결혼 때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듣다보니 말도 안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아니, 여보 그건" 하니까 아내가 "여보 두 시간만, 두 시간만" 10분을 듣는데, 속이 뒤틀리고, 20분을 듣는데, 화가 치밀어 오르고, 30분을 듣는 데, 죽을 것 같더랍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 왔는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구나" 1시간을 계속하여 말하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울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아내가 겪었던 아픔과 상처를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2시간 후, 아내를 붙잡고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면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질문>
① 엡 2:1을 써 보십시오.
② 여기서 "죽었던"이란 말은 무엇이 죽었다는 말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전도자에게 빈정거리면서 물었습니다. "죄가 무겁다고 했는데, 나는 아무런 무거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50근입니까? 100근입니까?" 전도자가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쌀 10가마를 올려 놓으면 그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죄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영이 왜 죽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영이 죽으면 하나님도, 마귀도, 천사도, 천국지옥도, 영적인 것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죄를 깨닫는 것이 영적 생명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서울 신대 홍성철 교수님은 대학4년 때, 친구의 전도를 받아, 여름 수련회 참석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날까지, 아무런 감동도 없어, 다음 날 내려 갈 결심을 하고 자기를 전도한 친구에게 가는데, 오히려 자기 방으로 오는 그 친구를 복도에서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손을 잡고 울면서, "성철아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야 한다!" 하는 말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 답답하여 혼자 말 같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정말 제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있다면 가르쳐나 주십시오" 그런데 점점 지나간 날의 죄가 깨달아 지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오 이 죄인을 받아 주옵소서!"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자기 죄를 깨달은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자기 죄를 알기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되고, 만날수록 은혜롭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분명히 행위로만 따지면,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백배 낫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스스로 자기 죄를 다 폭로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둘 중에 누가 더 무섭습니까? 자기 죄를 모르면 회개가 불가능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속죄도 구원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질문> 여러분은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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