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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계신 자리-캘빈 밀리

도서 비평

by Bliss Yeo 2015. 11. 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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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계신 자리

캘빈 밀러 지음/이용운 옮김

요단/2001년 10월/240쪽

 

 

1. 내면의 문제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도 내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외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놀랍도록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은 명료하고, 신학적 진리들 역시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실재는 늘 가슴의 문제입니다. 그분의 큰 사랑과 구원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자아 속에 있습니다. 오직 그 곳에서만 우리는 그분을 만납니다. 내면은 시공의 모든 법칙을 초월하여 우리 자신보다 더욱 큰 삶과 운명을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우리가 담고 있는 것은 현재의 우리 존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천국이며, 육신적 틀에 갇힌 그 모든 것들과는 달리 어떤 크기에 제한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지고지순의 위대한 목적으로 충만합니다.

최근 나는 아빌라에서 테레사와 후안 데 크루즈가 기도했던 좁고 천장이 낮은 방 앞에 서 있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방에서 그들은 내적 삶이 너무도 충만해져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 중력을 거슬러 일어나면서 공중으로 떠올랐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실제로 공중으로 떠올랐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적 삶을 세상의 상식적 사슬을 깰 만큼 충만하게 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굴레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집니다. 하늘이 우리 안에 살기에, 공허한 중력은 우리를 이 땅에 묶어 둘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몹시도 컸으므로 나는 그분의 실체에 대한 증거를 보고 싶었습니다. 단 한 마디만이라도 내 귀로 직접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분의 존재를 확신할 것 같았습니다. 그분께서 일 분만이라도 자신을 보이시면 나는 분명한 증거를 갖게 되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치기어린 탐색은 믿음의 표피에 대한 탐색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안에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 그랬습니다. 내면은 믿는 자와 그의 주님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 작은 만남의 장소에 우리가 숙고하는 내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역설로 복잡해질 것입니다. 첫 번째는 홀로 있는 곳에 곧 임재하심이 있다는 역설입니다. 내적 침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토록 대화하고 싶어하는 내재하시는 그리스도께 귀기울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내면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마음을 비우게는 하지만 다른 것으로 채우게 하지는 못하는 그런 명상법들은 능력이 없습니다. 많은 요가 수행자들이 비로 쓸어내듯 마음을 깨끗이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비워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곧 방금 쓸어낸 것들과 똑같은 쓰레기와 번잡함으로 채워집니다. 내면은 그 청결하고 고요한 것을 주재할 누군가를 찾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때, 우리는 자신을 합당한 내적 예배로 드립니다.

두 번째 역설은 물러가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이 더 중요하게 보이기에 묵상시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곧 행동입니다.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면서도 예수님을 잡은 내 손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마틴 루터의 자세도 그랬습니다. “나는 오늘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감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묵상은 곧 전진입니다.

세 번째 역설은 초월이 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주적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은하계를 활보하는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과의 고요한 친교를 위해 오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담기에 우리는 너무 작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려 은하계를 넘어오시는 전능자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한편 그분을 내적으로 충만하게 알아가고자 할 때 생기는 세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첫째, 더 깊이 알려는 갈망은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어 이 세상의 필요를 간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의 추구를 내세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이 주는 고통과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미를 주려고 나설 뿐임을 세상이 알도록 힘써 도와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향기로운 예수’ 증후군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열정은 종종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어 예배를 망치며 감정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광야에 차려진, 오직 둘만을 위한 식탁과 같습니다. 내면은 화려한 잔치가 아니라 우리 가슴의 외로운 사막에 있는 연인들의 만남입니다. 오직 둘만의 삶과 교제가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함께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 침묵하는 중에도 우리는 밀접히 하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그분의 완전한 존재가 우리와 하나될 때까지 우리는 완전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2. 내적 여행의 장애들

진공은 어떤 물질이든 무한으로 끌어들이는 감압된 공간입니다. 사람의 영이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이 공간은 가까이 있는 것은 뭐든 끌어들여 자신을 채웁니다. 거의 잡동사니 그릇과 같습니다. 우주에는 무엇이든 비어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어떤 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려깊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그것을 잡동사니로라도 채워놓게 됩니다.

