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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혹심한 고통

십자가 자랑

by Bliss Yeo 2015. 11. 1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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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혹심한 고통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받으신 고통의 각각 다른 일면을 묘사하는 말이 최소한 여섯 번 나온다. 복음서 기자들은 주님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서 가장 강한 어조의 헬라어 단어들을 사용했다. 여기에 사용되는 단어들의 깊은 의미는 단편적으로 밖에 알 수없지만, 그것도 매우 신중하게 조사해 봐야 한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마 26:38)

예수께서는 마음에 눌림을 받으셨다. 주께서는 항상 슬픔의 사람으로서 고민을 갖고 계시던 분이었지만, 이번에 맞으시는 고민은 아주 큰 파도처럼 밀려와 자신이 그 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같이 느껴져서, 전에 당하시던 모든 슬픔의 고통들은 잔잔한 물결로만 여겨졌을 정도였던 것이다.

-"심히 놀라시며"(막 14:33)

예수께서는 아주 심하게 놀라셔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셨다. 스웨트(H.B. Swete)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주님의 감정은 우선 두려움에 의한 놀람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수난을 당하실 것을 알기는 하셨지만, 눈에 보이게 아주 가까이 닥쳐오자 두려움은 생각하시던 것보다 더했던 것이다. 이 두려움은 인간으로서의 주님의 마음에 새롭게 인식되었고, 따라서 예수님의마지막 순종의 경험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아버지께 대한 경외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이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스런 것들로 섞여졌는가를 내다보시고는, 크게 놀라서 다른 생각은 못하실 정도로까지 압도당하셨던 것이다.

-"심히 ... 하사"(막 14:33)

예수께서는 아주 극심하게 놀라시고 고민하셨다. 라이트푸트는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혼란스럽고 침착하지 못하며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를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다른 주석가는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마음이 편치 못한 상태"(away from home) 또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다. 사실 말 그대로 예수께서는 집을 떠나신 상태(away from Home)가 아니던가? 또한 이 사실이 주님으로 하여금 받으실 고난을 더 참혹하다고 생각하게 하지는 않았겠는가?

-"내 마음이 ...죽게 되었으니"(마 26:38)

여기서 사용되는 헬라어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고민과 슬픔"을 뜻하고 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여 잠시 주님을 떠나갔었던(눅 4:13) 마귀가 이제 다시 돌아와서는, 전에 온갖 달콤한 것으로 유혹하던 것과는 달리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로 겁을 주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게, 그리고 예언된 진리의 말씀을 이루시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마귀는 전에 주님을 꾀어 넘기지 못했으므로 이제는 겁을 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죽게 되었으니"라는 말의 의미는 슬픔과 고민의 무게가 너무 중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기도 전에 자신이 육체적으로 무너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셨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셔서 예수님께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셨던 것이다(눅 22:43).

-"힘쓰고 애써"(눅 22:44)

예수께서는 골로새서 2장 1절에 번역된 말처럼 심한 갈등상태에 있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히 5:7) 기도하셨다고 한다. 어둠의 세력이 예수께로 가까이 다가오면서, 또 십자가를 지실 때가 아주 임박해 오면서 예수께서는 전에 경험치 못했던 갈등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때는 추운 밤이었지만, 예수께서 그러한 고민 중에 기도하시니 자연의 원리가 뒤바뀌게 되었다. 고민으로 인해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같은 상황에서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피가 심장으로 모여야하는데, 오히려 땀구멍들을 통하여 방울을 이루며 땅에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비할 데 없는 주님의 사랑의 증거 앞에서 경외하는 심정으로 찬양을 드려야 한다.

예수께서 당하신 겟세마네의 고민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합쳐진 신비의 사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신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순교의 시간이 가까왔을 때 종종 기뻐했던 순교자들의 고난과 전혀 닮은 점이 없다. 순교자들의 고난에는 대속적(代贖的)인 요소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 하시고 또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으신 후에 고난을 받고 죽었을 뿐이다. 그들이 고난을 받고 죽어갈 때에는 아버지께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향기로움을 날리는 에덴은

기쁨의 동산이었어라.

그러나 꿀을 머금은 에덴의 꽃들에서

우리의 독기는 발했도다.

슬픔이 깃도는 겟세마네는고통스런 밤의 동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독기를 없애셨으나

우리의 꿀은 그 독기 속에서 자라는도다.

그런즉 우리는 가장 향기로운 꽃에서라도

우리의 독기를 마실 수 있으되

그리스도께서는 그 지독한 독기에서라도

사망에서 생명을, 고통에서 기쁨을 뽑아 내시는도다.

-길레스 플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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