영적인 내면성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을 말합니다. 우리의 굶주림은 어떤 무리에 속한 것만 가지고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그분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배고픔으로 인해 광야의 식탁을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웃고, 울며, 감정을 쏟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나러 나옵니다. 주님은 “내 앞에 상을 베푸시고...”(시 23:5) 그 식탁에는 오직 두 개의 의자만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기쁨으로 먹고 마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들이 우리를 대항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엄청난 공포와 공격 가운데서도 최고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무서운 적 못지 않게 그 식탁에 위협적인 또 다른 전쟁이 맹위를 떨칩니다. 이것은 죄와 싸우는 우리의 내적 전쟁입니다. 분명 내적 투쟁은 대단히 힘겹습니다. 그러나 배울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훈련은 그리스도의 내적 통치의 문제입니다. 죄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다만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저급한 성품은 예배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율법주의도 우리 죄를 제약하기보다는 죄를 정의하고 우리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리게 하는데, 예배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죄에 대한 모든 관심을 내려 놓게 합니다.

특히 서구에서는 회심 이전의 본성은 성, 음식, 권력, 조급증 등에서 이중 위험을 나타납니다. 이 젊은 사자들은 그분의 형상을 따르려는 우리의 소망에 대고 포효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초대자의 기쁨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들의 포효 앞에서 우리 마음을 굳게 할 때에만 식탁은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둘이서만 앉게 되며, 늘 그분 안에서만 사는 삶을 열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면 초대자께서는 우리 사랑을 느낍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열망이 우리를 거듭거듭 그 식탁으로 데려올 것을 압니다. 내 모든 인생길마다 그 식탁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다함 없는 존전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6).

3. 바늘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늘귀를 지나는 유일한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이기적인 짐들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 바늘귀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맞는 유일한 문입니다. 식탁의 기쁨을 알려면 우리는 날마다 포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늘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두 나라를 섬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재산을 거부하지 않고 경건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본성 자체에 대한 것 같습니다. 욕망이 우리 안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큰지요! 소비세계에서는 내면을 갈망하는 것만으로도 광신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이른바 보편적 가치라는 것을 무시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성 프란시스의 회심을 둘러싼 다양한 전승들이 있습니다. 제피렐리의 영화 <브라더 선 시스터 문(Brother Sun, Sister Moon)>에서 프란시스는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거절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란시스는 아버지가 준 비싼 옷들을 아시시의 광장에 벗어 놓고 나체의 몸으로 버림받은 문둥병자와 가난한 자들이 살고 있는 햇빛 가득한 들판으로 향했습니다. 프란시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가진 것에 대한 당혹감으로 얼굴을 돌립니다.

그러나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소유는 우리를 지체 높은 괴물로 만드는 일종의 독입니다. 극소량만으로도 우리보다 적게 가진 사람보다 우리가 더 잘났다고 믿게 만듭니다. 우리의 초대자는 늘 소유보다 본질을 더 강조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가난이 문제입니다. 그분의 내적 임재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재산이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배와 사업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너무 좋아해서 포기의 대가는 전혀 자각하지 않은 채 옛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경배의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각하며 하는 포기는 단순한 금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경이로움에 매혹되기만 하면 포기는 헌신의 필요조건이라기보다 부산물이 될 것입니다.

그분의 손님으로서 우리는 예전의 이기적 삶에서 돌아서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초대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외에는 어떤 야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늘귀를 지나 그 외로운 식탁에서 우리의 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우리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것으로는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 그분의 손길이 구현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르게 놓일 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의 친밀한 친구라 표현하십니다. 둘이 앉은 그 식탁에서 우리를 마주 보시며 온화하게 웃으십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런 말씀인 듯합니다. “나는 바늘귀를 통해 너를 데려왔노라. 네가 신실하였으니 많은 것을 다스리게 하리라.”

4. 식탁의 그리스도

식탁에서 하나님은 번쩍이는 보좌에 높이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역겨워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되려고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었을 때 그분은 사람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값진 것이라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그분의 일체성을 기뻐하지 않고서는 광야의 식탁에서 결코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식탁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물론 단순한 인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너무 생생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실체의 계시자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 중의 하나로 바라보면서 우리를 초월하여 놓여진 모든 신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구세주는 영원한 세계의 실체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은 “나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우리를 시간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또한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들에게 다음 세계의 실체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언젠가 헬렌 켈러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참 실체라고 말했습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아야만 알 수 있는 영광스러운 실체를 알고 있습니다.

식탁의 그리스도는 그분의 완전하심을 통해 불완전한 우리 자신을 상기시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분의 완전한 존재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위로의 손길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그 앞에 나갑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 안에 그분과 같이 되려는 갈망을 심어주십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그분을 만날 때 ‘우리는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그 식탁에 계속 오면서 나는 나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겸손해졌습니다. 나는 나의 부족한 상태 그대로 사랑받았고, 완전해지기를 고대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호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식탁에서 우리의 초대자에 대하여 참 많이 배웁니다. 우리는 그분의 연민에 대해 배웁니다. 그분께서 식탁에서 신비로운 은혜로 모두를 돌보는 동안 그분의 온 사랑과 권능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집중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뢰를 배웁니다. 우리가 언제 그 식탁으로 피하든 그분께서 항상 거기에 계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급히 사라지는 것은 우리들이지 그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며 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분과 아버지의 굳고 완전한 관계를 배웁니다. 그 식탁에서 우리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임을 배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믿음은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신뢰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심지어 골고다의 고난도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헌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결코 홀로 걷지 않는 것처럼 식탁에도 혼자 오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그분은 식탁에 아버지를 모십니다. 이제 우리는 권능의 비밀을 압니다. 우리도 지속되는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에 버려진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지옥이 우리 주위에 펼쳐 있어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5. 기도, 그 식탁의 교제

광야의 식탁에는 빵 한 덩어리뿐입니다. 식탁에 놓인 빵은 하나되는 영적 교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됨은 두 열망에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열망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열망입니다. 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참 경건을 아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십자가의 산물이기에 우리는 이 교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망설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되는 교제의 기쁨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분리의 담도 무너져서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됨을 추구하는 기도는 사실 그 자체로는 힘들지 않지만 기도하고자 마음 먹는 것은 어렵습니다. 기도보다는 다른 형태의 대화를 선호하고, 사실 그게 너무 지나쳐 잠시나마 침묵의 시간을 갖기조차 힘든 지경입니다. 또한 우리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기도는 간구입니다. 그러나 간구의 위험은 이기심입니다. 긴급한 간구는 대체로 본능적인 이기주의에서 유래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는 흔히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고 그분을 우리의 편협한 의지와 경건의 포로로 만듭니다. 사실 그분의 전체적인 계획은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게 기도하더라도 우리 뜻에 의해 바뀌지는 않습니다.

간구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셨던 위대한 기도로 끝나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게 해 달라는 간구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마지막 결정은 자신의 소망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아들의 삶을 통해 두 분의 뜻을 모아 세상을 구하려는 큰 계획이 있었습니다. 두 분의 뜻이 만났는데 그 어떤 간구인들 불가능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의 뜻이 아버지의 계획에 순복되었다는 사실은 두 분이 하나임을 증거합니다.

여기에 간구의 세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사랑의 아버지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구할 때 티끌만큼의 거리낌도 없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보다 높은 뜻에 따라 보류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 기도의 궁극적 동기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뭔가를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럼없는 간구로서 아버지께 가까이 가 이것저것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어쩌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분의 대답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므로 그분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식탁의 친밀감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는 기쁨입니다. 그분과의 사귐에 잠긴 신자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큰 은혜를 경험하는 줄 의식하지 못합니다. 큰 집회에서 기도할 때에는 연합이 아니라 감정에 매달리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으로 연합되는 순간 두려움으로 떨게 됩니다. 신성과의 친밀이 우리를 무섭게 합니다. 그러나 광야의 침묵이 우리 두려움을 없애고,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듣는 기도는 관계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침묵을 듣고, 침묵에 소리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침묵입니다. 듣는 중에 우리의 내적 모순들이 해결됩니다. 우리의 엉킨 심리는 풀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말없는 신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프랑크 라우바흐는 발전기와 전기장치가 완공되었는데도 단 하나의 전구도 켜 있지 않은 거대한 댐을 보았습니다. 왜 발전기들이 돌아가지 않는지 묻자 수문이 잠겼다는 것입니다. 전능자께서도 우리의 수문이 열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침묵은 그분께서 들어오는 문입니다.

일단 내적 침묵을 실천하면 우리 앞에 하나의 원리가 더 놓여집니다. 이 원리를 통해 우리는 듣는 방법을 하나 더 배우는데, 곧 우리 주변 세계의 ‘그리스도화’라는 원리입니다. 그리스도화는 우리 삶 속에 있는 사람과 상황을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건도 이런 식으로 보면 우주적이 됩니다. 내 세계의 그리스도화는 주위의 걱정스럽고 급하며 찌푸린 얼굴에 구주의 얼굴을 그리는 일입니다. 또한 가장 복잡한 상황들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글자를 새겨 넣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새겨지자마자 복잡한 상황들은 의미와 생명을 낳습니다.

6. 순종의 기술

우리는 숨은 곳에서 나와 그분 앞에 우리 자신을 열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여는 것은 그분과 함께 기꺼이 우리 자신을 보려는 마음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악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를 슬퍼하며 하나님과 함께 내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인 여기서 우리는 그가 우리를 깨끗이 해주실 것을 기다리며 그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순종하여 완전함의 권위를 얻었습니다. 승리의 왕관은 순종의 금으로 정련되는 것을 그의 삶이 명백히 증거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도 기꺼이 그의 뜻을 이루려는 우리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한 명령에 순종할 때, 그는 그를 섬기려는 우리의 내적 보좌에서 다스리시고, 그가 거기 계실 때까지 우리 삶이 내적으로 넓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 결국 생명까지 잃게 된 어떤 병으로 고생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병을 진단받고서 그는 영원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목사들처럼 그는 교회 행정과 교인들 일에 그의 삶 대부분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 동안 그는 ‘하나님의 것’들로부터 물러나와 ‘하나님 자신’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같이 되려는 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제 치유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죽으면서까지 우리와 하나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죽으면서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사형 집행인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신실하게 따르면서 그분은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 주님, 왕국, 성경 공부, 사역 등은 죽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순종 가운데 그런 단어들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 이상으로 채워집니다. 순종은 한 소망으로 묶인 두 마음의 축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러운 일체감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식탁의 교제는 우리 것입니다. 먹고 싶을 때마다 올 수 있지만 먹을 사람은 순종을 기억해야 합니다.

7. 그리스도와의 폭넓은 교제

영적인 세계를 향한 한 문이 열립니다. 상상력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는 우리 감각의 문턱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식탁의 그리스도를 창조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구세주와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못박힌 손이 사랑하시는 온 세상과 나를 향하는 것을 봅니다. 상상은 회개의 낮은 제단에서 일어나 믿음의 높은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우리는 결코 큰 바다를 알 수 없지만 단 한방울의 바닷물로도 바다의 모든 요소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가 숨겨져 있는 동안 그분은 자신을 유한하게 계시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계를 초월하여 그 자신으로 모든 생명을 채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는 신령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몸과 마음의 틈을 채우시므로 삶의 모든 면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넓혀감에 따라 우리의 세계도 변할 것입니다. 적절한 대답과 엄격한 판별은 이제 내 마음의 갈증을 채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처음 알았을 때는 지금보다 모든 것이 더 분명했습니다. 그 때는 나이도 어렸고 읽은 것도 거의 없었으며, 배우지 않은 세계의 명료한 지식에 맞설 책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나는 답은 언제나 더디게 오며,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과 관계에 대한 내 판단을 명확히 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장을 통하여 나는 언제나 어떤 것의 전부를 알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분명한 답이 없어도 질문들에 좀더 귀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늘 그분 안에 있지만 또 늘 그분께 갑니다. 우리는 그분의 광대함 속에서 걷지만 그분께서 식탁 같은 작은 공간에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분임을 알면서도 그분을 찾아 식탁으로 갑니다.

시편 139편의 하나님은 행진과 시장과 광야의 하나님입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하나님을 단지 예배나 어떤 조용한 골방에서만 만났습니다. 얼마나 잘못했는지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보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거리에서 사셨습니다.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어울려 담소하고 포도주를 마셨으며, 만찬에서는 사랑했던 죄인들과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러한 행진 가운데서도 구주는 여전히 길 잃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리하여 모든 행진은 성화됩니다. 또한 시장에서도 그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이라는 공간 역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광야의 식탁은 은유가 아니라 실재입니다. 자연의 깊은 곳에서 홀로 그분을 만나는 때보다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각각의 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울려 퍼질 때까지 노래될 것입니다. 강가의 싯다르타처럼 나는 나를 보시며 채우시는 하나님을 알고 느낍니다.

나는 이제 광야의 식탁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 식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곳에서는 그 사랑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 친밀한 광야는 확장될 것입니다. 모든 행진과 시장과 자연 자체가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고 그분의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실체를 기쁨으로 모실 때까지 확장될 것입니다.

8. 영원

영원은 그것이 지옥이든 천국이든, 항상 지금 시작합니다. 지옥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천국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그분과 나누는 관계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식탁은 계속되는 관계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열중하여 우리의 놀라운 다음 정착지를 꿈꾸며 그분과 걷습니다. 계속되는 구주와의 교제에서 우리는 삶의 경계를 기쁘게 예상합니다. 우리가 회심하던 날 얻은 내적 임재는 이 소망을 확고하게 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궁극적 대답입니다. 죽음은 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삶과의 마지막 고별이 영광으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전염병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해안을 휩쓸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감염될까 두려워 시신 수습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파라볼라니(교부시대에 자발적으로 병자를 돌보고 장사지내던 한 형제단의 회원들)라고 알려진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했습니다. 그들은 신자와 주님의 영원한 연합에는 사망의 쏘는 것이 없는 것을 알고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시간은 짧지만 중요합니다. 성서는 어디서나 우리는 삶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토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안한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우리의 삶과 하루에 대해 오래 묵상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향하는 만큼이나 분명히 영원을 향하게 되어 있으며, 지각 있는 도덕적 존재로서 시간과 영원 둘 다와 마주해야 합니다.”

식탁의 교제는 우리 생애의 청지기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광야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신성한 교제의 골방을 떠나야 할 때 사랑하는 성령은 삶의 온갖 상황과 분투에서 매일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바로 그 보혜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것도 가능하게 합니다. 마침내 우리의 초대자가 식탁에서 일어나는 날, 우리도 일어나 그분의 아버지가 계신 종착지로 함께 걸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승리에 있어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 교제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 식탁에서 해온 것처럼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천국문은 좁은 문으로 폐쇄된 수도원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좌로 나란히 걷는 열린 에덴 동산입니다. 그리스도와 사귀며 사는 우리는 이 마지막 시간에 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가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구주와 나눈 모든 기쁨은 하늘에서 영원한 하나로 승화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의 식사는 고요합니다. 우리의 초대자는 우리 마음의 중심, 고요한 식탁에 함께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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